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소를 찾아가기 전 임신 2개월 때부터 시작한 성장코칭에서 어느 회원분이 초빙한 천안함참사 트라우마 유가족들의 상담을 진행하고 계신 분을 초대했다. 그분은 부부갈등에는 각자 다른 성향을 이해하기 위한 필요성에 대한 강연을 준비해 오셨다. 질문지를 통해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었는데, 짧은 시간에 급하게 했기 때문에 타당한 것인지는 분별이 되지 않았으나 강연이 끝나고 그분이 우리 부부에게 준 선언문은 여전히 내게 의미 있는 말로 남아 있다. 남편도 그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남편은 다른 사람의 말을 거의 안 듣는다. 내 의견을 수용하기 싫을 때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더 듣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강연이 끝나고 진주에 있는 어느 식당에서 들은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자 남편분은 따라 하세요. 세 번 말씀하세요.
"나는 나의 선택에 의해서 결혼했다."
자 부인분도 따라 하세요. 세 번 크게 말씀하세요.
"나는 다 성장하여 결혼하였다."
이 삼창을 시키시더니, 바로 자신의 명함을 주시면서 언제든지 연락 주시면 바로 상담드리겠다며 말씀 주셨다. 아. 감사함과 동시에, 내가 연락을 드린다는 것은 우리 사이가 계속 나빠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기분이 참 별로였다. 하지만 그분이 남기신 선언문은 고마움으로 새겨져 있다. 남편과 내가 더 잘 될 거라는 소통의 가능성이라기보다는 몰랐던 나의 상태를 자각하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역시 전문가 맞으시구나.' 잠깐 대화했는데 우리 둘의 문제를 잘 뽑아 주셨다. 그리고 그 문장이 계속해서 나를 통찰케 했다. 내가 성장하지 못한 상태로 쫓기듯 부모님의 집에서 도망 나왔다는 정신, 남편은 결혼으로 부자가 되고 싶다는 꿈이 나를 선택한 순간 망가졌다는 생각에 가정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서 멀어지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 그 두 문장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내심 밥상머리에서 아이 취급받는 것 같아 갑자기 창피했다. 나이를 먹어서도 성장하지 못하면 얼굴이 붉어질 일들이 생긴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도움을 받아가면서 커가야지 하는 마음뿐이다. 남편은 그런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자기 주머니 열어야 하는 일만 아니면 몸은 따라가 준다는 의지만 있었다. 그럴 때는 특별히 문제 될 게 없는 것처럼 생각되다가도, 주변 친구들이나 후배들의 경제력이 어떻다는 수치를 듣고 올 때는 한 달, 두 달 자신의 한이 풀릴 때까지 상대를 비방하며 존재를 깎아내리는 말과 행동을 거침없이 한 사람이다. 나는 그게 싫었다. 인간다운 대우를 하지 않는 무례함, 심지어 생명체에 대하는 게 아닌 물건 취급하는 듯한 태도 등을 숨 쉬듯 듣고 봐야 했기에 신경이 점점 예민해지고 불안해졌었다.
