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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as Jun 10. 2023

노예의 존재함이란

니체 '상상의 복수를 통한 원한'에 대한

"교수님 니체가 말한 노예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래, 써."


"정말요?"


"그래."


"네!!"




그렇게 말씀을 잠깐 듣는 동안에는 뭐든지 당장 쓸 것 같았지만, 3~4시간의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신데렐라가 밤 12시만 되면 마법이 풀려 자신이 처한 현실의 척박한 삶을 마주해야 하는 것처럼, 나도 대학에 가면 늘 고귀한 무엇인가를 맛보는 진귀한 정신의 향을 맛보고 집에 가면 온갖 시궁창의 썩은 냄새가 배어있는 남편의 바하섞인 정신의 쓰레기장에 내 뒹굴리는 것 같아 나의 이상적 자아를 통합시키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정신이 점점 <지킬 앤 하이드>의 지킬 박사처럼 서서히 정서를 조율할 수 없던 순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리고 4년을 글을 못 썼다. 처음 대학원에 진학할 꿈의 목적은 어떤 단체의 평가, 검증을 통한 인정받기 위한 도전이었다. 그런데 진학 후 막상 진행 과정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평가라는 것이 지겨워지고 고등학교 학창 시절처럼 대입만을 위한 간판 따기 식의 게임판 위로 나를 올려놓는 것 같다 또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다시 그들의 평가 따위 필요 없잖아라는 분노 섞인 갈등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지금과는 다른 내가 되기 위해 시작한 도전이 허들 앞에서 두려워져 순간 멈춰버리는 건가? 계속해서 하염없이 작아졌다. 늘 처음 사는 하루하루 지만 지금까지 살아왔던 느낌과는 너무도 다른 감정들,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음을 정렬하기가 어려웠다. 집중됐던 마음이 또다시 일렁였다. 육아가 먼저냐, 내 욕망이 먼저냐, 남편과의 소통이 먼저냐. 정신을 새롭게 성찰하기 위해 스스로 대학에 왔는데 매 달, 매 학기 또 매 년마다 교수님께 달려가서는 '교수님, 전 아닌 것 같아요, 전 그냥 치유만 하면 되거든요. 논문은 못 쓸 것 같아요.' 또 어느 날은 '교수님, 그냥 석사까지만 하면 될 것 같아요. 제가 보니 저는 글을 해석하는 능력이 없는 것 같아요. 애초에 저는 인생을 돌아보고 치유하러 왔거든요, 박사는 아닌 것 같아요.'


난 계속해서 웅얼웅얼 징징징, 울어대는 네 살 난 아이마냥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면담을 목적으로 졸졸졸 엄마를 따라가듯 교수님 뒤를 따라다니며 감정을 달래주라는 어린 아이처럼 칭얼댔다. 수많은 욕구들이 오락가락했는데, 크게는 난 모르겠어, 선택하기 너무 어려워, 그냥 나 대신 선택해 주세요라는 내면의 요구 그리고 나 너무 힘드니, 어떻게 하면 논문을 빨리 쓸 수 있는지 더 자세히 알려주세요라는 갈망이었다. 그런데 왜 늘 밖으로 표출되는 소리들은 겉돌았는지 정제할 수가 없었다.


노예 도덕은 처음부터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한다 : 그리고 이러한 부정이야말로 노예 도덕의 창조적인 행위인 것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 하나의 논박서, 제1 논문, 10, 337p. 책세상, 2015.


