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무라카미 하루키/홍은주/문학동
소머리곰탕을 오랜만에 먹게 되면 처음에는 정말 맛나게 먹는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뭔가 좀 지친다는 느낌이 든다. 그 좋던 맛이 어느새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그릇을 다 비우고나면 잘 먹었다는 생각보다 당분간은 소머리곰탕을 먹을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앞선다.
홍어도 마찬가지다. 술 안주로 나온 홍어를 삼합으로 처음 먹을 때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것도 막판으로 가게 되면 그 좋았던 맛이 서서히 암모니아의 역겨움으로 변모한다. 홍어집을 나설 때면 당분간이 아니라 앞으로 큰 이변이 없는 한 절대 내 발로 홍어집 근처에 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입안에서 홍어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가 며칠동안 떠나지 않을 때는 나라는 존재의 비루함에 진저리를 친다.
하지만 이런 나의 결기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 말끔히 지워지고, 좋았던 맛의 기억만이 슬그머니 되살아나 다시 나의 미각을 자극한다. 결국 나는 머지않아 다시 그곳을 찾게 된다.
나는 하루키의 왕팬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장편소설은 모두 다 읽은 듯하다. 장편 이외에 수필이라든가 단편집도 꽤 읽었다. 팬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코 적지 않은 한 작가의 책을 대부분 읽었다는 것은 찐팬이 아니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왜 한사코 그의 팬이 되기를 주저하는가. 그건 내가 하루키의 장편소설을 읽을 때마다 곰탕이나 홍어를 먹는 것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루키의 소설은 시작부터 부담이 없다. 첫장을 펼치면 나는 마치 나만의 안식처를 찾아온 듯해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고 깔끔하며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없어서 읽어내기가 쉽다. 본격적인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들기 전에 감내해야 하는 분위기 파악이나 적응시간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나는 준비운동도 없이 바로 하루키의 세계로 풍덩 빠져든다. 나는 운동을 할 때 그다지 준비운동을 하지 않는 편이어서 나랑 코드가 딱 맞다.
지금껏 내가 읽었던 하루키의 책에는 공통된 성향을 가진 비슷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 대부분은 내가 바라 마지않던 이상향의 남자들이며 그들에게는 그에 걸맞는 적합한 생활환경이 주어진다. 예를 들면 주인공은 낯선 익명의 도시에서 혼자 살고 있으며 매일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한다. 그의 집은 항상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식사를 할 때는 능숙한 솜씨로 직접 요리를 한다. 재즈와 클래식 음악을 즐기며 잠들기 전에는 싱글몰트를 취하지 않을 정도로 마신다. (이 책에서는 이런 류의 남자가 고요한 산골 마을에 도서관 관장으로 등장한다)
그의 일상에는 소소하게 작은 일들이(여자관계) 일어나지만 그의 규칙적인 일상과 반복적인 생활 패턴에 크게 영향을 주진 않는다. 여기까지는 참으로 좋다. 나는 이 주인공의 고요한 일상이 깨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언제까지고 좋다. 500페이지가 넘고, 1000페이지가 되어도 나는 이 단순한 이야기를 지루해하지 않고 끝까지 행복하게 읽어나갈 자신이 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하지만 나의 바람은 여지없이 깨지기 시작한다. 그 시작점은 소머리곰탕과 홍어를 3분의 1정도 먹었을 때와 비슷하다. 이 지점부터 비현실적인 내용들이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끼어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반에 들어서면 비현실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대놓고 현실을 누비고 다닌다. 조심성도 없고, 양심도 없으며 뻔뻔스럽기 이를 때 없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키의 소설이 문학소설인지 장르소설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에 어안이 벙벙하지만 그의 구라는 비현실을 현실로 착각하게끔 철저하고도 집요하다. 1Q84을 읽을 때 나는 혹시나 싶어 달이 두 개가 아닐까 대낮에도 하늘을 쳐다보곤 했었다.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흥미롭긴 하지만 싫증이 나기 쉬운 법이다. 이야기가 후반부에 이르게 되면 결국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때론 장대하게 펼쳐놓은 이야기가 수습이 잘 안 될 때도 있다. 인내심을 발휘하여 마지막 책장을 덮고나면 나는 앞으로 오랫동안 하루키 소설을 읽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의 간결하고 꼼꼼한 문장도 지겹다못해 진절머리가 날 지경에 이른다. 마치 온몸에 암모니아 냄새를 풍기며 홍어집을 나설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는 다시 그의 깔끔한 글과 기묘한 세계가 그리워진다. 그리고 신간이 나오면 어김없이 그의 책을 다시 찾는다. 마치 홍어나 소머리국밥처럼..
하루키의 책을 읽을 때 초기에는 이런 증상이 심했지만 근래에는 비교적으로 비현실적인 내용에 대한 거부감이 덜해졌다. 후반부에서도 지겨워하거나 지치지 않으며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잘 읽어낸다. 마지막장을 넘기고 책을 덮으면 그의 세계와 헤어지는 것에 대해 진한 아쉬움마저 남는다. 이렇게 달라진 이유는 이제 내가 하루키의 스타일에 익숙해진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하루키가 비현실을 다루는 솜씨가 훨씬 더 노련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하루키가 작가 초년생 시절에 중편으로 쓴 이야기를 40년이 지나서 다시 쓴 것이라고 한다. 중간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장편소설로 보완을 했는데 그래도 뭔가 좀 아쉬운 부분이 있었던 듯하다. 어떤 한 주제를 가지고 세번씩이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하루키의 완벽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나는 얼마 전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어서 이야기에 나오는 벽 안의 도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벽 안 도시 부분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거나 지겨울수도 있는데 나는 이미 그 도시에 오랫동안 살다온거나 다름이 없어서 독서가 한결 수월하고 느긋했다.
분량이 768페이지에 육박하는 두꺼운 책이다. 나는 목욕재계를 하고 금욕생활을 하며 하루에 200페이지씩 읽어나갔다. 좀더 꼼꼼하게 읽기 위해 1장이 끝날 때마다 줄거리를 공책에 요약을 했으며 마음에 드는 문장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필사를 했다. 그 어떤 책보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읽었다. 읽는 내내 나의 그림자가 잘 붙어있는지 확인도 하면서 이야기에 동화되어 갔다.
하지만 굳이 이책의 내용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하고 싶지는 않다. 하루키가 구축한 세계에 흠뻑 빠져있었던 시간이 좋았고, 영화나 드라마로 대체할 수 없는 문자로 쓰여진 소설만의 매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쯤해서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부인한다해도 나는 이미 하루키의 찐팬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그리고 그가 건강하게 살아서 오랫동안 글을 써주기를 바랄 뿐이다.
책을 덮고나서 나의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다. 갓 구워낸 블루베리 머핀인가 뭐시긴가 하는 것이다. 그 머핀에다가 싱글몰트를 스트레이트로 한잔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