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히 많은 다름에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다른 이들
매일 신문과 방송 뉴스에는 수많은 내용들이 보도된다. 멋지고 대단한 사람들이 나와 크고 대단한 성과를 말하기도 하고, 가고 싶은 축제 이야기도 나온다. 그리고 사건, 사고들이 보도된다. 하루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친다. 사고를 당해 죽는 사람들도 있고 억울한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보도할 지면과 분량은 한정되어 있기에 사람들이 주목할만한 내용들은 뉴스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뉴스가 되지 못한다. 아무튼 세상에는 뉴스가 되지 못하고, 뉴스가 담지 못하는 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애써 관심을 가져 보려고 해도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수는 없다. 하지만 그 일들이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음은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다.
16년 10월 의경으로 입대한 나는 훈련소에서 4주, 의경학교에서 3주를 보냈다. 의경학교 마지막 주에는 자대 추첨이 있었다. 나와 동기들은 저마다 자대 추첨이 잘되어서 조금이라도 더 편한 자대로 가길 바랐다. 마침 광화문 네거리는 촛불로 뒤덮이기 시작했고 날은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이 추운 날씨에서 저 수많은 인파를 마주하고 설 자신이 솔직히 없었다. 긴장하며 결과를 기다렸다.
7번 교육생 문희철. 5기동단 53중대.
나는야 교통 '기동대'가 되었다.
아.
이 시국에.
서울에서.
그것도 기동대로.
곧 스물여덟인 이경(가장 낮은 계급)으로.
나는 광장과 거리에 서게 된 것이다. 당시 내가 가게 된 53중대는 '교통기동대'로 쉽게 말해 서울 시내에서 교통 소요를 돕는 중대였다. 방패를 들 일이, 진압 장비를 입을 일이 없었다. 나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직접 집회에서 사람을 상대할 일은 없겠군! 그럴리가. 당연히 크나큰 착각이었다.
서울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집회와 시위는 거리에서 진행된다. 차도를 막으면 차들은 그 길을 돌아가야 한다. 차는 밀리고 운전자들은 길을 막는 이들에게 화를 낸다. 그리고 그 분노는 고스란히 길을 막아야하는 우리에게 향한다. 도심 마라톤이 있을 때마다, 저마다 다른 내용의 집회 때마다 거리가 끊기는 지점 또는 참가자들 바로 옆에 우리는 서있었다.
첫 근무는 민주노총의 거리 행진이었다. 큰 트럭에 큰 스피커가 있었고, 그 위에서 띠를 두른 아저씨가 무어라고 외쳤다. 조끼를 입은 아저씨들과 익살스럽게 표현된 대통령, 주요 재벌 총수의 흉상들이 트럭을 따랐다. 가장 낮은 계급 이경인 나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몰랐다. 나보다 5~6살은 어린 선임들은 알아서 대형을 잘 잡았다. 시위 행렬 옆으로 우리가 일정 간격으로 서서 차도와 그들을 자연스레 구분지었다. 뉴스에서 10초 스캐치로 앵커의 짧은 멘트와 함께 나오던 그 장면이었다. 단지 내가 있을 시간이 10초가 아니었을 따름.
나중에는 이 상황들도 익숙해져서 각기 다른 집회의 내용들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다리와 허리의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지나는 거리의 풍경에 관심을 두는 것이, 집회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그나마 시간을 빠르게 보내는 방법이었다. 하도 집회를 많이 나가다보니 집회 주체와 참가자들의 숫자, 연령에 따라 거리를 지나는 속도도 예상이 되었다. 그 속도가 우리가 계속 서있고, 걸어야하는 시간을 결정했다. 노조 아저씨들은 걸음이 대체로 빠르다. 정해진 투쟁가들이 나오고 정해진 식순을 딱딱 따른다는 느낌이 있다. 한 마디로 다른 집회보다 시원시원하다.
