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달빛책방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2부>

by 오달빛

2.

내가 사는 면소재지의 작은 시골 동네에는 교회가 두 개 있었다. 감리교회와 침례교회였다. 감리교회에 가면 감주를 주고 침례교회에 가면 침을 맞는다는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 떠돌았기 때문에 내가 감리교회를 선택한 건 아니었다. 집에서 좀더 가까운 교회에 다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때때로 우리집이 침례교회와 인접하지 않은 것에 대해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했었던가. 침례교회는 건물도 흰색이어서 나에겐 교회가 아니라 무서운 보건소로 보였다.

말장난 같은 소문이 영향력을 발휘한 것인지 실제로 감리교회에는 아이들과 학생들이 많이 다녔고 침례교회에는 어른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내가 다니는 교회는 이웃교회보다 더 가난했다. 그 차이는 종소리에서도 알 수 있었다. 침례교회에서는 최신식 차임벨 소리가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서 흘러나왔고 감리교는 종탑에 묶어둔 줄을 당겨서 쇠방망로 부딪쳐서 소리를 내는 수동식 무쇠종이었다. 교회 종소리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보다는 번거롭긴 해도 무쇠 종소리가 훨씬 듣기 좋았다. 쇠에서 울리는 종소리의 여운은 잔잔한 물결처럼 온마을에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내가 언제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건지는 나도 잘 모른다. 어렴풋하게 누나들의 등에 업혀서 교회에 간 기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다니기 시작한 것 같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어린이 주일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은하철도 999가 끝나고나면 어김없이 시간에 맞추어 예배당으로 향했다.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열리는 여름성경학교는 지상에서 내가 경험하는 천국 그 이상이었다. 성경학교에서는 도시에서 봉사하러 온 이들도 있었고 고등부 학생들이 성경학교의 선생님이 되기도 했다. 다양한 노래와 율동을 배우고, 그림 그리기와 만들기를 하고, 짧은 연극을 통해 교훈적인 성경 이야기를 재현하기도 했다. 물론 맛있는 과자와 여러 가지 상품들이 많았기에 나는 그 기간 만큼은 평소보다 더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성경학교가 끝나고나면 행복했던 순간들에 대한 상실감으로 나는 한동안 가슴앓이를 하며 인생의 허무와 공허함을 쓰라리게 느끼곤 했다. 우리 교회의 여름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이웃교회의 여름성경학교가 시작되었다. 많은 아이들이 성경학교 만큼은 종교의 분파에 얽매이지 않고 행사 때마다 이교회 저교회를 자유롭게 왕래했다. 아무래도 재정적으로 형편이 나은 침례교회가 과자를 더 많이 준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나는 침례교회에는 단 한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무의식 속에 각인된 침에 대한 공포감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 교회에 대한 의리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드디어 그렇게 갈망해왔던 대예배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주일학교 교사가 아닌 목사님의 설교를 주일마다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이후 주일 대예배, 밤예배, 수요예배와 학생회를 가릴 것 없이 한번이라도 빠지면 안된다는 강박의식을 가지고 꼬박꼬박 참석했다. 시험 전날에는 벼락치기를 하느라 시간에 쫓기면서도 밤예배 시간에는 어김없이 참석율이 저조한 썰렁한 예배당에 앉아 있었다. 예배 출석에 대한 나의 집착은 일요일에 있었던 누나의 결혼식날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예배를 통째로 빠질 수 없다며 가족들의 만류에도 교회에 나갔고 예배 시간 중간에 빠져나와서 결혼식 가족 사진을 촬영하는 시간에야 겨우 식장에 도착하는 일도 있었다.

부활절이나 감사절 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땐 평소에 모아둔, 나에게는 제법 큰 돈을 봉투에 넣어서 헌금으로 냈다. 헌금내는 시간이 끝나면 목사님께서는 헌금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그들을 축복해 달라는 기도로 이어졌다. 나는 헌금기도 시간에 내 이름이 불려지는게 불편해서 언제나 봉투에는 이름을 적지 않았다. 목사님의 입을 통해 내가 헌금한 사실이 여러 성도들에게 알려지는 것보다는 신께서 알아주시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예배 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주기도문을 마치면 목사님은 언제나 문앞을 미리 지키고 서서 교회에 나온 성도들에게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목사님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언제나 주기도문을 따발총처럼 외운 후 목사님이 문앞에 당도하기 전에 쏜살같이 교회를 빠져나갔다. 어느날은 평소처럼 기도문을 2배속으로 외우고 재빨리 예배당을 나가려고 했는데 목사님이 나보다 먼저 나와서 문앞을 가로 막고 기다리고 계신 것이 아닌가. 나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일찍 나온 것이었다. 이후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주기도문을 따발총처럼 외우는 방식을 접어야 했다.


