<발칙한 현대미술사/윌 곰퍼츠/김세진/알에이치코리아>
<발칙한 현대미술사/윌 곰퍼츠/김세진/알에이치코리아>
1.
나의 미술사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나는 국민학교 입학 전부터 글자보다는 그림에 이미 친숙해져 있었다. 글자는 누군가가 가르쳐줘야 하지만 그림은 나에게 원시언어처럼 자연스럽게 독학이 가능하게 했다. 종이와 연필이 귀하던 시절이라 나의 그림 도구는 주로 보드랍고 찰진 흙을 가진 맨땅과 끝이 뾰족하고 단단한 나무 작대기가 전부였다. 내가 사는 집의 좌우에 조그만 마당이 있었지만 흙이 투박해서 그림을 그리기엔 적당하지 않았다. 다행히 동네에는 그림을 그리기에 적당한 흙을 가진 작은 공터가 있었고 땅주인은 마을에 살지 않았다. 공터는 동네 아이들의 작은 놀이터가 되어서 미니 축구나 야구를 하기도 했고 구슬치기 전용 구장이 되기도 했다. 그곳에서 내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마을 형들이 학교에 가고 없는 오전이었다. 그때는 흙이 적당한 습기를 머금고 있어서 선이 선명하게 잘 나왔고 흙먼지가 날리지 않아서 더없이 그림을 그리기에 좋았다. 공터 옆집 아저씨가 기분이 나쁠 때 가끔씩 주인행세를 해서 쫓겨날 때도 있었지만 나는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 언제나처럼 아무일 없듯이 그곳에서 나만의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내 그림의 대상은 언제나 로보트였다. 원시인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주술적인 의미를 담아 동굴 벽화를 그렸듯이 나 또한 남자 아이들의 로망인 그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서 주구장창 로보트만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로보트 장난감을 간절히 원하진 않았다. 단지 그것을 그리는 것이 더 좋았다. 그러나 내 순박한 바람과는 달리 이후에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나의 그림이 주술적인 힘을 발휘하였는지, 누나랑 강변에 갔다가 그곳 갈대숲에서 고급스럽고 큼지막한 로보트 장난감이 마치 나에게 주는 선물처럼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스위치를 누르면 주먹이 발사되는 고급종으로 우리 동네 가게에는 팔지도 않는 것이었다. 너무 귀한 로보트가 어느날 갑자기 내 것이 되었지만 나는 그 장난감과 쉽사리 친해지지 않았다. 왠지 나에겐 너무 부담스러워서 편하게 가지고 놀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로보트도 마치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우리집의 가난과 촌스럽기 그지없는 나를 선뜻 주인으로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다. 이후에 내가 로보트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나는 그 고급진 장난감보다 예전부터 해왔듯이 로보트를 땅에 그리는 것이 더 좋았다. 공터가 가득 차도록 대형 마징가를 그리고서 만화의 주인공처럼 조정석에 들어가서 실제로 로보트 조종사가 되는 놀이는 장난감이 줄 수 없는 땅그림만의 매력이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종이와 연필을 가지게 되면서 나의 그림은 땅에서 종이로 옮겨왔다. 그림의 사이즈도 종이를 아껴쓰기 위해서 작아졌고 땅그림보다 디테일해졌다. 나에게 로보트 그림의 가장 큰 변화는 입체를 인식하게 된 일이었다. 입학 전에 마당에 그리던 로보트는 항상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평면 로보트였는데 어느날 그림 딱지에서 태권브이의 옆 모습을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태권브이의 옆모습은 앞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처음에는 마치 태권브이가 아닌 다른 로봇을 보는 것처럼 생소했다. 그러다가 태권브이가 옛날 장군들이 쓰는 옆과 뒷머리를 덮은 갑옷으로 된 뿔 달린 투구를 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후 많은 연습과 노력을 통해 옆모습을 입체적으로 그리는 방법을 터득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나는 다양한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다양한 시점에서 로보트를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스케치 실력이 이미 정점에 달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의 범상치 않는 그림 솜씨를 알아본 것은 국민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이었다. 선생님께서 국군의날 그림그리기 대회에 나를 추천해 주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샘플 그림을 주면서 집에서 그대로 따라 그리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그 그림을 그대로 그렸고 익숙치 않던 크레파스로 꼼꼼히 색칠하는 법을 스스로 익혔다. 그림의 내용은 먼 곳을 응시하는 철모를 쓴 군인 아저씨의 옆모습이 도화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고향의 초가집과 국기봉에 매달린 피묻은 태극기가 펄럭이는 장면이었던 것으로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이 그림을 완벽하게 외워서 재현했고 결국 그 그림대회에서 저학년부 특선을 받았다. 덤으로 어디에 써야할지도 모르는 커다랗고 무거운 국어 사전을 부상으로 받게 되었다. 81년도에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사전이었다. 나와 같이 대회에 참가한 동네 형을 따라간 극성스러운 아주머니는 자신의 아들은 상을 받지 못했는데 저학년부에서 내가 유일하게 상을 받았다며 같이 오지 못한 우리 엄마에게 요란스럽게 축하를 해주었다.
