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부모라도 자식의 모든 부분을 품을 수 없고, 연인이라도 상대의 모든 부분을 안을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적당한 거리를 지키며 끊임없이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게다가 복잡한 이해관계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공허한 관계가 대부분이다.
숭고한 사랑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관념이라 현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리면 우리의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보호자를 향한 반려동물의 사랑이다.
반려동물은 외양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물질적인 것들로 사람을 나누지 않는다.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 주고 부드러운 손길로 얼굴을 쓰다듬어 주는 것만으로도 세상 행복해하는 순수한 존재이다.
TV에서 그런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인적이 드문 곳에 홀로 살면서 여러 마리의 개를 거두어 기르는 사람들. 그들에게 왜 이러한 삶의 방식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 돌아오는 대답은 여지없이 비슷했다. 가까운 이들로부터 크게 상처를 받아 힘든 시간을 보냈고, 거리를 떠도는 개를 볼 때마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 구조를 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점점 개체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나도 녹록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기에 어렴풋이나마 그들의 상처와 도피에 공감할 수 있었다. 가까운 이들이 주는 상처는 오래도록 숨통을 조이고 서글픈 잔상을 남긴다. 어쩌면 그들은 개를 돌보는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그들이 꾸린 새로운 가족의 형태도 꽤 괜찮아 보였다.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삶에 정답은 없으므로 그들은 자신에게 적합한 삶의 형태를 찾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적정한 수를 유지하며 개를 키우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반려동물은 마음의 결핍을 치유하고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묵묵히 곁을 지키며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낸다.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절대적 믿음이 그들의 삶에 당위성을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나는 어릴 때부터 동물을 좋아했다. 포유류는 물론이고 곤충과 파충류도 좋아하는데, 특히 개를 가장 좋아한다.
나의 개는 10년을 살고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나는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몸을 움직이는 걸 싫어하고, 이것저것 챙기는 게 귀찮아 가방도 잘 들고 다니지 않는다. 이런 나태한 성향의 내가 반려동물의 보호자가 되면서 일상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개를 키우려면 부지런해야 되기 때문에 규칙적인 일과에 맞춰 생활해야 한다. 자유롭게 사용하던 개인 시간도 반려동물을 위해 기꺼이 내주어야 한다.
예전에 비해 신경 쓸 일이 몇 배로 늘어났지만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집에 개 한 마리 들어왔을 뿐인데 삭막한 집 안에 따스함이 감돌고 웃을 일이 많아졌다. 무감한 일상에 표정이 더해지고 정체된 삶에 원동력이 생겼다.
시간은 유한하고 모든 생명은 때가 되면 죽는다는 자연의 섭리 속에 나와 반려동물의 물리적 인연은 끝을 맺었다. 한 생명의 전 생애를 함께한다는 건 놀랍고도 경이로운 일이다. 나의 개가 떠나고 난 뒤,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고 그동안 참 쓸데없는 것들에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며 살았다는 자기 성찰을 했다. 삶의 남은 시간들은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고 정말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하면서 소중한 사람들에게 온 힘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삶은 이토록 순식간이고 시간과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으니까.
가끔씩 나 자신이 시시해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버티기가 힘들 때마다 나의 개를 떠올린다. 이런 나도 한때는 누군가의 전부였음을, 누군가가 생애 전부를 바쳐 사랑하고 지켜 내고자 했던 존재였음을 상기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사랑해 주었던 나의 개는 여전히 내 삶의 큰 버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