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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철 Mar 11. 2020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란 어렵다

탄핵 3주년, 기동대원으로 맞이했던 그 날과 내가 본 것들.

얼마 전 출간한 책  <제대로 살기란 어렵다>의 마지막 원고입니다. 

탄핵 후 3년, 코로나 시국으로 혼란한 요즘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과 이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날의 광장과 거리에서 나는 어디쯤에 서 있었을까 

2017년 3월 10일. 나는 몇 시간이나 잠들었던가. 나와 대원들이 깨어난 시간은 동이 트기 이전 깜깜한 새벽이다. 분주히 준비하는 대원들의 표정에서 긴장감이 느껴진다.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몇 번이고 향했던 광장이지만, 오늘은 왠지 다르다. 내가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던 종류의 긴장감이 기동본부를 감싸고 있다. 광화문광장으로 향하는 기동버스 안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농담하는 사람 하나, 장난치는 사람 하나 없다. 기동본부를 떠난 버스는 금방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에는 먼저 도착한 수많은 기동버스, 형광 조끼를 입은 경찰들이 보였다. 무전기에서는 상황을 점검하는 건조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적막한 새벽이 지나 아침놀이 졌다. 광장에서부터 안국 사거리까지 시민들과 기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저 건너편 헌법재판소 앞 안국역부터 종로 2가 사이에도 또 다른 한 무리의 시민들이 모여 있다고 한다. 경찰은 이들이 서로 마주치지 못하도록 서로 만날 수 있는 모든 길목을 차벽으로, 기동대 경력警力으로 막았다. 오늘 경 찰은 최고 경비태세인 갑호비상 명령을 내렸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여부가 결정되는 날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오전 열한 시경 이정미 재판관이 결정문을 낭독하기 시작하자 고요 속에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마침 이때 우리 분대는 교대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밥이 넘어가는지 마는지 긴장 속에 숨을 죽이며 한 문장 한 문장에 집중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이윽고 수많은 시민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곧이어 무전기에서 명령이 하달됐다. “1소대는 천도교회관 맞은편 골목길 사이사이마다 배치. 길목에 들어오는 차들 막아.”(사실 무전상 모든 대화는 경찰 음어를 사용한다.) 교통기동대인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집회 현장에 들어오는 차를 막는 역할을 한다. 큰 집회가 있으면 도로 위에서 교통 통제를 하고, 골목 사이마다 배치되어 원활한 집회 운영을 돕는다. 때문에 진압 장비를 일절 착용하지 않는다. 천도교회관으로 가려면 이른바 ‘태극기’들이 있는 안국역을 지나야 한다. 과연 어떤 상황일까. 


우리 분대는 따로 동십자 앞에서 모여 안국역 방향으로 향했다. 대로에 구름처럼 모여든 시민들을 보았다. 그들은 서로를 얼싸안으며 환호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고 어떤 이의 표정에서는 환희마저 느껴졌다. 깃발을 흔드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만세를 외치는 사람. 그들을 지나 안국역에 도착하자 차벽이 보였다. 우리는 'ㄴ'자로 둘러쳐진 차벽을 지나야 했다. 차벽이 어찌나 촘촘한지 사람이 지날 만한 작은 틈조차 없었다. 하지만 나의 선임은 경험이 많은지라 틈을 찾아냈다. 차벽 끝 모서리에 사람이 넘어갈 만한 높이의 낮은 담이 있었고 그 위는 간부급으로 보이는 경찰관이 지키고 있었다. “너희는 뭐야?” “53중대입니다. 집회 중 골목길 관리 근무 수행으로 여기를 넘어가야 합니다.” 


