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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철 Oct 29. 2019

가족과 잘 지내기란 어렵다

나를 가장 오래본 사람들, 우리 집에서 태어나서 나는 정말 행복하다

가족의 탄생, 나의 시작

내가 나고 자란 터전인 가족들. 나는 그들과 살아오고 있다.

벌써 9년 전에 찍은 사진이다.

나에게는 가족이 있다. 내가 나고 자란 터전인 가정의 구성원들이다. 내가 나 스스로를 인식하고, 세상을 인식하기 이전부터 나와 함께한 나의 시작. 지금도 나와 함께하고 있는 나의 가족들이다.


88년 나의 아빠와 엄마(아버지, 어머니라는 호칭은 아무래도 입에 잘 붙지는 않는다.)는 결혼했다. 형이 태어나고 17개월 후 내가 태어났다. 아마도 내 기억의 시작은 4~5살때 쯤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 기억이라는 것이 상황과 맥락에 대한 자세한 기억이라기보다는 '장면'이 사진처럼 스치듯 지나가는 형태다. 내 기억속 첫 우리집은 씻는 곳과 방이 구분된 턱이 높은 단칸방이었다. 내 가슴정도 높이는 됐던 것 같다. 그 다음 '장면'은 햇볕이 밝게 비추던 '우리 집' 빌라에서 시작한다. (90년대 초 서민들은 '노력'하면 서울 변두리에 작은 집을 살 수 있었다) 아마도 5살때 즈음인 것 같다. 그때 나는 초롱유치원 노랑반이었고, 우유팩을 잘라서 씨를 뿌리고 창가에 올려두고 이따금씩 나는 싹이 나는 것을 바라봤다.


96년, 7살 나는 초록반이 되었다. 형은 화계'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당시 이모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인천 계양에서 가방과 수제화 가게를 하고 있었다. 집에서 형과 나를 키우던 엄마는 다시 일이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엄마는 이모의 가게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서울 집을 팔고 가게를 인수했고 남은 돈으로 인천 지역 아파트를 '전세'로 갔다. 아빠의 직장은 성수동 자동차 정비 공장이었지만 이 선택에 아빠는 전혀 반대 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아빠는 묵묵하고 우직히 엄마의 선택을 따랐다. 아빠는 팔로우십이 정말 좋은 사람이다. 묘한 기분이 드는 지점은 서울에서 인천으로 왔을 때 엄마의 나이가 고작 서른 둘 밖에 안됐다는 것이다. 그때 내 눈에 엄마 아빠는 어른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들도 참 어리듯 젊었다.


첫 가게를 열었다. 활기가 넘쳤다. 그런데 기억나는 다음 '장면'들은 회색이다. '따뜻한 저녁과 웃음 소리'보다는 이상하리만큼 치열한 엄마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98년 한국에는 IMF 환란이 왔고, 경제는 어려웠다. 모두가 그랬듯, 당시 살던 아파트의 집주인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 같다. 끝내는 전세금을 받지 못했다. 


2001년 두 번째 가게를 열었다. 방이 딸린 작은 가게였다. 다시 수제화와 가방을 팔았다. 이번에는 판 제품의 AS 수선까지 했다. 아빠는 자동차를 정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수선기술을 금방 배웠다. 직장을 다니면서 아빠는 주말에 수선을 했다. 엄마도 수제화를 팔며 재봉틀을 배웠다. 엄마 아빠는 매일 새벽 2시쯤에 잤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곧 가게는 자리를 잡았다. 마침 동생인 희지도 태어났다. 가게는 점점 커져서 집도 가겟방을 벗어나 따로 이사를 가고,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즈음에는 3칸인 1층을 전부 터서 우리 가게로 썼다. 이 지역에는 수제화만을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게는 곧잘 됐고, 담당 관청의 추천을 받아 엄마는 중소기업청장상도 받았다. 그 무렵 엄마 아빠는 신용이 좋았다. 은퇴한 군인이었던 건물주 아저씨는 차라리 엄마에게 이 (작은) 건물을 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작은 건물보다는 '집다운 집'을 사고 싶어했다. 인천에서 제법 오래 살았고, 다자녀에 무주택 자격을 오래 유지했던 우리 집은 그때 즈음 송도의 '많이' 큰 평수 아파트 분양권에 당첨됐다. 엄마 아빠는 크게 기뻐했다.