이후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나의 그림 솜씨는 공개적인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더이상 나를 그림 대회에 추천하지 않았고, 국민학교에서는 그림으로 교내상도 한 번 받아보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담임선생님들이 그림에 관심이 없어서 나를 눈여겨 보지 않았거나, 그들의 눈에는 내 그림이 하찮게 보였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나는 음지에서 여전히 습관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내 교과서 여백은 온통 그림으로 빽빽히 채워졌고, 남는 공책에는 만화를 그렸다. 제법 스토리가 있는 만화를 그려서 공책 한 권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자만했다. 우리 동네는 물론이고 학교에서 선후배를 통틀어 나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선생님들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이 나의 그림 솜씨를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인정을 해주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아니 세상의 또래들 중에서 가장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라고까지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6학년이 되어서 도시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여학생이 옆반에 전학을 왔다. 그 여학생은 물감을 사용하고 색을 섞어서 명암을 넣을 수 있었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도 그림 대회에 나가서 많은 상을 받았다고 한다. 단연 우리 학교의 대표로 그림 대회에 나가는 것은 그 여학생이었다. 스케치는 그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자신감이 있었지만 물감을 단색과 원색밖에 사용할 줄 모르는 나에겐 복도에 걸린 그 여학생의 바다 그림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선사했다. 그동안 기고만장해서 내가 최고라며 부추겼던 자만심은 나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달아났다. 그림은 스케치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더이상 내가 그림의 일인자가 아님을 자인했고 의기소침해졌다. 그리고 이후로 나는 나의 그림을 자랑하지도 공개하지도 않았다.
내가 미술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새학년이 시작되고 봄날이 무르익어가던 방과 후의 어느날, 나는 미술실 청소 당번이 되어서 짝과 함께 교실 반칸짜리 미술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청소를 다 끝내고 나니 미술 선생님께서 나에게 미술부에 들어올 생각이 없냐고 물으셨다. 나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마치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이 감격에 겨워 연신 고개를 심하게 끄덕이며 격한 긍정의 신호를 보냈다. 미술선생님이 열심히 청소한 나에게 보답으로 하사하신 선물을 받은 것만 같았다. 그날의 그 흥분과 긴장된 순간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미술부 선배들 대여섯 명이 나란히 나무 이젤과 마주 앉아서 정물화를 그리고 있었고 벽의 빨래줄에는 여러 장의 수채화들이 걸려 있었다. 선생님은 지금 당장 선배들이 그리고 있는 정물을 그려보라고 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처음으로 이젤 위에 올려진 4절 도화지에 연필을 갖다대었다. 정물은 화병과 십자형 석고, 과일들과 유리병 등이 있었다. 그 중에 십자형 사각기둥 석고는 스케치를 하기엔 고난위도에 속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로보트 태권브이를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었던 나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식적으로 구도를 배우지 않았지만 나는 정확한 비례와 안정된 구도로 정물 스케치를 순식간에 완성했다.
2.
