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말하는 꿈의 의미는 어떤 직업이거나 너무 막연하다
나에게는 나보다 11살 어린 동생이 있다. 성별은 여성이고, 나이는 (30-11=)19살이다. 이 친구는 한 인간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을 내가 모두 지켜본 유일한 인간이다. 동생이 태어난 날 밤, 아빠는 진통 중인 엄마와 산부인과로 갔다. 집에 남겨진 초등학교 4학년 나는 밤새 국산 명작 게임 킹덤언더파이어를 했다. 2살 위 형은 티브이를 봤다. 다음 날, 알아서 학교를 갔다온 형과 나는 엄마가 출산을 했다고 알려진 산부인과로 찾아갔다. 다행히 엄마는 건강했고,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보기에도 정말 작은 아기가 있었다. 문희지의 탄생이었다.
시간은 대단히 빠르게 흘러 어느 날 저녁, 나는 금방 서른 당해 있었고 문희지는 고3이 되어 있었다. 이 날이 오기까지 문희지는 중학생 때는 사격이 하고 싶다(가끔 집에 사격협회 공문이 온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아이돌이 되고 싶다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 하다가 그 날 저녁은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다 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동생이 되고 싶다고 했던 직업들은 별로 상관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 친구는 공부나 그 ‘직업’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무언가를 딱히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동생은 어느 때부터인가 자기는 “꿈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은 ‘열심히’가 잘 안된다는 늬앙스가 담겨있었다. 그런대로 납득은 되는 이야기였다.
다만 동생이 말한 꿈의 의미는 ‘직업’이 아닐까 싶었다. 어디 문희지만 그렇겠는가? 다른 많은 청소년들도 직업을 꿈으로 말한다. 그들 탓은 아니다. 우리는 아주 어려서부터 “무엇이 되고 싶어?” 라는 질문을 예기치 않게 마주해야했고, 그때마다 그럴듯한 직업으로 답해야만 할 것 같은 기대가 있었다. 고3때 나는 “네 꿈은 무엇이냐?”는 학년부장 선생님의 기습질문에 “제 꿈은! 정론직필! 공명정대한! 기자! 입니다!” 라고 말했다. 사실 스스로도 그다지 납득은 가지 않았으나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무튼 꿈에 대해 직업으로 대답하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갔고, ‘꿈=그럴듯한 직업’이라는 사고는 충실히 계승되고 있다. 어른이 된 우리는 여전히 꿈을 ‘직업’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는 더나은 직업으로서의 꿈을 찾아 방황한다.
나는 제법 오랜 시간동안 친구들과 작은 교육회사를 했었다. 학생들과 진로 상담을 하다보면, 진로 고민에 대한 대답은 보통 이 세 가지 중 하나로 귀결됐다. 1) "제 꿈은 (어떤 직업)이/가 되는 것이에요!” 2)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요” 3) “나는 꿈이 없어요." 대충 이런 식이다. 이때 '꿈'은 '하고 싶은 무엇', 보다 '어떤 직업'과 같은 선상에 놓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로 직업으로서) 꿈을 가진다는 것은 뚜렷한 방향이 있는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길을 잃은 것 같다. 무엇이 될 지 모르고 꿈을 찾지 못한 지금의 자신은 불안하고, 불행한 것이며, 꿈이라는 것을 찾으면 불안하지 않고, 행복해질 것도 같다. 그 꿈은 철저히 직업! 직업! 직업이다! 확실함이 선호되는 시대이기 때문일까? 우리는 계속 ‘꿈을 직업으로 단순화’시키고는, 그 직업이 되었을 때 일어날 좋은 결과만을 계속 상상한다. ”기자가 되면, 판사가 되면, 어떤 직업이 되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어요!” 그럴리는 없겠다.
