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달빛책방

<달콤한 노래/레일라 슬리마니/방미경/arte>

by 오달빛

<달콤한 노래/레일라 슬리마니/방미경/arte>

책의 앞부분을 읽다가 식겁하고 덮어버렸다. 이번에는 책을 완전히 잘못 고른 것 같았다. 어디서 읽은 적이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독서 목록을 찾아보니 다행히 내가 읽은 책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기시감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거북했지만 첫 장부터 다시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연유를 추적해 보았다. 곧이어 그 비슷한 류의 소설을 기억해내고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냈다. 이 소설의 앞부분이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단편의 분위기와 중첩되어 마치 내가 읽은 소설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내용과 장르가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은 분위기만으로도 마치 내가 읽은 소설로 둔갑을 시켰버렸다. 어쩌면 위험하고 거북한 소설에 대한 본능적인 자기 방어기제가 발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키지 않는 장르지만 어쨌든 읽어야 했다. 그런데 충격적인 첫 장면이 지나고 나니 그 공포와 충격이 오히려 동력이 되어 마치 자동차 크루즈 모드로 주행을 하듯이 나를 이야기 속으로 친절히 모시고 갔다.(아주 잘 읽힌다.)

공포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씩 내 몸의 무뎌진 감각세포들을 일깨우고 싶을 땐 공포 영화를 보곤 한다. 내가 싫어하는 공포 영화는 사람을 깜짝 놀래키는 자극적인 일회성 공포가 남발되는 영화이다. 이런 류는 깜짝 놀라기는 하지만 이후엔 욕과 짜증이 확 치밀어오른다. 이런 공포는 진짜 공포가 아니다. 값싸고 수준 낮은 깜짝쇼에 불과하다. 진짜 무서운 공포는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은근히 스며든다. 공포의 여운도 금방 사그라들지 않는다. 꿈자리마저 따라와서 뒤숭숭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소설은 후자에 가깝다. 자극적인 공포가 아니며 긴장감으로 서서히 심장을 조여온다. 인간 내면에 잠재된 어두운 감정들이 너도나도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더이상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파국적인 결말을 드러내고 시작한다. 보모가 자신이 맡아서 돌보던 두 아이를 칼로 찔러 죽였다. 한 아이는 이미 죽었고 또 다른 아이는 구급차 안에서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죽어간다. 이 첫 페이지를 읽는다면 많은 이들이 나처럼 책을 덮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콩쿠르상에 빛나는 이런 걸작은 힘들어도 참고 다시 펼쳐 들어야 한다. 충격적인 프롤로그가 끝나면 이야기는 파국 이전의 과거로 돌아간다. 결말을 미리 알고 읽는다는 것은 자칫 싱거울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은 마치 답지를 미리 보고 시험 문제를 푸는 듯하다. 그래서 인물의 세세한 행동이나 감정에 대한 이해와 몰입이 아주 잘 된다.


루이즈의 깊고 어두운 구멍 같은 고독이 무서웠다. 끝날 것 같지 않는 하루의 오후 4시, 자신이 아무 데도 소용되지 않는 것에 대한 무기력감의 냄새를 맡고 어김없이 찾아오던 거대한 고독은 방황하던 젊은 시절에 나와도 몇 번씩 조우한 적이 있었다. 썩은 가는 수초들로 무성한 수족관 같은 그녀의 원룸은 마치 그 시절 나의 자취방을 보는 듯했다. 그래서 그녀의 고독이 더 무서웠다.

그러나 '나는 자연인이다' 애청자로서 고독과 고립을 선망하며 간간히 솔캠으로 고독한 척하려는 지금의 나를 루이즈가 본다면 나에게도 이렇게 말 할 것이다.

"이리와, 목욕할거야" 그리고 그녀의 칼은 나를 향해 돌진해올 것이다. 에궁 무서버라...


이 책은 지난 번에 읽었던 '잔혹함에 대하여(악에 대한 성찰)'라는 책과도 공교롭게 연결이 된다. 그 책이 역설했던, 악을 이해하고 그 실체를 파악하고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작가가 소설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끔찍한 악행에도 불구하고 보모인 루이즈가 파국적인 결말 속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과정들을 보게되면 그녀의 감정에 일정 부분 공감이 되기도 했고 연민과 동정 또한 떨쳐낼 수가 없었다.


참혹한 결말에 대한 원인은 그녀가 과거에 앓았던 우울증과 고독,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일을 그만 둬야하는 보모라는 직업의 특수성, 미리암 폴부부의 변심 등…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루이즈의 자존감의 부재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애초부터 그녀는 자신보다는 남의 행복이 더 중요했다. 주인집의 행복을 위해서 온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자신이 일구어낸 주인 가정의 행복이 자신의 존재 가치이자 행복이었다. 오직 그녀의 존재는 보모이자 가정부로서 역할에 비굴하리만치 충실할 때만 드러날 뿐이었다. 정작 그녀의 딸과 본인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의 절망적 고독과 우울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유일한 희망은 주인으로부터 듣는 따뜻한 인정과 배려였고,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프랑스의 계급적 특권 의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동정과 연민은 할지언정 그녀를 결코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진보적이며 배려심 있는 미리암과 폴 부부마저도 그 차별과 선입견의 장벽을 넘어서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행복을 전적으로 남에게 맡겨버린 덕분에 그들에게 외면당한 루이즈는 결국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게 되었다.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인 쌤통심리와 남들에게 인정 받으려는 인정욕구는 둘다 자신의 행복 주도권을 남에게 넘겨주는 어리석은 심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남보다는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이지만 자신을 사랑해야만 남을 사랑할 수 있고 행복의 주도권도 당당히 내가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비난과 더불어 달콤한 칭찬의 말에도 너무 휘둘리지 말자. 그 칭찬이 결국엔 나를 길들이는 사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잘 알면서 너는 왜 그리 사냐고? 내말이….

아..정말이지 남 눈치 안보고,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남 신경 안 쓰면서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지금도 충분히 그렇게 살고 있지 않냐고? 천만에 콩떡.) 횡설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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