여름이 되면 마을에서 조금 먼 유원지의 강변에서, 군단위 감리교 연합회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부흥회에 열심히 참석했다.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가 밤낮으로 이어졌고 나는 그 기간 만큼은 은혜와 감사로 넘쳐나서 황홀경에 도취되어 있었다. 어느 해 여름 부흥회에서는 교회 형과 텐트를 치고 그곳에서 자며 밤낮으로 이어지는 부흥회에 참석했다. 잠자리는 텐트로 해결이 되었지만 끼니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라는 믿음으로 옥수수 몇 개로 사흘을 연명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허기가 와서 도저히 움직일 수조차 없이 기진맥진하여 더운 텐트 속에 누워 있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신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은 될지언정 굶주린 육신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흥회는 마치 무당굿과 비슷한 형식이 많았던 것 같다. ''불길 같은 성신여'류의 찬송가는 부흥회에 잘 어울리는 단골 메뉴였다. 큰북을 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춰서 사람들은 이 노래를 계속 반복해서 불렀다. 노래가 반복될 때마다 북쟁이의 장단은 점점 더 빨라지고 사람들의 몸은 그 장단에 맞춰서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한다. 이때는 같은 노래를 계속 반복해서 불러도 지겨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북장단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면 사람들은 무아지경에 이르게 된다. 눈을 감고 두손을 번쩍 들고 노래를 부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고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일어서서 펄쩍펄쩍 뛰면서 노래를 부르는 이도 있다. 어떤 이는 노래를 부르다가 혼절하기도 한다. 목사님은 이것이 바로 성령이 강림하신 증거이자 역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의연한 자세와 목소리를 계속해서 유지했다. 물론 충만한 은혜로 흥분이 최고조에 달했지만 내 자세와 목소리까지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떤 부흥회에서는 머리숱이 헐빈한 한 목사님이 자신이 기도할 때 팔을 휘저으니 수천명의 신도들이 앉은 상태로 뒤로 넘어갔다는 간증을 하기도 했다. 마치 시인 김수영의 '풀'처럼 일제히 누웠다는 것이다. 나는 내심 우리 부흥회에서도 그 목사님께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싶었다. 목사님은 여러 번 팔을 크게 휘두르며 사람들이 풀처럼 넘어가는 기적을 시도했지만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허리가 아파서 좀 눕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목사님의 팔에서 나오는 약간의 파장만 느껴져도 드러누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끝내 그 어떤 이상기류도 감지하지 못했다.

사나흘간 이어진 부흥회가 모두 끝나고나면 자신들의 교회로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그 감흥의 여운을 간직한 채 평소보다 더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더 열심히 기도를 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우리 학생부에서는 부흥회를 다녀온 후 방언의 은사를 입었다는 누나들이 꽤 있었다. 그 방언이 학생부 예배 기도 시간에 나오기도 했는데 어떤 한 누나가 이 방언을 시작하면 전염성이 있는 것처럼 다른 누나들에게 전파되어 예배당은 온통 방언 기도로 압도되곤 했다. 그러나 나에겐 아무리 방언이 신과 소통하는 언어이자 은사라고 해도 그 누나들의 입에서 나오는 기괴한 소리를 듣는 건 여간 고역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남사스럽다고 해야 하나?? 암튼 그녀들의 방언은 나의 기도에도 집중할 수 없게 만들었다.(은사를 입어도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유명한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해도 방언의 은사는 오지 않았다. 나의 기도는 언제나 묵도였고 그 방식에 나는 언제나 만족했다.


3.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2년 동안 교회학생부의 회장을 맡게 되었다. 학생부 예배를 하기 전에는 항상 자전거를 타고 산골에서 온 여학생들의 자취방을 돌며 교회에 나오라는 당부를 하고 다녔다. 평소에는 여학생과는 일체 말을 섞지 않았고 길에서 만나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기에 급급했던 나였지만 이 일은 우리 교회의 회장들이 전통적으로 해온 중요한 역할이었기에 나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했다. 자취하는 여학생들의 출석율은 내가 자전거를 타고 돌았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에 차이가 났다.