어떤 직업이 된 뒤에 나의 모습은 막연하지만, 왠지 좋을 것만 같다. 우리는 보통 이 지점에서 상상을 멈춘다. 충분히 알아보려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검색창에 해당 직업을 검색하고 좋은 내용만을 취사 선택 수집하고 다시 행복회로를 돌린다. 그 행복을 좀 더 구체화해봐야 많은 돈, 사랑, 쾌락, 인정 등으로 여전히 막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 직업을 가져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현실의 그 직업이 어떤 모습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직업을 낭만화하면 우리는 계속 꿈이 있다 말할 수 있다. 대외적인 명분 역할은 해낸 것이다. 그러나 고3 때 내가 그랬듯, 그 꿈은 ‘꿈 속에서나 있는’ 꿈이다. 존재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은 공허하다. 그러한 꿈은 언젠가 기대에 대한 좌절을 필연적으로 야기한다. 현실은 ‘꿈 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직업이 이상적인 상태를 만들어주며, 그럼으로써 행복하기만 한 그런 꿈은 세상에 없다. 찾았다면 알려달라. 세상 사람들이 절실히 원하고 있다. 꿈을 직업으로 생각하고 이를 낭만화, 이상화할 때 2가지 측면에서 삶에 해로울 수 있다.
1. 오늘의 나태함을 정당화한다.
꿈을 찾지 못했다는 말은, 또 여전히 모르겠다는 말은 좌절과 일상 속 나태를 정당화하기에 참 매력적 명분을 제공한다. 나는 꿈이 없으니까 공부 안해도 괜찮아!(과거 제 얘기입니다.) 돈을 벌지 않아도 괜찮아!(옛날 제 친구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방황중이니까. 나는 잘 모르니까. 그리고는 나태함에 안주한다.
이 부류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면 어떠할까? 그들은 그것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도 잘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되는 것의 어려움’을 강조한다. 하지만 정말 ‘유명’ 뮤지션이 되고 싶다면, 꾸준히 작사든 작곡이든 연습이든 무어든 해야한다. 정말 변호사가 되고 싶다면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해야한다. 자신이 원하는 무엇이 되려면 온몸으로 절실히 시간의 밀도를 높여야한다. 그러고도 ‘크고 멋진 꿈’일수록 운이 닿아야 겨우 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부류의 하나의 꿈이 지나가면 다시 이상향을 하나 만들어서 그것을 이상향 꿈으로 설정하고는 지금 자신은 그렇지 못하니 괴롭다고 말한다. (뭐 어쩌라고..) 어쩌면 우리는 마음 속에 <직업으로서의 꿈> 세트장을 하나 세워놓고 현실에서는 해낼 생각은 없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 과정은 피곤하고 지난하며 외로운 탓이다.
2. 정작 그 직업을 가진 뒤에도 행복하지 않다.
열심히 노력을 해서, 내가 그려왔던 직업을 가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많은 경우에서 그 직업을 가져도 인생은 여전히 힘들고, 여전히 괴롭다. 상상했던 돈, 인정, 사랑은 내가 기대했던 만큼에 미치지 못한다.(직업이 주는 안정과 무관하지 않으나, 직업과 직접 관련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무언가 부족하다. 버티다 그제서야 스스로에 묻는다. “내가 정말로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는 심한 경우, 끝내는 그 직업을 그만두고 다시 방황한다. 사실 이 경우는 꽤나 잘한 것이다. 그래도 그는 해봤으니까. 최소한 무엇이 자신에게 안맞는지는 알 수 있다. 또 그 과정에서 배운 능력과 스스로가 해낼 수 있다는 자긍심은 새로운 무엇을 위한 좋은 원동력이 된다.