거 사회자 양반 말 좀 잘하나 들어봅시다. 나중에는 가객을 보는 구경꾼 마냥 관전평도 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말에는 설득도 되고, 어떤 말에는 '그건 좀...'하기도 한다. 아무튼 집회의 말과 소리는 참 중요하다. 건설, 금속 노조 계열 아저씨들은 술을 많이들 잡수신다. 같이 옆을 걷다보면 술냄새가 확 날 때가 있다. 대체로 별 일은 없었다. 누군가는 저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운이 좋을 때 어떤 근무는 산책같다. 초봄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의 1개 차선만 쓰는 작은 도심 행진이었다. 기억에 시청-세종대로 사거리-종로-고용노동청-을지로-시청으로 다시 돌아오는 '비교적' 짧은 코스였다. 집회 참가자들과 거리를 걷는데 날이 정말 좋았다. 청계천 앞 고용노동청 앞을 지날 때는 잠시 멈추어서 여성 노동자들이 함성을 질렀다. 참가자들의 표정에서 어떤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 순간 갑자기 눈이 내렸다. 그들은 어린 아이들처럼 좋아했다. 행진하며 누구는 울고 있었다. 누군가는 저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 밖에도 서울에는 참 집회가 많았다. 어떤 집회에는 태극기를 든 노인들이 나왔다. 그들의 주장은 거의 복벽에 가까웠다. 대체로 이런 집회는 참 힘들었다. 행진 거리는 긴데 지나가는 속도는 대단히 느렸고, 참가자들은 거리에 자주 주저 앉았다. (우리는 서있어야 한다.) 숫자도 아주 많았다. 어떤 참가자들의 젊은 시절 소속은 지금 그들이 드는 깃발과 입는 옷의 근거가 되었다. <XX사관학교 ○○기 애국 동지회>, <애국 ○○회>, 그 밖에 무슨 무슨 회. 군가는 귀를 찔렀고, 사회자는 목이 쉬었어도 맹렬히 소리를 찢었다. 누군가는 저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퀴어 퍼레이드가 있었다. 비가 무진장 왔다. 그래도 행사는 진행되었다. 멀리서 차를 막느라 가까이서 보지는 못하였다. 이제 막 교통경찰로 온 순경 한 분과 공평동에서 을지로로 향하는 차들을 막았다. 차를 돌려도 돌려도 끝이 없었다. 저 멀리서 알록달록 깃발을 든 참가자들의 수많은 행렬이 보였다. 어떤 운전자는 저들을 보고 욕을 해댔다. 어쩌면 우리에게 하는 욕이기도 하다. 왜 길을 막느냐는 것이겠지. 누군가는 저 멀리 저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장애인 단체의 집회가 있었다. 전날 밤 광화문 광장 인근에서 하루를 노숙한 그들은 여의도 국회까지 향할 참이었다. 이들의 구호는 간절함을 넘어 처절하다. 그 내용은 생계 뿐 아니라 생존과도 관련되어 있어 보였다.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다>의 수준이 아닌 <살아있을 수 없다>에 가까웠다. 휠체어를 탄 이들의 행진은 지극히 느렸다. 종종 전동 휠체어는 통제 차선 밖 차들이 오가는 차선으로도 향했다. 온몸으로 막는 경찰관들이 보였다.
그러다 행렬이 충정로 국민연금공단 건물 앞을 지날 때 갑자기 장애인들과 활동가들이 차도에 누웠다. 그냥 누운 것이 아니라 쇠사슬로 서로의 몸을 묶었다.(고 들었다.) 나는 그보다 좀 더 위 쪽 아현동 가는 방향 버스 정류장에 서있었다. 시내 버스가 멈췄다. 시민들이 내렸다. 시민들은 무슨 일이 생겼는지 교통 경찰 제복을 입은 내게 물었다. 나는 제복을 입은 내가 보여야 할 태도는 가능한 '가치중립적'으로 보이고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집회 참가자들이 도심 행진 중
국민연금공단 앞 양 방향 도로를 막고 멈추어 있습니다.
"이런 ○○○들!" 한 시민의 다음 말이었다.