학생부에서의 가장 큰 행사는 '문학의 밤'이었다. 문학의 밤은 내가 누나 등에 업혀서 교회에 다니기 전부터 내려온 오랜 전통의 학생부 자치 행사였다. 시낭송, 합창, 중창, 콩트, 연극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들로 구성된 이 밤은 종교라는 울타리를 넘어선, 시골 청소년들의 건전한 문화의 보고이자 축제였다. 이날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많은 학생들이 구경을 왔고 다른 지역의 감리교 학생부에서도 방문을 했다. 예배당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만원이었다. 이 행사를 위해 학생부원들은 한 달 이전부터 매일 밤 교회에 모여 기획을 하고 연습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가 어떻게 그 일을 해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내가 2년 동안 해오던 회장에서 물러나면서 그 행사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문화적으로 척박한 시골 동네에서는 오래전부터 교회라는 공간이 학생들에게 문화와 문명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으나 차츰 오락실, 영화관 등을 비롯한 놀이 문화가 많이 생겨나면서 시골 인구의 감소와 더불어 교회에 나오는 학생들의 수도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가 졸업을 한 이후에는 학생부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교회에 다니면서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추억은 단연 성탄절이었다. 성탄 전날에는 이웃교회의 스피커에서 하루종일 크리스마스 캐롤이 온 마을에 울려퍼졌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캐롤송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 내가 특히 좋아했던 캐롤은 '북치는 소년'이었다. 왠지 이 노래의 잔잔한 슬픔과 경건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주일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성탄전야 교회 무대에서 노래와 율동공연을 하기도 했다. 산타할배가 많은 선물을 가지고 눈 내리는 산길을 넘어서 온다는 내용의 노래에 맞춰서 율동을 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 나는 산타의 존재를 믿고 있었기에 성탄 전날 밤에는 머리맡 문고리에 양말을 걸어두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면 양말은 전날 밤에 내가 걸어둔 상태 그대로였고 양말 안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긴가민가했지만 나는 산타에게 선물을 받을만큼 그렇게 착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기에 실망하지는 않았다. 대신 성탄예배에 나가면 착하지 않은 아이도 차별없이 여러 가지 과자가 든 봉투를 선물로 받았기에 이보다 더 나를 기쁘게 하는 성탄 선물은 없었다.

교회학생부가 되면서 성탄시즌이 다가오면 나는 교회 형과 함께 먼산까지 가서 크리스마스 트리에 쓸 전나무를 베어왔다. 큼지막한 나무를 예배당 한켠에 세우고 트리전구의 불량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장식을 했고 교회 종탑에 올라가서 트리용 전구를 부채살 모양으로 내렸다. 다채로운 불빛들의 향연이 본격적인 성탄시즌의 시작을 알리면 그 기간 동안 나는 내내 행복한 설레임으로 들뜬 상태가 지속되었다.

학생부에서는 성탄전야 예배가 끝나고나면 교회에 남아서 석유난로를 가운데 두고 동그랗게 둘러앉아 선물 교환식을 가졌다. 각자가 가지고 온 선물을 모아두고 추첨을 통해서 받아가는 방식이었다. 내가 가지고 온 선물에 비해 받은 선물이 초라해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선물은 선물이라는 그 자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선물 교환식이 끝나고 나면 여러 가지 게임을 하기도 했고 이야기 꽃을 피우며 밤이 더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이 되면 교회 어른들이 마련한 소고기국밥을 야식으로 먹었다. 그리고나면 내가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동경하고 고대해 마지 않았던 새벽송을 나갈 채비를 했다. 조편성이 끝나고 주의사항을 숙지한 후 2시를 넘어서면 우리는 각자의 구역으로 조용히 길을 나섰다.


성탄절 새벽송은 작은 마을의 두 교회 모두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해온 성탄 의식이었다. 깜깜한 새벽에 교회 학생들은 무리를 지어 마을의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찬송가를 부르고 새해의 복을 기원하는 인삿말을 전했다. 그리고나면 그 집에서는 신문지에 포장한 과자 두어 봉지를 감사의 뜻으로 건네고 학생들은 이를 자루에 담았다. 이날 만큼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대부분의 집들도 과자를 준비해서 새벽송 무리들을 맞이했다. 우리 집도 부모님이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마을의 두 교회를 위해 매년 과자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어린 시절 추운 겨울밤, 조심스런 발자국들의 소리가 멀리서 들리기 시작하고 이들의 노래가 점점 더 우리집을 향해 다가올 때면 나는 긴장과 흥분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드디어 그들의 발걸음이 우리집 앞에 멈춰지고 겨울밤의 정적을 깨우는 경건하면서도 웅장한 목소리들의 합창이 시작되면 나는 엄마와 함께 마루로 나가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견뎌내며 그들의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과자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곧이어 이웃의 침례교회가 오면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마을의 모든 집들을 빠짐없이 돌고나면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임무를 마친 학생들은 교회로 돌아와 자루에 든 과자들을 모두 뜯어서 펼쳐둔 신문지에 쏟아부었고, 곧 있을 주일학교 예배에 올 아이들에게 줄 다양한 과자들을 봉투에 골고루 담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봉투에 든 다양한 모듬과자가 바로 내가 어린시절 산타에게는 받을 수 없었던 선물에 대한 훌륭한 보상이 되어주었던 바로 그 성탄선물이었다.


