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희철 Aug 26. 2020

천하제패의 조건 -2

역사를 넘어 경영과 삶의 성패를 가르는 원칙들이다.

가장 유능한 사람들의 대립에서도 승패는 있다. 누군가는 지고 누군가는 이긴다. 누군가는 천수를 누리고 누군가는 죽는다. 2천년에 걸친 대표적인 전쟁과 대립에서 언제나 승자와 패자는 있었다. 그리고 천하제패는 양상은 다르지만 승자에게는 나름대로 어떤 공통점들이 있다.


https://brunch.co.kr/@moonlover/126

전편에서 제시한 천하제패의 조건 7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최후의 승자는 누가될지 당대에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2. 잔인한 자는 천하를 잠시 점유할 뿐 결코 통치할 수 없다.
3. 핵심 가신의 배신은 치명적이다.
4. 언제나 빠른 정보습득이, 승부를 거는 결정에는 과단성이 중요하다.
5. 때로는 직접 대적하기보다 간계가 더 강력하다.
6. 기세도 모욕도 일시적이다. 살아남아 버텨라.
7. 상대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결론. 언제나 자신을 지킬 최소 세력과 결기를 유지하고, 통합을 준비하라.


5. 때로는 직접 대적하기보다 간계가 더 강력하다.

(명-청 전쟁)

어서와 30년 넘게 노는 황제는 처음이지?(벌써 눈풀림)

1592년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킬 즈음 명나라의 황제는 손꼽히는 암군 만력제였다. 만력제는 중국 역사에서도 역대급 망한 황제인데, 무려 30년을 넘게 업무를 거부하고 사치를 일삼으며 놀았다. 진나라를 망하게 한 황제 호해도 그렇고 황제가 놀기를 좋아하고 측근에게 권력을 대리하면 나라가 망한다. 결정권자는 머리를 빌려올 수는 있으나 결국 결정은 자신이 내려야 한다. 그것이 권력이 국가를 경영하는 방식이다.


만력제 1592-1600년 연간 명나라는 3개의 큰 전쟁을 치뤄야만 했다.

1) 몽골 인근에서 반란이 일어났고(전비 180만냥 증발)

2) 중경에서 반란이 일어났고(전비 200만냥 증발)

3) 조선에서 일본과의 7년 전쟁을 치뤘다. (780만냥 증발)

그래도 직접 일은 안해도 아웃소싱은 탁월했는지 국방 분야에서 등용한 장수들은 대체로 정상이었다. 이 3대 전쟁에서 다 이기기는 했다.


한편 1616년 요동 지역에서는 여진족을 누르하치가 통합하여 '후금'을 건국한다. 후금의 군대는 오합지졸의 부족 단위 사병이 아니었다. 누르하치의 '만주'는 여진을 통합했고, 일사분란한 팔기군 체제를 갖췄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편으로 조선까지 참여했던 사르후 전투 대승 이후에는 후금은 수비가 아닌 공세로 전환한다. 요동 지역은 사실상 후금의 손아귀로 떨어졌고, 군벌 수준이던 명의 장수 모문룡은 조선에 주둔하기만 하고 후금에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다.

영화 <남한산성>에 나온 후금(청)나라 기병들

그래도 나라가 망하라는 법은 없는지 명에는 만력제 시기 등용된 원숭환이 있었다. 원숭환은 적들이 공성과 대 화약무기전에 강하지 않음을 알았다. 가능한 평지 싸움을 피하고 서양식 대포인 홍이포로 직접 대전을 하지 않고 성 안에서 원거리로 후금에 맞섰다.(영화 <남한산성>에서 청나라가 남한산성을 박살 낸 그 포가 맞다. 명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것.) 이 당시 전쟁에서 원정군은 보급이 모자랐고, 빠른 시일내로 적지를 점령하지 않으면 보급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더욱이 유목민족이던 여진족은 인구가 적고 '아직' 요동의 토지가 척박하여 경제력과 생산력에서 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후금은 누르하치 연간에 많은 한족 포로들을 귀화시켜 농사를 짓게했지만(학살도 많이 했다.), 아직 개간이 되지 않은 요동 지방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연 손자는 원정군에게서 노획한 물자는 20배의 가치를 가진다 평한 바 있다. 그만큼 물자의 보급이란 중요한 것이다.