어떤 학생은 곧 기말고사를 봐야하는데 어떻게 가야하냐고 정말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지하철이 가장 빠릅니다." 갈 길이 급한 시민들은 빠르게 지하철로 뛰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역으로 뛰어가는 시민들을, 저 멀리서 처절히 '투쟁'하는 집회 참가자들을 보았다. 누군가는 저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다양한 집회의 참여자들 양상과 구호는 도무지 너무나 다양해서 모두 적기 어려울 정도다. 그들은 저마다 각자의 간절함이 있었고 세상을 향해 제발 자신들의 말을 들어달라고 외쳤다. 집회나 시위는 예상하지 못한 구체적 불편을 야기한다. 사실 그 불편 덕에 시민들은 집회 참여자들이 간절한 이유를 인지라도 하게 된다. 하지만 대다수 시민들에게 '저들'의 간절함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저들'의 간절함은 <우리가 함께 해결해나갈 의제>가 될 수 있을까. 모두 시민인 우리. 우리들은 잘 공존해나갈 수 있는 것일까. 꽤나 다른 우리인데 말이다.
인간 사회에서 '다름'은 정말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다름을 존중해야한다는 말도 상식처럼 많이들 한다. 고민해보아야 할 것은 '다름'과 '존중'의 의미다. 인간 세상 많은 일들이 그렇듯, 무엇이 적절한 <다름에 대한 존중인가>에 기계적인 답을 내릴 수는 없겠다. 그래도 의미를 논의하는 과정은 의미가 있다. 우리가 늘 마주하게 될 일이기 때문에.
같은 인간 종(種)인 우리는 사회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다른 점도 참 많다.
우리는 서로 무엇이 다를까?
나와 너는 키가 다르다. 얼굴 생김새가 다르다. 신체의 기능 정도가 다르다. 언어가 다르다. 사는 지역이 다르다. ~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성별이 다르다. 국적이 다르다. 소득이 다르다.
...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이 다른 우리들.
개별 인간들은 신체적 특징, 사회 경제적 요소, 사안에 대한 생각 등에서 많은 것이 참 비슷하고 다르다. 일부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다름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라>는 말도 참 많이 쓰인다. 이 '있는 그대로'는 그 바람직한 의미가 무엇인지 철저히 고민하고 합의될 가치와 필요가 있다. <다름에 대한 존중>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다시금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런 선언을 한 번 해보자.
인간은 존엄하며 인간은 모두 존중 받아야 한다.
이 말은 딱히 증명할 수 없고, 그냥 옳다고 여겨지는 정언명령(칸트식으로 말하면 그 자체로 선이고 옳고 실행해야하는 도덕 명령) 같은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하다.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된다. 크게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그대로>가 붙으면 여기서부터 이견이 생긴다. 밝혀두고 싶은 포인트는 2가지다.
첫 번째 지점은 특히나 기계적인 정답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다. 이 문제는 개인의 정체성, 신념의 영역이다. 거의 모든 '다름'에 대한 논쟁과 논의는 여기에 해당한다. 나는 이것을 <실존의 존중> 문제라고 해두겠다.
어떤 이들은 다른 어떤 인간들의 존재나 정체성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특히 동성애와 성정체성에 대한 논쟁들이 그렇다.) 반대로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존재가 부정되는 것, 비존중되는 것은 그 당사자에게는 대단히 괴로운 일이며 존재를 부정하는 것, 보다 간단하게는 간섭 자체가 어떤 특정 개인의 권한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은 찬반, 사고판단의 문제가 아니랄까.
<다름에 대한 존중> 논쟁에서 정말 많이 간과되는 지점이 이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와 <존중>은 그 의미대로만 생각하면 이 포인트의 문제를 간과할 위험이 있다. 개별 인간의 정체성이 존엄하고 존중되어야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 차원에서) 여겨질 수는 있지만, 그 개별 인간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형태의 매우 구체적인 형태의 어려움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가 부정되는 것, 비존중되는 것과 별개로, 다름의 당사자가 생존, 생계 문제에서 대등할 수 없는 자리에 서있는 경우가 있다. 이를 <생존의 존중> 문제라고 해두자. 여기서 생존의 의미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느냐'의 생존 문제다. 잘 논의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간과되고는 하기 때문에 내가 주목하고 싶은 포인트도 2번째이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있는 그대로 존중>이 그 개인에 대한 단순한 방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개인이 사회 다수를 형성하는 주류적 양식과 주류적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주류와는 '다르기' 때문에 보다 더 많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두면 그 개인에게는 재앙이 된다. 개인의 정체성/신념에 대한 비간섭과 어려움을 겪는 이에 대한 무관심은 명백히 다르다.