니체의 주요 저서 중 하나 <도덕의 계보>에 나온 글귀다. 나에게 자아라는 것이 있었던가?라는 의문이 들정도로 부모 앞에서 당차게 자기 의견과 주장을 내세우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었던 나는 스스로 노예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스스로 난 달라. 난 그래도 좋은 사람이다라는 자긍심을 키워나가려 했고 또 사실로 강박적인 도덕적 견고함 때문에 스스로를 오히려 강제하며 억압했던 세월이 오래다. 이유는 뭐 대략적으로 가부장적이고 나르시시트적 성향이 강하신 부모님 밑에서 살면서 세 번째 딸로서는 가치를 갖지 못한 나의 존재에 대한 운명이다. 부모의 가치에 부합하는 것이 뭘까? 그들의 숨겨진 내심을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의 사랑받기 위해서는 나로서 잠재된 능력을 끌어내 보여야만 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만 했다. 난 아빠가 아이의 울음을 강압적으로 당장 멈추는 방법으로 자기 신체에 온 힘을 실어 분노를 표출해서 날 짐짝처럼 채찍질 했듯이, 내 영혼을 다해 아빠의 욕망에 부흥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론은 부모님의 그 추상적 구미에 다다르지 했다. 나의 기준은 늘 알수없는 부모님의 시선과 내면의 가치에 있었다. 니체가 언급했듯, '밖에 있는 것', '자기가 아닌 것'의 기준을 두며, 또 사실은 난 달라. 그들처럼 야박하지 않잖아, 그들처럼 누군가를 타박하거나 빼앗지 않아. 난 그들처럼 하지 않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야라며 합리화했던 그 마음 상태를 들통난 기분때문에, 든든한 니체의 지원을 받은 양 의기양양해 했던 학기초의 태도와는 달리 대학원 생활 4년이 서서히 주눅 든 상황으로 내 몰리게 되었다. 대학원 진학 전에 노예 정신을 가진 나를 응원하는 것으로 들렸던 니체의 잠언들은 진학 후에는 나를 자꾸 탓하는 소리로 다시 내면화되었다. 왜냐면 니체의 말에 반박할 무언가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히 니체에게 전복당하는 신세였다. 그리고 박사진급 시험만 겨우 간신히 통과하고 학기를 수료했다. 내가 진학 전 초기에 기획했던 대로 '논문은 제게 필요 없어요. 일생일대에 가장 중요한 유아기에 경험한 트라우마만 치유하면 되거든요.'라는 목적은 성취했다. 지금은 사실 아쉽다. 더 나아갈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에서 오는 한숨이다.


노예정신이 그렇게나 나쁠까? 주인이 있으면 노예도 있는 법, 노예라는 신분의 도움 없이 어떻게 사회가 발전할 수 있겠나. 노예의 삶이 너무도 처참하기 때문에 자꾸 안으러 스며들며, 목숨을 담보로 처지를 수긍해야 하니,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고치를 만든 게 아닌가. 차마 타인을 똑같이 침해하기를 선택할 수 없다는 거다. 그게 그렇게 수동적인 결정일까? 직접적 대응을 하지 않은 '상상의 복수를 통한 원한'에 대해, 니체를 전부 전복하지 못해서 난 여기까지 마음을 정리한다. 내가 처한 상황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에서 부모라는 혈족적 위계, 가족을 버리기 싫은 깊은 내면 그럼에도 함께 조화롭고 싶다는 간절한 갈망으로 자기 심장을 팔 수밖에 없었지만 그 또한 너와 나를 조화롭게 하기 위한 노예로서의 창조적인 사고다.

 

노예의 수동적인듯 한 '상상의 복수를 통한 원한' 은 장기전이다. 오랫동안 금질로 노련하게 서서히 그리고 깊게, 통찰되어 있고, 끊임없이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 끈질기게, 견뎌온 만큼... 사실은 그때를 위해 금질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세대에서 빛을 발하기를 기원하면서, 지나 온 세월을 되새기며 한탄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그게 뭐 어때서? 더디지만 계속 나아간다.


내가 대학원 수료를 겨우 마치고 더 나아가지 않은 후, 그 해 첫째 아이는 교내에서 1등을 찍었다. 때론 가 전혀 하지 못한 일들을 기적처럼 아이는 해다.


첫 째 아이 방에서 나뒹글며 내겐 선물처럼 다가오는 그림 중 일부 by 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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