나의 특기는 스케치를 잘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누구보다도 빨리 그리는 능력이 탁월했다. 내가 봐도 내 스케치는 흠 잡을 때 없이 완벽했다. 오히려 선배들이 그린 스케치보다 월등히 나았다. 선생님은 내 그림을 보고 흡족해 하며 물감도 칠해보라고 했다. 나는 옆에 선배들이 그리는 방법을 눈으로 대충 익혀서 물감을 섞어서 칠해 보았다. 이제는 더이상 국민학교 시절처럼 단색을 사용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의도와는 달리 내 그림은 점점 더 미궁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두워지고 탁해지더니 나중에는 정물들이 모두 시궁창에서 갓 빠져나온듯 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그 자랑스럽던 스케치 실력은 물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충격으로 당황한 나에게 선생님은 색칠은 금방 배울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해 주었고 내일부터 방과 후엔 무조건 미술실에 오라고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미술 선생님은 여선생님이었다. 시골 중학교에 내가 입학 하던 해에 첫발령으로 부임해 오신 것이다. 차분하고 편안한 인상처럼 성격도 그러했다. 조소를 전공하신 것 같았고 예쁘다기보다는 그 예쁨을 훨씬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처녀선생님이셨다. 시골의 뭇 총각선생님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미술 선생님을 염모해서 나에게까지 잘 보이려고 하던 총각 선생님들도 있었다.
나는 다음 날부터 물 만난 고기 마냥 미술실에서 살다시피했다. 해가 지고 컴컴해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도 학교 정문 앞에 있는 자취방으로 굳이 일찍 퇴근하려 들지 않았다. 2층에 있던 미술실 창밖으로 짙은 어둠이 내리고 뒤이어 황색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진 마을을 이따금씩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던 그 순간은 지금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남아 있다. 주말과 휴일에도 미술부원들은 대부분 학교에 나와서 그림을 그렸다. 딱히 강제성이 있지는 않았다. 선생님도 고향이 멀어서 갈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미술실에서 우리들의 그림을 봐주고 찰흙으로 인물상을 만들기도 했다. 미술부원들은 모두들 경쟁하듯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4반까지 있었던 1학년에서 미술부원이 된 학생은 나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모두 선배들이었다. 미술 선생님이 특별히 나의 재능을 보고 뽑은 건지 아니면 미술부 청소 당번을 우연히 발탁하게 된 건지 지금도 모를 일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는 모두 화구를 챙겨서 버스를 타고 유원지에 가서 수양버들이 늘어진 강기슭에 앉아 그림을 그렸고, 선생님의 자취방에서 요리한 카레밥을 먹기도 했다. 우리 미술부원은 모두 한가족 같았고 아름다운 선생님과 함께 열정적으로 그림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가을이 왔을 때 나는 국민학교 2학년 국군의날 이후로 5년만에 공식적인 미술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미술부원 모두가 그 대회에 참가했다. 나는 길바닥에 앉아서 유원지의 풍경을 그렸다. 아직까지 나는 수채화 물감을 자유롭게 다루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나는 이 그림 대회에서 준특선을 받았다. 은상을 받은 선배가 한 명이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상을 받지 못했다.