<있는 그대로의 존중>은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느냐, 그 개인이 진정 자유롭게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실질적 환경에 있을 수 있느냐로 보아야하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회는 그 앞에 놓인 현실을 '섬세히 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조정은 어떤 특정 '개인의 선의'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해야하는 일이다. 이는 헌법이 말하는 사회권적 기본권에 해당한다. 당연하게도 국가와 사회는 개인들의 관심으로 움직인다.
다름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다름이라면, 1) 다름의 '인지'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2) '다름'으로 인해 겪는 문제에 공감하고, 이해하며 3)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실행까지 나아가기란 정말 어렵다. 현실은 1)-2)-3) 단계는 각각 단계마다의 어려움이 있다.
거리에 있던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장애인은 똑같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 똑같이 존중 받아야 한다.
이 문구는 아마도 많은 이들은 원론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다. 맞다. 하지만 명백히 말해, 장애인들이 놓인 현실적인 상태는 비장애인과 다르다. 그들은 해결이 절실한 매우 구체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존중은 그대로 방관,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현실을 조정하는 것>이다.
<장애인을 위한 지원과 인프라를 확충하자!>는 주장에 대해 대다수 사람들은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웬만한 사람들이 원론적으로는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그리고 그 디테일에 당사자가 아닌 이가 관심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아주 구체적인 형태로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 장애인들이 겪는 문제들은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 장애인들을 충정로 바닥에 눕게 만들었던 보다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얼마전 폐지된 '장애 등급제'라는 제도가 있었다. 장애를 중증 정도에 따라 1~6등급으로 세부 등급을 매긴 제도다. 이 제도에 따라 장애인 대상 복지는 등급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원됐다. 지금은 '중증', '경증' 정도로만 구분되는데 장애인 단체들은 제도 개편에 맞는 예산 증가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장애인의 상태 세세하게 구분하기>는 <상태에 따른 차등 지원>도 전제하고 있으므로, 장애 등급제에는 <예산을 아끼겠다>는 의도도 있었을 것 같다. 예산이 크게 늘지 않은 상태에서 장애 등급제가 폐지되었으므로 심각한 중증 장애인에게는 오히려 지원 감소했을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들은 <장애인 관련 예산을 현실화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장애인을 위한 지원과 인프라를 확충하자>는 원론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문제'도 이렇게 복잡하고 극복해야할 구체적인 어려움이 많다. 그들이 집회를 한 이유는 사람들이 장애인인 것을 인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즉 앞서 말한 1)번인 <다름을 인지하지 못함>이 아니다.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2)공감, 이해가 모자라고 때문에 3)구체적 해결 방안의 모색과 실행까지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책을 고민하는 입장에서는 어딘가에 예산을 증액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예산은 그렇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선순위를 결정해야한다. 이 우선순위는 시민의 관심과 비례한다.(보다 직접적으로는 '표'에 비례한다.) 우리 사회는 민주 사회이므로 그 의견이 반영될 방법을 투표로 하든, 투표가 아니면 목소리를 다른 반영할 방법을 찾아야한다. 장애인들은 그래서 집회를 한다. 장애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각자 할 말이 있는 이들은 자신의 목소리가 사회에 반영되길 원하는 마음에서 집회를 하고 뭔가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 '다름' 끼리도 서로 충돌하고, 때로는 해결의 우선순위를 놓고 경쟁한다. 광장과 거리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시끄럽고, 시민들의 관심을 원하고 있다.(동료 시민의 관심을 바라는 것은 개인에 대한 시혜적 기대가 아니다. 국가와 사회의 정책은 시민 다수의 관심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 <다름을 있는 그대로의 존중하기>는 정체성과 생각에 대한 존중인 <실존의 존중>과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게 하는 <생존의 존중> 모두를 존중할 때 진정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름을 인지하기도, 편견을 가지지 않기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결정적으로 나와 다르다는 것은 어떤 두려움을 수반한다. 대중 매체와 교육을 통한 사회화는 그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나약한 존재였기 때문에, 보지 않은 것 경험하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지금도 산에 가서 모르는 버섯을 먹지 않기는 상식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나와 다른 대상'도 익숙하지 않고 대상을 잘 알지 못하면 경계하게 될 수 밖에는 없다. 나와 다른 존재는 그런 이유로 부정적인 대상이 되기 쉽다. 우리는 나와 다른 이들을 '두려워하거나' '혐오하기' 쉽다.