너무 멀리와서 돌이키기 어려운 정도의 선택이었다면? 여전히 꽤 괜찮다. 인생은 길다. 젊음이 짧고 도전할 기회가 무한하지 않을 뿐이다. 잘 맞는 것을 찾으려면 시행착오는 필요하다. 기왕 찾을 거 더 쉽게 더 빠르게 덜 고생하고 찾으면 좋겠다. 그러나 직업만 바꾸어서는 아마도 '행복'을 위한 꿈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직업은 인생의 지극히 일부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직업으로 꿈을 바라보면, 우리는 바라는 것을 충분히 조망하지 못하는 오류에 빠진다. 그러니 직업으로만 꿈을 바라보지도 말하지도 말아야 한다. 직업만으로는 꿈을 설명하기에 무언가 부족하다. 우리는 나머지 부분을 봐야한다. 그렇다면 꿈은 도대체 무엇일까?
네이버 국어 사전에서 꿈을 찾으면 꿈은 다음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1. 잠자는 동안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고 듣는 정신 현상.
2.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
3.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1번의 꿈이라면 잠을 자면 꾼다. 잘하고 있다. 2번 꿈은 우리는 역시 평소에도 너무나 잘하고 있다. '헛된'이 방점이다. 3번 꿈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평화를 말해야만 할 것 같다. 비록 그것이 가치있다 할지어도 우리의 일상과는 너무나 먼 이야기 같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꿈을 찾아야만 한다고 배워왔는데, 정작 꿈에 대한 정의들은 대단히 모호하고 막연하게 말한다. 입시 학원이나 학교에서 말하는 꿈은 좋은 대학으로의 진학이나 좋은 직업을 얻는 과정과 결과를 대충 퉁치는 말같다.
이쯤되면 꿈을 찾지 말라고 일부러 숨겨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어쩌면 도교의 ‘도’道같기도 하다. ‘도’를 ‘도’라 이름 붙이고 말할 수는 있지만 문자 ‘도道’가 말하는 도는 실제 ‘도’의 의미는 아니다. 꿈도 비슷한 것일까? 분명히 존재하나 단어만으로는 그 의미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떠한 인간도 꿈이 무엇인지 또렷한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다. 꿈이 무엇인지 정해진 답은 없는 탓이요, ‘꿈이 직업이 아니라면’ 무엇이 꿈인지 잘 논의된 적도 합의된 적도 잘 없는 탓이다. 사실 우리는 꿈이 궁금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상상할 수 있어야 하기에 현실을 알아서는 안된다. 단지 그것은 지금의 상태보다 좋아야하며, 나는 그것을 계속 꾸어야한다. 그렇게 현실에서 꿈은 몰핀이 되어간다. 현실은 바뀐 것이 없다.
그래도 ‘꿈’이라는 단어가 있기에, ‘인간이 살면서 갈망하는 무엇인가’라는 개념을 우리는 보편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꿈이 무엇인가를 서로 논박하고 생각을 나누는 과정에서 각자가 그리는 꿈을 발견하는 의외의 수확도 있을 것 같다는 희망도 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진리’ 같은 것이다. 진리는 아마도 존재할 것이지만,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고 탐구할 수 있을 뿐 진리를 정말 설명가능할 정도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과정은 의미가 있다. 진리에 대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을 때보다 진리를 더 잘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리하여 꿈에 대한 개인적인 정의를 나누어보고 싶다.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다. 동의하지 않는 그 이유가 있다면 그 지점이 당신의 ‘꿈’을 발견하는 지점일 수 있다. 과문한 내가 생각하기에 꿈이란 다음과 같다.
1. 삶에서 대강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며,
2. 스스로가 재구성한 삶의 방식이며,
3. 선택의 기준이다.
이러한 꿈이 주는 유용하고 멋진 점은 <끝내 내가 아닌 것이 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원래 내가 남쪽 어떤 섬으로 가는 것이 알맞은 사람이었다면, 좋은 꿈은 적어도 나를 북쪽 바다로는 보내지 않는다. 알고보니 내가 펭귄으로 태어났는데 계속 날려고 하면 수영할 때보다 더 고생하고 돌아가게 된다. 물고기로 태어났는데 나무를 오르려하면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한자성어가 있듯 기특하고 대단한 일이나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꿈은 명백히 삶이 ‘덜 돌아가게 한다.’