인간의 잔인함은 왜 솟구치는가. 내 경험에 의해 난 어떤 트라우마가 작용했다고 늘 생각했다. 남편의 언행을 관찰하면 본인의 관점이 아닌 제삼자의 관점으로 말하곤 했다. 예를 들자면, "너 같은 며느리가 어디 있냐."라는 문장이다. 그러면 나는 "너 같은 사위가 어디 있냐?"라고 말할 수 있었을 테지만 되돌이표밖에 되지 않아 건설적이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렇게 반응하질 않았다. 대신 나는 늘"내가 자기 며느리냐?"라고 말했다. 그냥 본능적인 대응인데, 남편의 문장은 대화자체가 직접적이지 않고 투명인간이 옆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의 문장이었다. 그래서 최근에 생각해 보니, 그의 대화 패턴은 늘 의무와 책임에서 멀어지면서 상대를 제대로 꽂아 내릴 수 있는 표출어에 능숙해있는 것이다. '너 같은 며느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조차 타인의 응시가 강하게 붙어있다. 나는 남편에게 부인이지 며느리가 아니다. 그런데 그는 늘 나에게 8년 이상을 그 문장만 내리꽂았다. 그러니까 부부로서 대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위치에서가 아닌 그 언어가 주는 위계성을 느끼게 하는 교묘한 문장이었다. '너 같은' 이라는 표현은 나뿐만 아니라 늘 불특정 또는 내면에 품은 특정한 어떤 비교 대상이 있는 것을 내포한 뉘앙스다. (다른 며느리는 안 그러는데)너라는 며느리는이라는 표현과 같다. 며느리라는 단어는 직접적으로 시아버지가 쓰셔야 하는 언어인데, 동시에 타인도 ~며느리 어째데,라고 할 때도 사용되기 때문에 남편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남편의 언어사용하나 때문에 호출되는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이 '너 같은 며느리가 어디 있냐."라고 할 때 내 무의식에서, 시아버지, 남편 주변의 불특정 모든 사람, 그리고 특정되었거나의식하지 못한 모든 사람까지 포함하여 신혼집으로 투명인간으로 소환시키는 마술적인 문장이었다.
그의 언어는 그렇게 잔인하고 야박하고 능글스럽고 심지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혐오스럽다. 자신의 수치를 나에게 자꾸 덕지덕지 묻혀버리고 싶어 안달인 모습으로 비친 상황자체가 매우 싫었다. '나르'가 그러한 위계적 언어를 쓰는 심리는 상대를 조정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자신이 늘 우월하다는 환상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원치 않게 위계적 상황을 압박하는 언어를 갑자기 듣게 되면, 이런 감정들을 어떻게 정화시킬 수 있을까?
일단 남편이 주로 하는 언어를 차용하자. '나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 자기 보호에 매우 효과적이다.
오해하지 말자 이건 내면의 독백이다.
'그건 네 생각이고.'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도 호출하자
'너나 잘하세요.'
마지막으로 그가 제일 잘 쓰는 화살 같은 말
'저리 꺼져!'
마지막 문장은 내가 들었을 때 너무 부인에게 차마 해서는 안 되는 물건 취급용 언어였기에, 사용하고 쉽지 않았으나, 결혼 11년 만에 나도 남편에게 사용해 보니, 속이 시원하고 효과는 상대를 거리감 두게 하는 데에 즉방이었다.
남편이란 사람 참 이상하다.
'나르'는 소외와 고독을 매우 두려워하고 싫어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거 같기도...
새로운 언어나, 질문을 던져주거나 아님 이처럼 그 사람이 사용했던 언어를 적정한 때 투척하면 자기 방어에 효과가 좋게 먹힌다. 물론 침해감을 느낄 때만 급처방용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 언어들이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에. 여하튼 남편의 언어를 사용해 봤을 때에야 남편이 왜 히득히득 거리거나 흥얼흥얼 콧노래를 하는지 알게 됐다.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는 사람을 방해물로 인식하고 있다가 '꺼져', '비켜'하면서 클리어시키면 자기 속이 후련했던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피해의식이 강했다는 것을 인식해 가니 남편의 폭언들이 더 이상 위협적이거나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씁쓸한 것은 남편의 위약함이 내가 대응하기 어려운 때인 임신기를 노렸다는 것이다. 출산과 육아를 연장하면 둘 째까지 근 육 년이다. 난 그 잔인함에 대해서는 아직 용서할 마음이 없다. 언젠가 그 인간의 잔인함의 근원에 대해서도 파헤쳐야겠다. 앞으로 기획한 비전을 위해 이제는 쉽게 관용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자. 이제 나를 지켜가면서 대응하자.나르를 치유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을까? 난 기대하고 있다. 나르 남면은 내 육아법을 쉴새없이 비난하며 아이에게 모략까지해대면서 나의육아에대한 큰 기획을 방해했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아이가 좋은 성적을 낸 결과가 있어서 그런지(경쟁에 민감한 '나르' 남편은 이번 게임에서는 승복한 것처럼), 15년만에 '나르'의 독백이 조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