철벽요새 딴딴 산해관

원숭환은 만리장성 동북단이자 북경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인 '산해관'을 잘 지키고 있었고, 방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인근에 '영원성'을 축조하여 후금을 잘 막았다. 누르하치나 그의 아들 홍타이지는 명나라와의 일전에서 진적이 없었는데 유일하게 원숭환에게만 졌다. 후금은 동부 산해관을 뚫는 것을 단념하고, 만리장성 서북쪽을 넘어 북경으로 진군하기로 한다. 기습당한 북경 인근명 군은 지리멸렬하게 무너졌다. 원숭환은 급하게 원군을 파견했고, 놀랍게도 평지에서 후금 군대를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기사년의 변'이라 불리는 이 사건 이후 명은 지속적인 약탈에 시달리게 된다.

영화 <남한산성>에서의 청 태종 홍타이지

아무튼 홍타이지는 원숭환의 실력에 다시금 놀라게 된다. 때문에 그를 제거하기 위해 명의 내부 정치를 이용하기로 한다. 홍타이지는 포로로 잡은 환관들을 그런대로 잘 대해주며 그들에게 '원숭환과 내통'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누르하치가 죽었을 때 1) 원숭환은 후금에 '조의'를 표한 바 있었고, 2) 기사년에 평지에서 원숭환만이 후금을 이겼기 때문에, 3) 원숭환이 즉결처분한 모문룡이 사실은 환관들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이유에서 원숭환에 대한 간계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명락제 사후 즉위한 숭정제는 19살에 불과했고, 질투가 심했다.(마치 선조처럼) 황제는 환관들의 아첨에 귀를 기울였다.  원숭환은 수 개월의 구금 끝에 잔인하게 처형당했다. 명이 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이후 산해관을 지키는 명나라 장수 오삼계가 스스로 '문을 열어'준다)



6. 기세도 모욕도 일시적이다. 살아남아 버텨라.

(센고쿠 시대)

게임 <노부나가의 야망> 속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는 전투에서 성내 농성과 버티기를 지칭하는 청야전술을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판세를 읽고 때를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센고쿠 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처세는 그 전형이라 할만하다.


당시 이마가와 가문에 도쿠가와(당시에는 마츠다이라 성을 사용함.)가문은 복속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린 시절 이마가와 가문으로 인질로 가있었다. 당시 이마가와 가문은 전국시대 가장 유력한 가문 중 하나였고, 오다 가문과는 대립중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마가와 가문에 인질로 가는 길에 납치되어 오다 가문에 2년 정도 인질로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오다 노부나가와 친분이 생겼다고 한다.(역시 인맥이 중요함)


이에야스가 장성한 후, 이마가와 가문과 오다 가문은 보다 직접적인 적대 관계에 돌입하게 되고 가주인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오다 노부나가의 전면 대립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다 가문에 대해 1560년 대군을 일으킨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오와리국 영지 내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기습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이때 종군했던 도쿠가와의 군은 눈치를 보다가 자신의 영지로 돌아왔다. 당주(쉽게 말해 성주이자 오야붕이다)를 잃은 이마가와 가문은 혼란에 빠졌으나 이에야스는 2년 동안 독립을 선언하지 않았다. 그리고 1562년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요스' 동맹을 맺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서쪽을 향해(교토와 관서 일대로) 진군했고, 이에야스는 관동 지방(오늘날 도쿄 인근)에 위치한 자신의 영지 주변을 다졌다.