낮은 담 위에 올라서니 'ㄴ'자 차벽 앞 뒤로 기동대 경력이 보였다. 3 기동단과 다른 수많은 기동중대들이었다. 차벽 건너편은 태극기를 든 시민들의 물결로 가득했고 저 너머 단상에서는 사회자가 소리를 찢으며 절규하고 있었다. 노인들이 땅에 주저앉아 울부짖었 다. 저곳에는 수 만의 끓어오르는 분노가 있다. 정말 지나가도 괜찮은 것일까? 차벽을 지나 우리는 집회 참가자들 무리 끝을 따라 천도교회관 쪽으로 걸어갔다. 안국역 앞부터 천도교회관까지 광화문 쪽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 사이사이에는 여지없이 긴장한 표정의 기동중대원들이 보였다. 일부 집회 참가자들은 방패를 든 경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리는 분노한 이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그리고 무표정으로 그 사이를 지났지만, 격앙된 그들 사이를 걷는 일은 공포스러웠다. 어떤 집회 참가자들은 우리를 향해 손 찌검을 하며 욕을 해댔다. “○○○들! 너희도 다 한통속이야.”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곳을 가득 메운 무리 대다수의 관심은 저 너머 헌 법재판소에 있었다. 우리가 천도교회관 근처 사회자 단상에 가까 워졌을 무렵, 내내 소리를 찢던 사회자가 소리쳤다. 


돌격! 돌격! 돌 격! 저 썩어빠진 헌재로 애국 시민 여러분 진격합시다! 
차벽을 향해 몰려들고 있던 시민들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지금 여기, 분노한 수많은 군중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소대도 아닌 일개 분대 단위 몇 명으로 쪼개진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눈에 띄는 형광 점퍼를 입은 우리가, 방패 하나 없이 고작 플라스틱 경광봉과 호루라기를 든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명령을 받았다. 대단한 명령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냥 돌아설 수는 없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수십만이 모이는 집회를 마주하며 명령을 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정당한 명령을 거부하면 우리는 공적 제재를 받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더 격앙되어갔다. 차벽을 향해 몰려가는 군복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는 두려움을 뒤로하고 하나 둘 셋 씩 흩어져서, 천도교회관 맞은편 골목길들로 향했다. 그때 어떤 일 때문인지 무리가 있는 곳으로 구급차가 진입하려 하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우리는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경광봉을 들었다.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 순간 가슴팍이 아린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한다고! 우리가!” 태극기를 매단 봉으로 나를 후려친 사내의 흥분한 일성이었다. 약간 얼얼했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혼란한 상황에서의 긴장과 두려움 때문인 걸까. 그렇게 그들에게 구급차 진입을 맡긴 채로 나와 짝을 이룬 선임은 경운학교 골목에 들어섰다. 골목길에 들어서고 잠시 뒤, 저 멀리서 ‘형사’라 적힌 검은 조끼를 입은 경찰들이 어떤 군복 입은 사내를 연행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군복을 입은 한 무리가 형사들을 쫓아왔다. 그들 모두가 우리 앞을 지나가고 나서, 나도 모르게 선임에게 한마 디를 내뱉었다. “왜 검거된 겁니까?” 그 말을 ‘잡혀가서 잘됐다’로 잘못 들은 한 노인이 분노하며 나를 위협했다. 나는 노인에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한참을 해명하고 그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다소 차분해진 후에도 그는 훈계를 계속했다. “우리는 애국하려고... 모인 거야 애국하려고.” 울분 섞인 노인의 말은 진심이었다. 


계속 이곳에 있기에 상황은 너무나 위험했다. 곧 우리는 무전으로 급박한 상황을 전하고 이곳을 떠나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내 혼란한 현장에서 다시 분대가 모였다. 우리는 조심스레 그곳을 빠져나갔다. 나는 한동안 얼빠진 기분이었다. 이 날 이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며칠이 지나 그날 내가 있던 현장을 다룬 뉴스를 보았다. 집회 참가자에 의해 탈취된 경찰버스가 차벽을 들이받았고, 그로 인한 2차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뉴스는 건조하게 현장에서 몇 명의 사망자,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그날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로부터 무엇을 느낀 것 일까? 폭력에 대한 두려움? 개인의 무력함? 말과 글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무엇, 그리고 ‘위태로움’. 그것은 분열한 공동체와 앞으로 남은 과제들에 대한 인상이었다. 