고3 여름방학 때 엄마와 나는 송도에서 점심을 먹었다. 허허벌판이었지만 분주하게 큰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엄마는 저 집이 올라가면 일단은 세를 주고, 나중에는 직접 살거나 팔아서 전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두 분이 정말 많이 고생하셨으니 앞으로는 행복하고, 또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그즈음 기타를 사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의 첫 기타이자 지금도 함께하는 그 기타다. 나는 우리 가족의 미래를 크게 낙관했다.


해가 바뀌어 나는 경영학과 학생이 되었고, 곧 '서브 프라임 모기지'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다. 부르는 게 값이었던, 푸르지오 분양권은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경기는 얼어붙었고, 또 누군가 사기에도 너무 큰 평수였다. 엄마 아빠는 그래도 버텼다. 엄마는 정든 가게를 정리했다. 아빠는 열심히 일했다. 그래도 끝내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스물 둘, 말그대로 집의 '파산'을 경험했다. 그즈음 나는 친구들과 이후 7년을 함께한 스타트업을 시작했다. 드라마를 보면 집이 망하면(?) 티브이나 가전도구, 가구 등에 빨간쪽지(?) 같은 것을 붙이러 사람들이 오는데 그런 것은 없었다. 그런 일은 재벌이나 정말 큰 부자집이 망했을 때 생기는 일이다. 나는 그때 창업을 하며 처음 번 돈으로 엄마의 기타를 사기로 했다. 나는 기타가 가지고 싶었고 기타를 사는 것이 가정 경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엄마에게 계좌를 여쭈었다.  


"입금은 새마을금고 문희지 xxx-xxxx-xxxx 고마워 아들!"


한 때 중소기업청장상을 받은 엄마는 이제 계좌가 없었다. 파산을 하면 계좌를 만들 수 없고, 거의 대부분의 금융거래를 할 수 없다. 엄마는 내 동생 이름으로 계좌를 만들었다. 스물 둘 밖에 안됐던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괴로웠다. 방황이 이어졌다. 나는 창업과 음악에 빠져 시간을 보냈다. 스물 넷에 나는 창업을 위해 인천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시간이 훌쩍지나 스물 아홉 7월 전역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다행히 괜찮은 조건으로 스타트업의 기획 업무를 하며, 재입학 후 남은 학기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5년을 밖에서 지내다 돌아온 나는 이제 많은 것들이 변해있음을 체감한다. 내가 창업이다 의경이다 밖을 떠도는 동안, 형은 결혼을 했다. 돌아온 나는 이제는 젊지만은 않은 엄마, 아빠와 훌쩍 커버린 희지, 노견이 된 강아지 문돌이를 마주했다. 내가 집에 없는 5년동안 나의 부모는 또 다시 '고군분투'했고 다행히도 우리 집의 사정도 대단히 나아지지는 않았으나 혼란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간 나는 나대로 '스트러글'하고 있었지만, 가족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애써 직면하지 않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것이 두고 두고 마음에 걸렸다.


5년 동안의 방황 후 돌아온 집에서, 나는 나와 나의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제는 나의 부모가 내가 어린 날 보아온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의 몸도 마음도 노년을 향해 가고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나는 나의 부모 이전에 한 사람의 개인으로 그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것은 유년기, 청소년기 내가 안다 할지어도 공감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지나온 삶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내오며 거의 처음인 일이었다.


나는 그들의 삶을, 그들과 함께함의 의미를, 한 개인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그들이 나를 낳은 나이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어서야. 개인이자 개인으로 나와 나의 부모는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나의 시작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다.



그들과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내가 '나'일 수 있게 한 사람들. 그때 길을 잃었더라면 나는 어떤 '나'가 되었을까

나의 아버지와 나의 형 그리고 나


인간이 비록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 할지어도, 자신이 놓인 환경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란 어렵다. 특히 아직 자아가 충분히 자라지 못한 어린 시절, 한 인간을 둘러싼 환경은 그 개인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좋은 '나'이든 그렇지 않든 내가 '나'일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나고 조우한 최초 환경의 영향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보통은 그 최초의 환경은 <가정>이며 그 구성원인 <가족>이다. 물론 모든 인간이 전통적인 형태의 가족에 속해있지는 않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혈연으로 구성된 가족이 없을 수도 있다. 사실 가족이 별 거인가 싶기도 하다. 오랜기간 서로가 서로를 가족이라 여기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받으면 그 관계를 가족이라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지만, 세계와 주변을 구성하는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개인은 환경들에 조응하고 때로는 저항하며 자신을 형성해 나간다. 