우리는 나와 '다른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할까? 나의 좁은 지성으로는 이 문제에 대해 무엇이 어떻게 옳다고 섣불리 판단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최소 기준'을 정해두고 그 기준에 따라 아닌 것은 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안전한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어떤 대상의 <'존재를 반대'하거나 부정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전제가 있다. 적어도 그 대상이 사회와 공동체에 현저하고 실재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또 그렇게 합의되었다면. 사실 이 문제는 <실존의 존중>과 관련된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을 셀프 질문답변으로 표현해보았다.
어떤 존재가 위험할 수도 있을 거야. 그리고 분명히 그런 사람이나 존재가 있을 수 있겠다고도 생각해. 그런데 '어떤 집단이 전체적'으로 위험할 확률은 아주 낮은 확률일 거라고 생각해. 대체로 사회에 있는 어떤 집단들은 피차 모두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유달리 더 선하거나 더 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냥 똑같은 인간 군상인거지. 그런 이유로 어떤 집단을 딱히 더 우대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특정 '개인'이 위험할 수는 있는데,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나 그 사람을 구성하는 '정체성'이 위험한지 섣불리 결론을 내리는 것은 정말 정말 정말 신중해야한다고 생각해. 1920년대 일본 관동 대지진때 일본 민간인들과 군경에 의해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일이 있었지.
"조선인이 혼란을 틈타 우물에 독약을 타고 집에 불을 지르며 약탈을 한다."
뭐 이런 말도 안되는 이유였어. 어떤 사람이 약탈을 했을 수도 있어. 그런데 그 사람이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어떻게 알 것이며, 딱히 조선인이라고 더 그래야할 이유는 없잖아. 어떤 사람이 조선인이기 때문에 약탈, 방화를 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어. 이런 <집단에 대한 낙인 찍기>가 <다름으로 인한 위험>보다 확률적으로는 비교도 안되게 위험하다고 생각해.
이것은 앞서 말한 <실존의 존중>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어. 엄연히 집단, 정체성, 개인의 실체가 있는데 그 대상을 배제하거나 없는 것처럼 취급하면 일단 그 집단 속 개인은 인간으로 존중받고 있지 않고 있다고 느끼겠지. 그리고 그 대상은 배제하는 이들을 더 증오하게 될 거야.
잘 모르니까 경계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지. 그래서 '다른 이'를 잘 알려는 태도는 중요하다고 생각해.
또 대중매체와 교육에서 자연스럽게 '다름'을 다루면서 알아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다른 이'들은 문자 그대로라면 나랑 다른 사람이지. 그리고 어느 사회에서 얼마나 '주류'와 '주류의 선호'에서 얼마나 멀어지느냐가 '다름'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 관련될 거야. 1920년대 일본 제국주의 시절, 조선인은 절대 주류가 아니었지. 그렇기 때문에 그 개인이 누구냐 보다는 자꾸 '부정적인 특성을 가진 조선인' 으로만 여겨진거야.
아주 상대적이야. 자신을 구성하는 정체성들을 상상해보면 될 듯해. 가령 나는 다음과 같은 정체성으로 구성되어 있어.
대한민국에서
1) 군필 남성 이성애자이고, 별다른 이상없이 신체가 건강해
2) 서울에서 태어나고 그 주변에서 살아온지라
한국어로 표준 서울 말씨를 구사하지
3) 한창 집이 어려울때 국가장학금으로 등록금을 100% 가깝게 충당 가능했고,
지금도 딱히 드라마틱한 개선은 없었으니 경제적 계층으로는 '주류'가 절대되지 못하겠군.
4) 나이는 어느덧 서른이 되었으니 젊은 편에 속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살기 편해지는 느낌은 있어. 어리다고 무시당하지는 않게되는 거지.
위를 보면 나를 구성하는 정체성들은 대체로 한국 사회에서 마이너(비주류)는 아니야.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은 단순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복잡한 함수야. 나를 저기 미국 중부에 옮겨놓으면 나의 주류성은 대단히 약해질 거야. 어쩌면 그제서야 한국 사회에서 보이지 않던 것이 나에게도 보이겠지.