끝내 세상은 앞으로 나아간다고 믿는다. 하지만 변곡점을 지나 서도 모든 문제들이 없던 일처럼 사라지지는 않는다. 한 시대에는 여전히 이전 시대의 사람과 사고들도 남아 있다. 그것들을 모두 간편하게 악마 화해서는 안 된다. ‘태극기 행진’ 중 추위 속에서 내게 빵과 두유를 쥐여주던 한 노부부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칼바람이 부는 날 불편한 걸음으로 그들은 대로 위를 걸었다. 나의 할머니 할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당신들은 어디에 서 계셨을까. 격앙된 헌재 앞 그들은 우리 사회 속 평범한 시민이기도 했다. 오히려 묻고 싶은 것은 시민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다. 


우리 시민들은 국가를, 서로를 믿을 수 없다 

촛불 정국, 매주 토요일 전국에서 수십만, 수백만이 모이니 경찰은 눈치를 보는 듯했다. 매주 게시판에 붙는 청장의 말에는 ‘엄정중립’을 강조하는 지시사항이 적혀 있었다. 우리도 매주 집회에 나설 때마다 엄정중립을 교육받았다. 어떤 글귀나 구호에 동조하거나 반대하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됐다. 새로 부임한 다른 소대 소대장은 점호시간에 시민들은 우리를 볼 때 ‘국가’를 본다고 했다. 여러분은 국가니까 국가답게 시민을 대하라고 강조했다. 그래 나는 국가다. 제복을 입은 나는 국가다. 광장의 시민을 지키는 국가다. 



어떤 날은 미국 대사관 앞 횡단보도에 서서 근무를 했다. 맞은편 전광판을 실은 차에서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부른〈네버엔딩 스토리>의 뮤직 비디오가 재생되고 있었다. 횡단보도 신호가 두 번쯤 바뀌었을 때 나는 맞은편 전광판을 계속 볼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났다. 지금 나는 국가다. 시민들은 제복을 입은 나를 통해 국가를 본다. 웃거나 울어서는 안 된다. 무엇에 동조해서도 반대해서도 안된다. 영상을 보지 않으려 모자를 눌러쓰고 고개를 숙였다. 듣지 않으려 괜히 호루라기를 크게 불었다. 눈물을 흘리는 시민들이 보였다. 나는 그 순간 그저 한 사람의 시민이고 싶었다. 그러나 경찰 제복을 입은 지금 나는 시민에게 국가. 오래도록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시민을 지켜야 하는 국가. 시민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없는 국가였다. 



2017년 3월 10일 대통령 탄핵의 시작은 아마도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사건, 보다 정확히는 그에 대한 정부의 대처였을 것이 다. 그날 우리는 세월호 승객이 전원 구조되었다는 속보에 안도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백 명의 청소년과 시민들이 여전히 바닷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저렇게 큰 배가 갑작스레 침몰하는 것이 가능한가? 마음이 무거웠고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시간이 지나 세월호 사건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정도로 되어갔다. 어떤 이는 “지겹다”라고, 어떤 이는 “세월호에는 단원고 학생들 말고 일반 시민들도 있었다”고 말했고, 어떤 정치인은 “교통사고”일 따름이라고 말했다. 또 어떤 이는 세월호 말고 “천안함은 기억하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이 말들이 참 이상했다. (사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다수가 천안함 생존자들의 삶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편견이 있다.) 재난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시민들에 대한 추모와 국가와 공동체를 지키다 순국한 군인들에 대한 추모가 대립되는 가치일까? 세월호에서도 천안함에서도 결국 죽지 않아도 됐을, 다치지 않아도 됐을 평범한 개인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들은 모두 한 시민이자 누군가의 가족이었다. 국가는 그들의 죽음과 남겨진 이들의 삶에 책임이 있다. 