이에야스는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살아와서 자신의 모습을 화공에게 그리게 했다.

본래 다케다가와 도쿠가와 가의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확장을 펼치는 오다 노부나가의 기세를 무로막치 막부와 다른 다이묘들은 불편해 했고, 막부의 '오다 노부나가 토벌령'을 필두로 '노부나가 포위망'이 구축되고 동서남북으로 견제를 받게 된다. 특히 다케다 신겐은 오다 군의 확장을 견제했다. 1570년 다케다 신겐은 동쪽으로는 관동의 호조와 동맹 상태였고, 숙적인 우에스기 겐신에게는 불가침과 배후 세력 견제를 약속받았기에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 대한 대군을 일으켰다. 이에야스는 무모하게도 적은 숫자의 더 좋지 않은 병력으로 '풍림화산'(바람처럼 빠르게, 숲처럼 고요하게, 불길처럼 맹렬하게, 산처럼 묵직하게. 손자병법에서 유래했다.)의 진격의 다케다 군에 포위망으로 맞섰고 당연히 패배하여 목숨만 부지한채로 살아남았다. 이때 이에야스는 자신의 처참한 몰골을 화공에게 시켜 그림으로 남겼다. (미카다카하라 전투) 이후 다케다 신겐이 죽고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 다케다가 몰락하고, 오다 노부나가가 죽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기까지는 12년이라는 시간이나 걸렸다. 그동안 이에야스는 철저히 와신상담했다.

혼노지의 변 당시 상황 (잡동사니의 역사 이야기 블로그에서 발췌)

혼노지의 변(오다 노부나가가 가신에게 배신 당해서 사망한 사건)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패권을 잡았을 때, 히데요시는 좋지 않은 영지를 이에야스에게 줬다. 이에야스는 말 없이 그것을 따랐다. 다만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는 영지 수습, 반란 진압 등의 갖은 핑계를 대며 출병을 하지 않았다. 왜란 중 갑자기 적자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양자 히데쓰구는 제거될 위험에 놓였다. 심지어는 히데요시는 양자를 죽이고자 했는데 그의 사형을 막고자 구명했던 가신들이 있었고, 도쿠가와는 그들을 옹호했다. 과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사후에 야심을 드러냈다. 그는 히데요시의 가신들이 분열한 것을 이용했고 동서로 다이묘들이 대립한 '세키가하라'에서 일거에 승리를 거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중요한 순간에 죽는 길보다는 사는 길을 생각했고, 10년이고 20년이고 버텼다. 그의 경쟁자들은 당대에 가장 강한듯(오다 노부나가,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보였으나 도쿠가와의 처세와 시간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를 개창하고 천하를 제패한다.



7. 상대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일본은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만 알았지 사상, 정신적 이해가 모자랐다.

(제 2차 세계대전)

히로히토 일왕과 대본영 각료들. 참 참신한 의사결정이 이뤄졌을듯.(^^)

가까운 현대의 전쟁으로 와보자. 일본 대본영은 민주주의 체제의 미국을 너무 몰랐다. 대본영은 전제적 군주 텐노(일왕) 아래 엘리트 군인들이 나라를 운영한다. 그들이 결정하면 국민이 아닌 신민이 '결정을 받든다'. 의심은 허용되지 않고, 황국신민은 열과 성을 다해 목숨을 다해 따라야 한다. 대본영은 미국이 전쟁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들의 정신이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미국 내 반전 여론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전쟁의 공포를 자극하는 것은 일본 입장에서 협상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는 회심의 카드라고 생각했다.