그 중 '가정'은 환경의 가장 기초적인 최초의 단위이며, 여러 형태가 존재한다. 


가족의 다양한 형태 속에서 가족은 '나'라는 개인이 탄생하고 형성하는데 영향을 준다. 나의 부모가 내게 전한 유전 정보로부터 나의 신체는 구성된다. 가족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과 태도에서 서로는 독자적인 어떤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 가족 구성원들은 그들이 형성한 가정의 문화에 조응하고, 때로는 저항한다. 나 역시 가정의 여러 문화에 꽤나 많은 저항을 해왔지만, 혈연으로 형성되고 엮인 나의 가족으로부터 애써 벗어날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내게는 가족이 주는 <심리적 안전판>이 분명히 존재한다. 안전망이나 안정감이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지켜야할 가치가 있는 한편으로는 나를 지키고 있는 강력하고 든든한 무엇이다. 경제적 풍요로부터 오는 안정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 생각한다. 


내게는 오랜 친구가 있다. 그와 나는 여러가지 지적 주제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대화를 이따금씩 하고는 한다. 그와 나는 서로의 사고를 존중하고, 잘 지내고 있지만 <사고 시작의 디폴트>가 다르다는 생각도 한다. 그와 나의 사고의 가장 큰 차이 지점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지켜야하는 가치에 대한 준수/수호 의지>에 있었다. 경영학과에서 철학과로 전과한 괴짜인 이 친구는 그 차이의 이유를 '가족 구성의 차이' 때문으로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나 나나 학대받는 가정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집은 나보다 훨씬 넉넉한 가정의 경제 조건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 안전판>으로 가족을 여기지는 않고 있었다. 


나는 내 사고의 근간이 가족의 구성과는 별 상관 없는 것이 아니냐.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냐 되물었지만, 반대로 그는 내가 가진 <인간에 대한 신뢰>와 <지켜야할 가치에 대한 준수/수호 의지>에 대한 태도는 거의 '정언명령'(칸트가 말하는 그 자체로 목적인 지켜야 하는 도덕 준칙)급이라 최초 환경이 내게 미친 강렬한 영향이 있을 것이라 추론했다.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나 개인 사고의 근간은 최초 조우하고 자라난 환경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다. 내게는 넉넉하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과 경제적 성공에 대한 갈망이 있다. 


나의 부모는 내가 자라면서 최선을 다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지원했지만, 아무래도 넉넉한 집들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했다. 나는 이 지점이 내가 가진 일종 <땜빵>이 아닌가 싶다. '땜빵'은 말하자면.. '지속적으로 사고 근간에 영향을 미치고 사고 과정에서 의식되는 개인의 열등감의 원천'이랄까. 하지만 삶의 많은 것에는 상쇄(trade-off)가 있다. 반대로 내가 얻은 것도 분명히 있다. 나는 내가 자부하기에 '비교적 자유로운 사고'를 하게 된 주요한 원인으로는 나의 성장 과정에서의 나의 부모의 태도였다고 본다. 우리 집이 충분히 넉넉하지는 못하기에 나의 부모는 당신들이 바라시는 만큼 나를 지원해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나의 삶에 어떤 간섭을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듯 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서로에 대한 우리 가족의 기본 태도는 <서로 생각하나 간섭하지는 않는 것, 차마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부모는 나의 삶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의 결정에 대해 늘 말을 아낀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정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듯하다. 형에 대해서도 그랬고, 솔직히 그들은 우리 삶을 충분히 돕지 못함에 대해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듯도 하지만, 나는 나의 부모가 이미 형과 나의 양육에 대한 모든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나의 사고와 결정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함으로써 이 세상 무엇보다도 가장 강렬하게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당신들의 헌신과 존중은 나를 자유롭게 살고 싶은 개인이 되게 했다.