고3이 되면서 나는 학생부 회장을 후배에게 물려주고 좀더 공부에 관심을 가져야 했다. 뒤늦게 시작했기에 공부해야 할 양은 어마어마했고 물리적인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이 불안감과 절망감을 극복하기 위해 더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기도를 했다. 그 해에 내가 세운 목표 중 하나는 매일 교회에 나가서 나만의 기도 시간을 갖는 것이었다. 집에서 저녁을 먹고 야간학습이 시작되기 전에 나는 매일 교회에 들렀다. 기도는 학생부 단상 뒤에 앉아서 했다. 두꺼운 방석이 깔려 있었고 다른이가 와도 잘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기도를 하게 되면 금새 나의 깊숙한 내면에 숨어있던 자아가 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는지에 대한 여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고요한 그 침묵의 기도 시간은 나에게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명상과도 같았다.

1년 동안 나는 딱 한번을 제외하고는 그 기도 시간을 빼먹지 않았다. 그 한번은 목사님의 사택에 손님들이 많이 찾아온 날이었다. 나의 기도는 언제나 은밀하게 이루어졌기에 목사님을 비롯해서 아무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날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교회 앞마당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 무슨 일이야?라고 목사님이 물어보면, 네.. 기도 좀 하러 왔습니다. 예배당에 은촛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안심하셔도 됩니다.하하..

목사친구: 목사님 교회에는 저렇게 신실한 학생도 있군요..개부럽부럽.. 목사 : ㅎㅎ제 설교가 학생들에겐 제법 잘 먹힌답니다.. 이렇게 훈훈한 장면을 상상하며 당당하게 인사를 하고 들어가면 되었지만 결국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교회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주목을 받는다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고 있었다.


4.

대입학력고사가 다가올 무렵부터 나는 새벽 기도회에도 참석했다. 학교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 종소리에 맞춰 교회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 잠깐 눈을 붙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지치고 힘들 때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라는 노래는 언제나 나에게 가슴 뭉클한 위로와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다. 결국 나는 거의 공부머리가 아닌 처절한 신앙의 힘으로 대학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나중에 목사님께서는 내가 틀림없이 신학대학에 갈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다른 대학인걸 알고나서 놀라셨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대학을 가면서 정든 교회와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들로 신앙을 버리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접게 되었다. 여기서 그 이유들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나는 한때 방황하던 청소년기에 나를 오로지 신앙의 힘으로 다잡아준 시골 교회와 종교에 지금도 깊이 감사하고 있다.

지금의 나의 뇌는 이제 신앙을 가지려해도 가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예전의 뇌를 구입해서 교체가 가능하다면 모를까 지금 상태로 그 순수했던 기독교인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생물학적으로도 엄밀히 다르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온몸의 모든 세포들은 새로운 세포들로 완전히 교체가 되었다. 물리적으로 나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된 것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연결시켜 주는 유일한 단서는 단지 기억일 뿐이다. 소중했던 과거의 기억이 퇴색되기 전에 과거를 기억해내고 글로 쓴다는 것은 나에게는 혼란스러운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잃지 않게 하는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억하는 과거만이 현재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던 나는 신이 없는 세상을 홀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신께 의지하는 삶이 훨씬 안정적이며 삶의 만족도가 높다는 것은 나의 경험은 물론이고 주위의 신앙인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행복이 반복된 자기암시와 세뇌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행복이든 뭐든 상관없이 그들은 행복해 보이고 행복하다고 말하고 다닌다. 그러나 행복한 삶을 위해 지금 나에게 있지도 않는 신을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신이 없어 외롭고 고달픈 삶이지만 혼자서 살아내야 한다. 비록 절망이 전제된 삶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나만의 의미와 가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의미와 가치라는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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