 

일본 제국과 다르게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였다. 대통령을 국민이 뽑고, 그마저도 국민이 선출한 의회가 견제한다.선거 시스템 하에서 정치인들은 국민의 눈치를 보고 마음대로 하지도 못한다.(어디까지나 대본영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게다가 임기는 어찌나 짧은지 천황은 만세일계로 영원한데, 대통령은 허구헌날 바뀐다. 대본영 입장에서는 이렇게 비효율적일 수가 없다. 천황의 권위를 내세워서 엘리트들이 최적의 결정을 내리면 되는 것 아닌가?(물론 계속 망한 결정이었음)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는 대체로 전체주의 국가보다 전쟁 시작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를 지키는 전쟁'에서는 강력한 통합을 발휘한다. 일방적 복종이 아닌 구성원의 자발적 지지와 동의에 기반한 통합은 일방적 동원 체제보다 견고하고 강력하다. 진주만 공습은 전쟁에 냉소적이던 국민들을 자신들이 이룩한 터전을 지키기위해 싸우는 자발적 수호자로 만들었다. 상하원은 선전포고를 결의했다.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받들었다.' 전국에서 자원입대가 줄을 이었다.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청년이 상심하여 자살하는 사건이 있을 정도였다.


대본영이 진정 이해하지 못한 것은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에 사는 국민의 정신이었다. 일본 제국은 민주주의 체제가 총력전에서 얼마나 탁월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 체제는 지키는 전쟁에서 가장 강력해진다. 일본은 그것을 몰랐다.


(비슷한 경우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선조를 잡으면 전쟁이 끝나리라 생각했지만, 선조가 도주하고도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조선은 다이묘가 항복하면 끝나는 전국시대 일본이 아니었다.)


결론.

언제나 자신을 지킬 최소 세력과 결기를 유지하고, 통합을 준비하라.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은 언제나 있어왔다. 전쟁의 본질은 힘을 가진 세력의 충돌이다. 국가의 3요소가 영토, 국민(백성), 주권이라면, 그것으로부터 유래하는 힘은 확장하려는 반드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최소한 확장하지 못한다면 이질적인 세력으로부터 그 자신을 지키려 한다. 전쟁은 그것이 충돌하는 것이다. 전쟁사를 보다보면 전쟁의 승리를 '신묘한 전술'로 판세를 뒤집어버린 일거의 활약을 생각하기 쉽다. 그 사건 하나로 상대를 복속시키거나 병합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양측의 세력이 비등하여, 일거의 '회전'으로 힘의 균형이 깨질 때 가능한 것이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그 점에서 이성계가 북벌을 하지 않은 것은 현명한 일이고, 효종의 북벌 계획을 실행하지 못한 것도 잘된 일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어리석은 까닭이 이러한 이유다.)


결국엔 내부적으로는 분열을 막고, 통합을 강하게 하며, 자원을 집약하여 장기적으로 세력의 우세함을 지키는 것이 전쟁을 이기는 길이다. 강대한 고구려와 명나라는 진정 상대에 의해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은 내부에서부터 분열해서 무너졌다. 만약 상대를 이길 수 없다면 자신이 가진 것을 결단코 지켜낼 수 있는 세력과 결기를 유지하는데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하여 독자성을 지켜야 한다.


파촉으로 내몰린 유방의 한나라는 쉽사리 상대를 정복할 수는 없었으나 전력으로 방어를 하면 쉽게 복속될 수도 없었다. 그러자면 상대도 그 이상의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정세를 잘 이용하여 자신을 굳이 정복하게할 유인을 적게 했으며 세력을 보존하며 때를 기다렸다. 다만 칭기스칸도 누르하치도 자신의 최소 세력을 구축하기 전까지는 공격적으로 목숨을 걸고 세력 확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새롭게 확장한 세력에게도 많은 기회를 주어서 그들이 '우리'가 되도록 했다. 전쟁의 승리로 천하를 제패하고자 한다면 그 성패는 내부의 '분열'을 막고 확장한 세력을 '통합'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승자는 '제국'은 커녕 세력을 부지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

언제나 자신을 지킬 최소 세력과 결기를 유지하고, 통합을 준비하라!

경영과 일생의 성패도 여기에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천하제패의 조건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