내가 대학 자퇴를 결정했을때 엄마 아빠 누구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형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 형은 어느 날 엄마에게 형수를 소개하고는 결혼 날짜를 알렸다. 형과 형수는 결혼할 때 딱히 상견례를 치르지 않았고, 이미 당사자들이 결정한(?) 상태에서 우리 집과 사돈 댁은 동네 식당에서 가볍게 식사를 했다.(그리고 그 자리에 나는 없었다...) 고3때는 어느날 집에 왔더니 평생 개를 안키우던 사람들이 강아지를 데려왔다. 강아지 문돌이에 대한 우라 가족의 태도도 어째 서로를 대할 때와 비슷하다. 딱히 대단한 애정을 주지도 않지만 적당한 관심과 무관심사이에서 문돌이는 쑥쑥 자랐다. 밥먹고 브로콜리도 먹고 쇼파 위든 내 방이든 자기가 있고 싶은 곳에 있고 자고 싶을 때 잔다. 녀석은 참 독립적이다. 자기 생각(?)에 납득되지 않는 것에는 저항한다. 문돌이는 정말 나를 닮았다.


유년 시절 바닷가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가끔은 생각한다. 그때 영영 가족을 찾지 못했더라면 

나는 어떤 개인으로 자라났을까? 나는 지금의 나와 얼마나 다른 개인일까?


나의 시작에는 아빠가, 엄마가, 나보다 2살 많은 형이 있었고, 내가 나를 인식하기 시작한 이후에 희지가 태어났고, 청소년기 막바지부터는 문돌이가 함께했다. 참 다양한 개성이 있는 가족이다. 아빠는 과묵하고 누구보다도 성실하지만 집에서는 늘 누워있다. 엄마는 외향적인 성격인 사람이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지금은 '출가'한 형은 나와 같은 방을 10년 이상 같이 썼고, 나와는 늘 티격태격했다. 희지는 인간이 자라나고 성격이 형성되는 과정을 지켜본 최초의 개인이었다. 그들은 가장 오랜 시간동안 나와 부대끼며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나의 많은 면은 그들로부터 왔다. 작은 습관에서도 그랬다. 나는 식사 후 30분 동안은 절대 눕지 않는다. 또 상대가 통화를 마치기 전에 여간해서는 전화를 끊지 않는다. 나는 아는 이들을 조우할 때마다 인사를 하려 한다. 이는 모두 어릴 적 나의 부모가 강조한 습관들이다. 나는 그 습관들을 여전히 지키고 살고 있다.


내게 나의 가족이 없었다면, 나는 어떤 '나'였을까 생각한다. 5살 무렵의 어느 기억 속 사진같은 '장면'이다. 나는 동해 바닷가 피서지에서 길을 잃었다. 모래사장 텐트 안에 있다가 나는 궁금함에 이곳 저곳을 떠돌았고, 이내 근처 시장까지 혼자 걸어갔다. 어떤 아저씨가 나의 손을 잡고 부모를 찾아주겠다 했다. 그러다 시장에서 엄마를 만났고 나는 울면서 엄마에게 안겼던 것 같다. 아마 실제 거리 상으로는 그다지 멀리 떠나지 않았는지 모른다. 다만 당시 내가 인식가능한 세계 범위는 지극히 작았고, 그 길에서 나는 영원히 가족을 잃어버렸을지 모른다. 만약 그때 내가 다시 가족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자라났을까.


그저 같은 유전 정보를 가진 완전히 다른 인간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나의 모습을 나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분명 나의 가족은 지금 내가 '나'일 수 있게한 강렬한 배경이었다.




그럼에도 가족과 잘 지내기 어려운 이유

독립적인 개인인 나는 가족의 영향에 저항한다. '나'이기 때문에 다른 무엇이 분명히 있다.

나를 놔두세요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


그리고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가겠고,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일터. 수 많은 인용 탓의 클리셰에 가까워졌음에도 데미안의 이 문장은 참 강렬한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저마다의 껍질을 깨고 변화를 마주한다. 꼭 껍질을 깨야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호빗 프로도가 그가 사는 마을 샤이어를 떠나지 않아도, 그는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비록 전란이 샤이어까지 미쳐 그는 결국 떠날 수 밖에 없었겠지만. 


