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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메리 Apr 08. 2023

학폭 피해자였지만, 이제부터라도 잘 살고 싶다면.

학교폭력 트라우마 이겨내기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긴 세월 동안 학폭을 경험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트라우마 때문에 집 밖에 나가지도 않을 정도였으니 십 대 시절이 얼마나 참담했는지 짐작하는가?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일상생활에 적응하기 무척 힘들다. 유소년기 트라우마가 이토록 독하고 질긴 것이라니 몰랐다. 그렇지만 이제 세월이 흘렀고, 지혜가 생기면서 다소 정돈되고 차분한 삶을 살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이다.


나는 내가 직접 겪어봤기에 학폭 피해자들의 피폐한 삶을 알고 있다. 피해자들이 자신에게 수없이 화살을 돌리고 있는 비밀 또한 알고 있다. 학폭을 당하고, 참으로 고된 시간을 지내면서 매번 이런 생각을 갖고 지냈었으니깐. '왜 하필 나일까?' '어째서 이런 일을 당해야 하지?' '이유가 뭔데?' 같은, 수없는 질문들. 그리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같은, 불안한 질문들. 학교 다닐 때도 힘들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오롯이 혼자가 될 때까지 물음표로 점철된 시간을 지냈으니 고통스럽다. 그리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는 그래도 사람들이 변해서 학폭을 언급하면 같이 욕해주거나 비난한다지만 나 스무 살 때만 하더라도 '왕따'만 입에 올려도 혀를 끌끌 찼다. 사람이 어디 모자라면 따돌림을 당한다더라. 같은 뇌를 거치지 않고 내뱉는 실언 같은 걸 많이 하고 살았다. 2차 가해를 서슴지 않는 인간 틈바구니에서 지내온 시간들이 어찌나 길고 참혹하던지 다시 떠올려도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그것도 단지 사람들의 가벼운 말마디일 뿐이다. 누가 내 속을 알아준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니고, 잘 모르고 비난한다 해도 제삼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 아픈 건 여기까지만 하고, 중요한 말을 해보기로 한다. 


거두절미하고, 원인을 찾지 말자. 원인 따위 중요하지 않다. 원인과 결과. 이 시대에 얼마나 중요한 키워드인가? 무엇이든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어떤 일이든 원인을 찾아야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학폭만은 그렇지 않다. 학교폭력엔 원인 따위 없다. 피해자들은 원인을 찾을 필요가 없다.


학폭을 당했던 이유, 대체 왜 나만 이렇게 힘든지 알 수 없는 이유, 그런 원인들을 찾는 것에 이십 년의 시간을 소비하며 방황했다. 이십 대 까지 가엾을 뻔했던 나는 내가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는 원인 들을 하나하나 찾아갔다. 소심해서, 내성적이어서, 말라서, 예뻐서. 등등. 그럴듯한 이유를 찾으면서 가해자들을 이해해 갔다. 머리로 이해를 해야 몸이 괜찮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이는 지구상에서 태어나서 가장 쓸데없는 시간이었다. 가해자를 이해할 시간에 나 자신이나 이해하면 좋으련만!


그냥 원인은 없다. 그저 가해자들이 심심해서, 가해자들의 심기에 거슬러서, 그냥 운이 나빠서. 초점은 그렇게 맞추어야 한다. 나에게 화살을 돌리는 시간마다 나는 나에게 상처를 받았다. 그 상처는 곪아터져서 남들도, 세상도 나쁘게 보도록 만들었다. 뉴스에서 어떤 사건을 보더라도 '나만큼 힘들지 않으면서', '니들이 나보다 어려웠니?' 같은, 시니컬하고도 씁쓸한 말을 내뱉게 만들었으니까. 원인을 파헤쳐봤자 내 마음만 파헤쳐질 뿐이었다. 더 이상의 원인 같은 건 찾지 않아도 된다고 어린 나에게 알려주고 싶다. 나도 모르게 원인에 집착했기 때문에 낯선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휘청거렸던 것이다. 내가 나의 중심을 잘 잡는다면 남들의 말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네가 무슨 문제가 있겠지'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따위, 한 귀로 흘려보낸다.


둘째로는 학교폭력 드라마나 이야기 같은 건 찾아보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요즘 넷플릭스 '더글로리'가 유행이라지만, 보지 않기를 권한다. 한량같은 이십대 시절, 나는 실제로 혼자 있는 시간마다 학폭에 관련된 만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것들이 내 상처를 다시 헤집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만화나 드라마는 스토리상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정확한 결말이 있다. 가해자들이 벌을 받거나 피해자가 행복해지거나 같은 엔딩을 보면 속이 후련해질 것 같아도 순간일 뿐이다. 막이 끝나면 나는 현실을 살아가야만 했다. 끝나지 않는 현실. 그러면 가끔 드라마나 만화 속 인물들과 나를 비교하곤 했다. '나도 저렇게 악독하면 될 텐데' '나도 복수를 해야 하나?' 같은 분개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나를 뒤집어 흔든다. 그 감정들도 나를 힘들게 할 뿐이다. 과몰입은 내 일상을 어렵게 만들 뿐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은 자신의 인생을 잘 꾸려가는 것이다.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 가물가물한 상태로 학폭을 떠올리면서 '그런 일도 있었지. 하지만 난 이제 행복하니까.' 식으로 지난 일을 떠올리는 게 가장 퍼펙트하다. 솔직히 이삼십 대에 유치원 시절 억울했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별로 없다. 초등학생 때 창피당했던 일을 두고두고 기억하는 일도 많이 없다. 학교폭력도 그렇게 별일 아닌 것으로 넘기는 것이 가장 좋다. 복수한다거나 불행을 곱씹으면서 독해지는 일은 과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밖에 되지 않는다. 


학교폭력' 키워드와 분리된 삶을 살아가길 추천한다. 상처에 과몰입보다 희망찬 삶에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치유가 된다. 나의 좋은 점을 알아보는 시간과 타인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내 편이 생기는 것이다. 그때 드라마와 만화를 본다면 달리 보이는 게 많을 것이다.


물론 나도 여기까지 마무리 짓는데 힘든 과정이 많았다. 모든 건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더구나 마음 정리는 육체를 보살피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깐.


마음을 정리하는 일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억지로 잊으려거나 덮으려는 수고가 아니라, 내가 나의 과거를 흘려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원인을 내 안에서 찾지 말고, 학폭에 관한 것들에 관심을 주지 않으면서 현재를 살아가려는 노력을 하다 보면, 그땐 정말 인생을 살아가는 순간순간만 남아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학교폭력을 당했지만, 이제라도 잘 살아보는 것 아닌가. 잘 살아보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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