하지만 국가는 개인의 죽음에 무책임한 것처럼 보였다. 희생에는 추모와 애도를, 헌신에는 충분한 보상과 감사를 표해야 함에도, 국가는 ‘세월호’를 언급하는 이들을 ‘탐욕적인 이들’, ‘통합을 저해하는 비국민’으로 몰아 구성원 간 분열을 획책하거나 방조했다. 그런데 세월호도 천안함도 처음이 아니었다. 그전에는 삼풍백화점, 성수대교가 있었고, 서해 페리호가 있었다. 군대에서 무수한 청춘들이 죽어갔고, 지금도 갓 교복을 벗은 어린 청년들이 구의역에서 화력발전소에서 죽어간다. 어떤 이들은 삶이 고단한 탓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죽지 않아도 됐을 사람들이 죽어간다. 다치고 살 아남은 이들은 망각을 강요당한 채 버티며 견디며 살아간다. 자랑스러운 조국은 어디에 있었는가? 지난 수십 년간 국가는 개인의 희생과 피해에 충분히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여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회는 다시 돌아가고, 애써 덧칠해보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깊이 새겨져 있다. ‘아 국가와 사회는 개인을 위하 지 않는구나. 모든 것이 내 책임이 되는구나.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지 말자. 헌신하지 말자. 관련될 듯하면 도망가자.’ 



사실 국가는 ‘개인들은 각자도생 하라’는 시그널을 줄곧 보내왔다. 국가는 말로는 숭고한 헌신을 외쳤지만, 보상은 고사하고 개 인의 생명을 지키지도 못했다. 이 상황에서 누가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겠는가? 물론 이러한 현실이 단순히 국가만 의 책임은 아니다. 공동체, 사회, 국가는 개인들로 이루어졌고, 우리 시민들이 이러한 사회를 스스로 만들어왔다. 하지만 국가의 책임을 보다 엄격히 따져 묻는 까닭은 이 사회가 민주화되고 정상 국가로 나아가게 된 지 오래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민주화도 독재와 국가폭력에 저항한 개인들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었 다. 슬프게도 형식적 민주화를 이룩한 이후에도 개인들의 ‘각자도생 사고’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비용보다 생명을 경시하고, 사람들이 죽어가도록 방치하고 있다. 각자도생 제일의 사고는 피해를 입을지도 모를 개인 스스로를 위태롭게 한다. 그런 개인들이 사회를 이루기에 사회는 더 지옥이 된다. 개인들은 ‘나만 아니면 된다’ 고 생각하지만 불행이 나만 피해 갈 리 만무하다. 위험사회 속 개인들은 불행을 마주할 확률이 높아진다. 


근래 내가 가장 큰 충격을 느낀 사건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었다. 게으른 나는 건조해도 굳이 가습기를 켜지 않고 그냥 잔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세균으로부터 내 가족을 지키려고 가습기 살균제를 쓴 사람들이 있었을 테고, 군부대에서 사용된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된 장병들이 있었을 것이다. 가습기를 틀었다는 이유로 평생 폐병을 앓게 된 아이가 있고, 죽은 사람이 있다. 피해자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나 역시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 가습기를 켜지 않는 게으름 덕에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환절기에 꼼꼼히 건강을 챙기는 어떤 개인은 피해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이 사건이 비단 국가만의 책임일까? 제조 기업들은 제품의 독성이 적은 것처럼 나오도록 연구용역을 발주했고, 연구자들은 기꺼이 그렇게 결과를 조작했다. 그들은 돈 몇 푼에 양심을 팔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곧 힘이라면, 그들은 각자도생을 위해 힘을 따랐고 양심을 저버렸다. 신념도 윤리도 책임감도 없는 한심한 개인과 기업들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믿을 수 없다. 국가도 기업도 사회 내 구성원도 믿을 수 없다. 리에게는 우리가 만든 시스템과 이를 구성하는 사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다. 힘을 따르면 돈이 나오고, 원칙과 양심을 따르면 손해를 보는 경우를 계속 봐왔다. 심지어는 목숨마저 위태로워진다. 그러니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우리는 ‘자력구제’하고 ‘각 자도생’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끽해야 우리는 학연, 지연, 혈연 등 좁은 공동체에 기대어 살고 있을 따름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을 들은 청소년들은 세월호에서 나오지 못했다. 정작 세월호 선장은 먼저 달아났고, 대구 지하철참사 때도 기관사는 마스터키를 뽑고 탈출하고 없었다. 그들은 진정 직업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제 목숨만을 살렸다. 이렇게 국가와 사회, 공동체 전반에서 크고 작은 기대의 배반이 누적되어 왔다. 그러한 탓에 세계적으로도 잘사는 나라(국내총생산은 세계 11 위 수준이며 국민소득은 3만 달러가 넘는다)에 속하게 된 한국은 그 경 제력에 비해 턱없이 형편없는 저신뢰사회를 이루고 있다. 우리가 겪는 가장 큰 문제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서로를 믿어야만 한다 