아무튼 자신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는 껍질 밖에 있을 것이 분명하다. 여정은 껍질을 깨고 나간 개인에게 허락된다. 인간은 선택해야한다. 껍질 안에 머무를 것인가 언제고 껍질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설 것인가. 과연 개인은 최초의 껍질인 가족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20대 동안 작은 교육사업을 하며 느낀 놀라운 점은 어떤 형태로든 가족들은 서로를 반영한다는 것이었다. 상담과정에서 고등학생인 우리 학생들은 그들에게는 형이나 오빠 정도 나이인 우리에게 가정에서 느낀 많은 서러움과 괴로움을 토로했다. 반면 부모들은 그러한 자녀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모들은 최선을 다해 사회에서 살아내고 있었고, 자녀에 대한 기대를 가졌다. 더 열심히 공부하든 무엇이든 자신들이 가진 기대를 그들의 자녀가 따르길 바랐다. 자녀들은 대체로 반항하지 않고 순응하는 척 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시한 폭탄을 가지고 있었다. 째깍째깍 폭탄의 시계는 작동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들에게 부모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그들은 언제든 부모를 벗어날 터였다. 부모 입장에서는 섭섭하고 아쉬운 일이다. 그 뿐이겠는가. 자녀들은 바깥에서의 짜증나는 감정들을 부모에게 던진다. 혹은 부모의 말에 수동공격으로 대응한다. 부모가 이것을 감내해야할 때 부모는 인간적인 서운함을 느낀다. 반대도 마찬가지. 가족 어느 누구도 서로에게 그럴 자격은 없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통제욕과 이를 벗어나려는 자녀

부모와 자녀는 끊임없는 긴장상태에 놓인다. 

한 <개인 대 개인>으로 그들이 서로를 마주하기는 쉽지 않다.


내가 상담 과정에서 본 대부분의 부모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자녀를 통제하고 싶어했다. '독립된 자아'로서 자녀를 마주하는 것은 아마도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주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한다. 그들은 자녀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보았고, 한 인간의 성장에 대해 꽤나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한 인간이 나고 자라는데는 정말 많은 또 다른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 역시 자녀를 낳고 기른다면 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녀에게 아쉬운 마음이 들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부모의 '통제'는 근엄하고 자애로운 부모의 사랑이기도 했고,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잃고 싶지 않다는 한 개인의 소유욕이기도 했다. 때로는 부모는 자신의 희생을 매개로 자녀를 통제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부모의 마음은 자신을 위하는 동시에 자녀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양가적이고 때로는 모순적이다. 


하지만 1) 그 부모의 책임과 마음을 자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2) 부모가 자녀를 미실현한 자신의 자아실현을 대리할 '유사 자아'이자 미독립과 종속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면, 부모와 자녀가 아닌 개인 대 개인으로서의 갈등은 언젠가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자녀는 자신이 자립할 능력과 의지가 없는 탓에 감히 부모에 대항하지 못한다. 일부는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지만, 내가 본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부모들 중 제법 많은 이들이 보유한 재력을 활용하여 자녀들의 활동 범위를 통제했다. 자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반항했으나 부모가 주는 압도적인 재력은 정원에 개를 매는 목줄과 같았다. 부모의 말을 들으면, 차가 생겼고 매달 수 백에 달하는 생활비가 나왔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들은 부모가 주는 따뜻한 과실 아래 놓여있었고 이를 거부하지 못했다. 그 덕에 그는 진정 독립된 개인이 되지는 못했다. 사실 당연한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제적 자립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여전히 부모의 그늘에서 수혜를 받으면서 그의 의지를 거스른다면 이는 개인 대 개인의 '계약'이라고 보아도 불공정하다. 수혜를 거부하지 않으며 자유롭고 싶다면 이는 모순이자 위선이다. 


일면 거래적일 수 있으나 '상호 호혜'를 지키지 않는 관계에서 불만이 생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부모와 자식에게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역할 이전에, 개인과 개인이 더불어 살아감을 위해 상호 간 기대와 역할의 조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갈등을 외면하고 있을 뿐 상존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나의 부모와 우리들은 개인 대 개인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이는 서로 상호간의 삶을 책임질만한 충분한 여력이 없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그 덕에 우리는 함께 힘을 합치는 것이 가장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임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서로는 서로의 생활 반경을 꽤나 무관심함으로써 존중한다. (서로 생일도 딱히 안챙긴다.) 그러면서도 힘을 합쳐야 할 때는 힘을 합치니, 우리 각 개인은 대외적 위기를 위한 소집령에는 응하는 느슨한 봉건국가가 아닌가도 싶다. (형의 결혼식 때 그것을 여실히 느꼈다.)