그런데 자신이 펭귄인지 물고기인지, 코끼리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솔직히 내면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남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만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 탁월한 멘토를 만나면 좋겠지만 약간의 ‘지름길’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계속 무언가를 시도해보고 그때 내 마음의 상태를 점검해봐야한다. 자신에게 맞는 삶으로 살수록, 꿈이라는 마음 속 나침반은 강하게 공명한다. 그리고 꿈을 찾으려는 시도는 작은 것일 수도 삶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전략적인 결정일 수도 있다.
물론 남을 참고해보는 것도 좋다. 자신과 닮은 다른 사람의 삶의 궤적, 삶의 방식, 선택의 기준을 자신에 맞게 적용해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절대 잊지말아야 할 것이 있다. 개별 인간들은 성격과 적성, 재능이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인간은 비슷할 수 있어도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각 개인은 누군가를 ‘똑같이’ 추종하는 것으로 행복할 수 없다. 꿈을 찾는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 발견을 의미한다. 자신의 ‘맞춤옷’을 스스로 지어입지 않으면 꼭 맞는 옷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적절한 ‘기성복’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수 많은 옷들(삶의 방향, 삶의 방식, 선택의 기준 등)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기성복만 찾았어도 그런대로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어떤 인간이 끝내 자신에게 꼭 맞는 옷을 지어입는데 성공했다면, 또 그 옷이 너무나 잘 어울리고 스스로도 그 옷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행복한 삶이요, 진정으로 성공한 삶이다. 결국 꿈의 실현이란 주관적인 요소가 있다.
그래서 당신은 물을 것이다. 너의 꿈은 뭔데?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말하고 쓰고 노래하는 일로 자기 표현을 할 수 있고,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으면 좋겠고요. 그 길에서 성공하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그렇게 안될 수도 있지만 괜찮습니다. 곤궁하지 않고 계속 그 길에서 부단히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다면 나는 살아있다고 느낄 것 같습니다. 내 꿈은 결과만큼이나 과정이 중요합니다.” 또한 나는 제법 현실적이기에 꿈을 찾고 실현하는 과정에서도 곤궁하지는 않을 것을 믿는다.
엄마가 말씀하시길, 내가 아주 어릴 때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택시 기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유는 ‘어디에나 갈 수 있어서’(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는 택시 기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길 바랐었다. 생각해보면 지금도 그렇다. 나는 날 때부터 유독 자유롭고 싶은 개인이었다. 직업은 무엇이든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직업도 중요하다. 직업이 삶에서 일종의 수단이고, 꿈을 담는 그릇이라면 가장 적절한 수단과 그릇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삶에는 딱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간은 그저 태어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기왕이면 행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볼 따름이다. 무엇이 좋은지는 해봐야 알 것이다. 물론 내가 가진 능력과 자원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는 좀처럼 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꼭 해야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그것을 할 것이다. 꿈이라는 나침반이 강하게 공명하는 방향이라면, 그 순간 나는 그것을 시도할 것이다. 하고 싶지 않은 것도 경험해보고 열심히 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내가 아니게 되는 경험’을 함으로써 인간은 진정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있다. 늦은 나이 입대한 나는 훈련소에서 틈틈이 무언가를 쓰는 자신을 발견했다. 광장과 거리 집회 현장에서 무표정의 관찰자일 때, 기대마(경찰기동버스)에서 틈틈이 편지와 일기를 쓰는 나를 보게 됐다. 자유로울때는 몰랐던 나를, 자유가 제약된 곳에서야 알게됐다. 나는 말하고 쓸 때 즐거운 사람이었다. 고난 속에서도 노래를 할 때 노래는 나를 위로했다. 나는 알았다. 나는 노래를 해야 행복한 사람인 것을. 그리하여 지금 나는 알고 있다. 나의 꿈이 무엇인지를. 대강은.
꿈을 찾고 꿈을 실현하려는 나는 행복하다. 그 길 위에서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을 희망하고 다짐한다.
아
꿈을 찾기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