우리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의 대가는 생각보다 비싸다. 단지 안전문제가 발생할 뿐 아니라 실제로 시간과 비용이 더 소모된다는 것이다. 무단횡단이 많은 도로에서는 차들이 빠르게 달리지 못 한다. 불안한 치안환경에서는 개인의 일상 활동들이 위축된다. 거래와 계약에서 상대를 믿을 수 없다면,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불필 요한 안전장치가 추가로 필요해진다. 때문에 거래비용도 상승한다. (중고차 시장을 생각해보자.) 한편 실패하면 끝장이라는 불안은 혁신을 저해하고, 경쟁 세력에게 지면 상대가 나를 절멸시킬지 모른다는 공포는 지지 않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게 만든다.(정치와 교섭, 분배의 과정에서 주로 그렇다.) 또한 사회에서 각각의 기능을 하는 조 직과 개인이 주어진 일을 제대로 일하지 않는다면, 전문성도 없는 다른 조직이나 개인이 그만큼의 추가적인 일을 해야 한다.(군대와 여러 협력 과제에서 당신은 어떠했는가.) 사회가 정한 여러 규칙을 따르지 않으니 그로 인한 부수적 피해들이 누적된다.(환경과 안전에서 주로 그러하다.) 즉 개인들이 서로를, 국가를, 기업을 그 밖의 구성원을 믿지 못하게 되면, 경제 효율이 저하되고 불필요한 자원이 낭비되며 개인은 더 위험에 노출된다. 총체적 저신뢰사회. 우리는 그 속에서 투쟁하듯 살아가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세상을 넘어서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사회적 자본’의 형성과 축적이다. 사회적 자본은 좁게 보자면 제도와 약속에 대한 구성원 간 신뢰와 준수이고, 넓게 보자면 그로 인해 창출될 수 있는 긍정적 기대효과 전반이라 생각한다. 사회적 자본도 명백히 실체가 있는 여타 자본과 같다. ‘자본’을 “생산의 재료가 되거나 그것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생산성 향상을 유발하는 유무형의 모든 것”이라 정의내리자면, 우리는 경제력에 비해 사회적 ‘자본’이 모자라고 그로 인해 값비싼 대가를 치 르고 있다. 


사회적 자본의 형성은 지금 우리에게 경제규모의 성장 추구보다도 절실히 요구된다. 냉정히 말해 이미 충분히 성장한 한국 경제는 더 이상 고성장이 어렵다. 기존 성장공식을 따를 때는 더욱 그렇다. 지금까지 우리는 양적 경제성장 추구에 많은 노력을 쏟았다. 경제 규모 성장에 쏟은 노력이 90점이라면, 이를 95점 이상으로 만들려 는 노력보다 50점 이하 수준인 사회적 자본 축적에 힘쓰는 것이 사 회,경제,공동체의추가적이며균형잡힌발전을이루는데 더 기여할 것이다. 이는 상식의 문제다.(2019년 영국 싱크탱크 레가툼 연구 소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적 자본은 167개국 중 142위다. 반면 우리의 경제 규모는 세계 11위다.) 


이미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오래 공부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투쟁하듯 경쟁했다. 그 덕에 우리는 능력적으로는 탁월한 개인들이 되었지만 상호 협력에 대한 관심은 미미했다. 탁월한 개별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생산성은 작지 않지만, 탁월한 개별 인간들이 모여 협력하면 그 생산성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신뢰에 기반한 협력과 제도의 준수는 생산성을 높이고 구성원의 안 정감을 높인다. 그런 사회는 경제규모가 비슷한 국가보다 ‘더 살만 한 사회’일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 자본의 힘이다. 