부모와 자녀라는 '역할' 이전에 우리 각자는 개인이다. 

상호간의 기대와 역할, 더불어 사는 방식에서의 조정과 타협이 없다면 

개인으로서 서로는 갈등의 가능성을 언제나 안고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우리 가족 안에서도 독립성에 대한 나의 의지는 남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우리 가족들은 대체로 딱히 좋아하지 않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 다른 인간이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나의 외모는 아버지를 닮았고, 외향성은 어머니를 닮았지만, 우리 가족 구성원들 모두 사고하는 것, 구체적으로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에서 꽤나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나의 형과 나의 동생과도 나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성격과 적성이 다르다. 


내가 태어난 이래 나는 대체로 크지 않은 집 때로는 비좁은 가겟방에서 나의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고, 그 시절 나는 형제들과 한정된 공간과 자원을 나눠야만 했다. 생각해보니 정말 박터지게도 싸웠다. 그 과정에서 나와 형과 희지는 나름대로 서로 양보하고 균형을 찾는 방법에서 알아갔으리라 생각한다. 일찍이 나는 나의 방을 가지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가족과 지내는 시간동안은 단 2.7년동안만 그것을 이뤘다. 앞선 2년은 형이 군대로 떠난 때, 나머지 0.7년은 다시 돌아온 집에서 봄에 이사 후 겨울이 된 지금까지다. 


지금 나는 작디 작은 내 방에서 가장 자유를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들, 포스터를 붙여놓고, 침대로 내 취향에 맞는 것을 구입해서 쓴다. 나의 작은 책장에는 내가 좋아하는 책과 몇 년동안 쓴 일기들을 꽂아놓았다. 문을 닫고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 음악을 틀어놓고, 가끔은 친구와 통화한다. 오래전 나의 사무실에서 모두가 퇴근할 때나 1년동안 '혼자' 자취를 할 때만 느꼈던 그 자유다. 나는 나의 공간이 누구에게도 점유되지 않길 간절히 바라왔다. 행정 의경 생활을 할 때는 생활실에서 업무 시간 외 업무 관련 질문을 자제해달라고까지 했었으니 나의 자유롭고 싶은 의지는 집착(?)에 가깝다. 부모 세대는 이러한 나의 자유에 대한 집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는 내 방 침대가 편하다(그리고 송구하게도 내 침대 매트리스가 제일 좋다.)는 이유로 내가 들어오지 않는 날 내 방에서 자주 잔다. 또한 내 방의 이 아늑함과 평안함(?)을 희지도, 문돌이도 가끔 탐한다. 우리는 일종의 신사협정을 맺었는데, 서로의 방에 들어갈 때는 어떠한 경우에도 상대 동의를 얻자는 것이었다. 어쩌면 방대한 나의 일기와 기록물들을 다른 가족들이 봤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문을 걸어 잠그고 나가는 건 좀 그렇고 그저 믿어야할 따름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제서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균형점을 제법 찾았다.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은 우리

하지만 영원함은 없고, 언젠가 우리는 함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의 부모는 형제자매가 많은 넉넉하지 못한 집에서 어렵게 자랐다. 학창시절 엄마는 학교 회비를 못내는 일이 잦았고,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엄마는 아빠가 '정말 말랐었다'고 회고했다. 가난한 두 사람은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필연처럼 만나 사랑했고, 결혼을 했다. 엄마는 결혼 후 가족을 떠나 단칸방에 혼자 있을 때 그렇게 행복했다고 했다. 엄마는 희지 나이에 돌아가서 대학에 갔더라면 삶은 어땠을까 말한 적이 있다. 희지를 가졌을 때 아빠는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두 사람다 거의 마흔이 다된 시점이었다. 기억 속에서 우리가 아주 넉넉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의 부모는 언제나 치열했고 부지런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 부모 아래에서 게으르고 생각은 많은 이상한 내가 태어난 것은 참 신기하다. 한 사람의 평범한 개인으로 세상에 맞서 살아내고, 내가 세상에 있게한 당신들께 어떤 말도 부족함을 나는 안다. 