이듬해 봄에는 춘계 사생대회가 열렸다. 그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선생님은 늦게까지 우리를 지도해 주셨다.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괜찮은 구도를 찾아서 스케치를 하고 미술실에 돌아와 채색을 했다. 나의 채색은 늘 만족스럽지 못했다. 물감을 듬뿍 발라서 과감하게 터치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술실에서 처음으로 채색을 망친 날의 충격은 오래도록 나를 따라다녔고 나는 그때까지도 물감 앞에서는 겁을 먹고 소심해져 있었다. 그 소심함은 채색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아무리 밝게 그려도 전체적으로 음울한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00군에서는 일년에 봄, 가을 두 번의 사생대회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춘계 백일장 및 사생대회가 가을보다 더 권위있는, 지금으로 보자면 군 단위에서는 메이저 대회라고 할 수 있었다. 군에 있는 9개의 중학교의 내로라하는 그림쟁이들이 실력을 겨누는 대회였다. 학년별 대회가 아닌 중등부, 고등부로 나누어서 시상을 했기에 2학년이 상을 받기엔 어려운 대회였다. 나에겐 참가 자체가 목적이었고 경험을 쌓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나는 대회 장소인 정자가 있는 솔숲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여러 가지 풍경들을 조합하여 스케치를 해나갔다. 입상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었기에 나는 마음 편히 평소 그리던대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채색은 평소보다 오히려 더 못했다. 아무래도 미술실 안에서 색칠을 하는 것보다는 밖에서 하는 것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나마 있던 제 기량을 십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역시나 내 그림은 평소보다 더 음울하고 침침해져 있어서 쓸쓸한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그림 마감 시간이 끝나고 군민회관에서 바로 시상식이 열렸다. 그러나 시상식은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 시작되지 못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시상식이 시작되었고 소란스러웠던 장내는 긴장된 침묵으로 잠잠해졌다. 입선부터 시작해서 입상자 명단이 호명되기 시작했다. 입선, 특선, 동상, 은상, 금상, 최우수상이 차례대로 수여되었지만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나는 전혀 입상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미련도 없었기에 동상 이후에 호명되는 이름들은 아예 듣지도 않았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대상 발표를 남기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이름이 호명되었다. 00중학교 2학년 000. 장내는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선생님이 나를 일으켜 세워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듣지 못했는데 내 이름이 불려졌다는 것이다. 나는 설마 그럴리가 없다며 앞으로 나가지 않으려 버팅겼다. 다시 한 번 우리 중학교와 내 이름이 불렸다. 나는 그제서야 높다란 무대 위에 얼떨결에 올라갔다. 온몸이 떨리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고급진 케이스의 상장과 부상으로 상금 5만원이 주어졌다. 그당시에 5만원의 상금은 학생 대회에서는 아주 파격적인 높은 금액이었다.
나는 일약 우리 학교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림을 배운지 겨우 1년밖에 안 된 내가 읍내에 있는 예고 입학 예정자들이 즐비한 중학교 3학년생들을 모두 제치고 1등을 한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심사위원들은 내 그림이 학원에서 숙달된 그림이 아니라 독특한 개성을 풍기고 있어서 예고에 입학 예정인 여중생과 내 그림을 두고 어느 그림이 대상에 적합한지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고 결론이 쉽사리 나지 않아서 시상식이 지연되었다고 했다. 결국 심사위원들은 내 그림에 손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후에 나는 미술 선생님의 수제자로, 촉망받는 미술 천재로 화려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왔고 선생님과의 약간의 오해와 갈등과 약간의 반항심으로 미술실에 더이상 가지 않게 되었다. 정말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미술 선생님이 나를 좀더 잡아주길, 반항하는 나를 좀더 참고 기다려주길 바랬는데... 나는 결국 그림을 다시는 그리지 못했다. 나를 수제자라며 늘 대놓고 자랑하고 다니셨던 선생님….내가 미술대학에 갈 때까지 학교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던 선생님께서는 이런 나에게 큰 실망을 했고 결국 내가 3학년이 되던 해에 우리 학교를 떠나셨다. 그리고 나는 그림에서 영영 손을 떼고 말았다. 선생님….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ㅠㅠ
3.
지금도 나는 이따금씩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리던 그 행복했던 시절이 꿈속에 나오곤 한다. 직장을 다니면서 취미로 다시 붓을 잡은 적이 있었지만 그때 만큼의 열정은 다시 내게로 오지 않았고 이내 그림과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는 건 지금도 너무 좋아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언젠가 다시 붓을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책에 나오는 야수파의 앙리 루소를 보니 내가 그림 그리던 시절이 떠올랐다.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그는 기능이 부족했지만 그로인해 오히려 그만의 독특하고 순수한 화풍을 완성할 수 있었고 피카소로부터 찬사를 받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그렸던 그림이 순수함과 독특한 개성으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 내 자랑은 그만하고...
이 책을 통해 현대 미술에 대한 거부감을 완전히 떨쳐버리진 못했지만 현대 미술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구글을 통해서 그림을 검색해 가면서 읽으니 훨씬 더 이야기가 풍부해지면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제부터 나는 현대 미술과 마주하게 되면 빠르게 지나치지 않고 이전보다는 작품 앞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게 다 이 책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