''미세먼지 농도 17의 서울 풍경'' - 2015, f11, 1/100, iso100 , 디지털프린트, 김진호 <서울사랑 17.3월호에서 발췌>


게다가 사회적 자본은 다른 자본과는 다르게 빠른 이동이 거의 불가능하다. 어디 있는 시설을 뜯어내서 그대로 옮기듯 쉽게 이전 되지 않는다. 사회적 자본의 일환인 제도와 신뢰는 그것이 형성된 사회에서만 제대로 기능하는 고유한 특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어떤 사회의 사회적 자본은 지나온 과거로부터 축적된 ‘경로의존성’과 복잡하게 연결된 ‘사회적 복잡성’의 최적 함수 값이기 때문이다. 즉 모방이 대단히 어렵다. 같은 이유로 우리가 백날 선진국의 노하우 를 배우자 따라잡자 외쳐보아야 그저 ‘참고’할 의미만 있는 이유이 기도 하다. 무수히 많은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지금은 해체된 한진 해운은 파산 몇 년전 필리핀에 2조원 을 들여 ‘수빅 조선소’를 지었다. 한국에서의 높은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현지에서도 직접고용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제조업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해야 하는 일이었다. 똑같은 설비를 한국에서는 돌릴 수 있었는데, 필리핀에서는 제대로 돌릴 수 없었다. 한국은 수십 년 동안 큰 배를 만들어왔고 필리핀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 조원을 투입한 수빅 조선소의 생산성은 바닥을 쳤다. 때마침 이어진 조선업 불경기에 한진해운은 40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람 귀한 줄 몰랐다. 사람값이 싸서 함부로 대했고 대체 가능한 부속처럼 여겼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사회 곳곳에서 개인은 그렇게 살았다. 개인으로 살기도 각박해서 서로를 위할 여유가 없었다. 그럴수록 우리 사회는 어딘가에 돈은 쌓였을 테지만 지옥이 되어갔다. 살기 어려운 개인들이 고난을 대물림하기를 꺼린 탓에 출생률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선진국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 자조하는 개인들도 많아졌다. 


나는 그다지 탁월한 개인이 아니다. 나는 일론 머스크나 빌 게이츠가 아니다. 냉정히 말해 개인 문희철의 사회적 성공은 비명횡사 확률만큼 낮다. 이것은 패배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다. 때문에 나의 삶에 대한 태도는 ‘망하지 않는 것’이며, 능력 증진에 집착해 지 나는 삶의 풍경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사회 대다수를 차지할 나같이 평범한 개인에게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기 좋은 안전한 나라가 좋을 것이다. 평범한 개인에게도 살 만한 기회가 있고, 의자가 없을 때 적어도 앉을 만한 깔개는 주어지는 사회 말이다. 우리 사회가 약자에게, 평범한 사람에게, 서로에게 따뜻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자면 서로 믿을 수 있어야겠고, 나부터 사회 구성 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것이다. 그것이 결국엔 평범한 나를 위한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힘이 아니라 양심을 따를 때, 두려움을 조금만 더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갈 때, 더 나은 세상은 조금씩 우리 곁에 오기 시작한다. 비단 국가와 우리 사회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더 넓은 세상 역시 나아간다는 믿음이다. 우리 개인들이 끝내 해낼 수 있다 는 믿음이다. 그것이 광장과 거리가 내게 남긴 무엇이다. 


우리는 여전히 길 위에 서 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난 한 번쯤은 저 산을 넘고 싶었어
그 위에 서면 모든게 보일 줄 알았었지
하지만 난 별다른 이유 없어 그저 걷고 있는 거지

해는 이제 곧 저물 테고
꽃다발 가득한 세상의 환상도 오래 전 버렸으니
또 가끔씩은 굴러 떨어지기도 하겠지만
중요한 건 난 아직 이렇게 걷고 있어

- 신해철, 그저 걷고 있는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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