글을 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피자를 사간다. 문 앞에 서니 문돌이가 반갑게 짖는 소리가 들린다. 집에는 엄마도 아빠도 희지도 있다. 함께 피자를 먹었다. 나눠 먹어서 너 먹을 거 부족한 거 아니냐고 엄마가 말한다. 엄마가 순두부 찌개를 끓여줬다. 나는 문돌이가 좋아하는 오이를 던져줬다. 문돌이가 맛있게 오이를 먹는다. 저녁을 먹고, 희지와 파를 다듬었다. 파를 다듬고 엄마와 희지는 산책을 나간다고 한다. 그러면서 형 아들인 조카 하성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3일 전에 신고 왔던 양말을 왜 안신고 왔냐고 물어봤단다. 엄마와 희지가 산책 나가는 길에희지에게 아끼는 후드티를 빌려줬다. 날이 추워졌다. 노견 문돌이는 입을 옷이 없어서 집에 남았다.


평생 자동차 정비를 한 아빠는 이제 온몸이 아프다. 20년은 미뤄둔 병원에 다니려고 당신 삶에서 처음으로 2주 가까이 집에서 쉬고 있다.  그는 내가 본 어떤 사람보다도 늘 똑같은 사람이다. 발전도 퇴보도 없었던 그런 사람. 하지만 한 해 한 해 나이를 더해갈 수록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만 있던 당신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조금씩 깨닫는다. 사실 당신이 변하지 않아서 우리가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당신은 늘 그 자리에 있었기에 우리 각자는 자신으로 살 수 있었다. 형에게 전화가 왔다. 시작한 작은 사업에 대해 고민이 많단다. 이전 작은 사업을 했던 시절의 경험을 나누었다. 책을 탈고하면 만나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기로 했다. 잠깐의 통화 후 이 글을 마저 쓰고 있다. 



작년 여름, 돌아온 내게 집은 좁았다. 나는 엄마에게 좀 더 큰 집으로 옮기자고 말했다. 그때 엄마는 아직은 남은 빚이 조금 있다고 말했다. 오래전 우리 집은 파산을 했었다. 파산을 하면 변제 책임이 없다. 그런데 왜 빚이 있다는 것일까. 엄마는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내게 '왜 힘든지' 말해준 적이 없었다. 의아했다.


"예전에 파산할 때 금융권 거는 넣었어. 그런데 사람들에게 도움받은 것들은 그럴 수가 없더라. 오랫동안 알고지내던 분들인데 그럴 수는 없지..."


(...)



내가 방황하는 몇년동안 나의 엄마와 아빠는 내 동생 희지를 키우며 묵묵하게 '도움준 이들'의 돈을 갚아왔다. 그마저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또 얼마전부터 계좌를 다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형의 결혼식에는 정말 많은 엄마와 아빠의 사람들이 왔었다. 덜 힘들 수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차마' 그러지 못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나의 엄마와 아빠가 내게 남긴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저 사랑해서 결혼했고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았던 한 개인이었으며, 많이 배우지도 많은 자산을 가지지도 못한 어쩌면 그냥 수많은 소시민중 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들은 선하고 정직하고 우직했다. 또 내게 많은 말을 하기보다 내가 무슨 길을 가더라도, 그냥 믿고 지켜봐 주었다. 그들이 내게 준 것은 무제한의 믿음이었고, 양심을 저버리지 못하는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그들은 내게 증명했다.


문득 나는 그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엄마, 아빠, 희지, 문돌이와 다같이 살 수 있는 날이 아주 오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시간이 행복하고 즐거웠으면 좋겠다.


아직 지나지도 않은 이 시간이 나는 벌써 그립다. 

우리 집에서 태어나서 정말 행복한 나.

결국 나는 그들을 사랑할 수 밖에는 없다. 


나는 이제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것'들을,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나가야겠다.

이 말이, 문장이 무력하지 않도록.

나도 내 삶으로 증명해내야지.





아 

가족들과

잘 지내기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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