비슷한 경험을 아주 드라마틱하게 했던 적이 있지. 내가 군대 자대가 두 개야. 첫 번째는 교통 기동대였고, 이경부터 일경을 지나 상경 첫 번째 달까지 있었어. 두 번째는 기동단 행정부대였지. 거기서는 상경부터 수경(병장에 해당하는 의경 계급) 그리고 전역 때까지 있었어.
두 번째 부대에 막 전입했을 때는 상경이 발에 차여서 (16명 중 상경이 10명, 3명이 수경이었음.) 이제 막 온 상경 계급이 된 나는 여기서 사실상 제일 낮은 자였어. 그제서야 다시금 상기했지. 낮은 계급은 웃고 싶을 때도 마음대로 웃을 수가 없어진다는 거 말이야.
그러니까 <다른 이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거군. 아마 대다수 사람들이 이정도 입장일 거라고 생각해. 딱히 애써 관련되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대단한 차별주의자도 아닌 거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애써 '다름'을 피하지도 않았으면 한다는 거야. 왜냐하면 '다름'은 이제 더 자주 우리 사회에서 보이게 될 거거든. 좋든 싫든 우리가 나와 '다른'이를 마주할 가능성은 점점 높아질 거야.
가령 우리 어릴 때야 단일민족이다. 배웠지만, 지금 농어촌에서 태어나는 꽤나 많은 아이들이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날 걸. 앞으로 10~20년 후면 이 친구들도 똑같은 한국인의 시민이자, 사회 구성원이 되겠지. 그리고 절대 적은 수가 아닐 거고. 또 통일이 언제 다가올지 모르지. 나는 내가 중년이 될 때 쯤에는 통일이 되거나 남북간 왕래는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여러분끼리 알아서 사세요'라고 하기에는 이 나라는 점점 닫힌 채로 유지하기에는 이 나라가 국제적으로 너무 큰 나라가 됐어. 오고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거지. 자본이 흐르니까.
어떤 대상이나 집단의 <배제>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아주 비싼 비용을 지불하는 선택이 될 수 있어. 우리 사회 '주류'가 대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숫적으로 절대 무시 못할 수준이 될 거야. 배제하기에는 '다른' 이들은 충분히 많고 더 많아질 거야. 배제의 사회 갈등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겠지.
또 나는 <창의성>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융합했을 때 나오는 긍정적인 '새로움'이라고 생각해. 같은 생각, 같은 연령, 인적 구성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놓으면 비슷한 것만 자가 복제가 되겠지. 지식 정보화 사회에는 너무 큰 취약점이야. 주류가 아닌 사람들이 전체 수로는 정말 많은데 이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눈을 우리는 잃어버리는 거지. 쉽게 말해 돈을 덜 벌거나 못번다는 말이야.
요즘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쟁이 많지. <정치적 올바름>에 따르면, '차별적'이거나 편견을 조장하는 언어 사용이나 행동을 자제해. 예를 들면 미국 사회 내 흑인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인디언이라 부르던 이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부르는 거지. 누군가를 부르거나 대할 때 가능한 가치중립적이면서 그 지칭 대상이 차별이라 느끼면 안된다는 거야.
나는 그 취지나 가치에 대체로 동의해. 경멸의 의미를 담은 차별적 멸칭은 분명히 존재해. 그리고 차별적 멸칭을 사용하지 않게 됨으로써 사회의 품격은 높아지고 서로는 덜 상처입게 된다고 생각해. 가령 우리 사회에서 이제 '튀기'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게 됐지. 이 말은 다른 인종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을 부르는 멸칭이었어.
그런데 PC함에 취지나 가치보다도 자칫 '형식 그 자체'에만 지나치게 집착할 위험도 있어. 앞선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호칭은 '아프리카계'에 대한 특징을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으로 일반화할 수도 있지. 실제 아프리카는 인종 구성이 단순하지 않아. 이렇게 따지다보면 하나의 대상을 부르는 언어는 자꾸 파편화될 수 있고, 비슷한 태클을 계속 걸 수 있어.
또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흑인'이라 여기고 그렇게 불리워지길 바랄 수도 있어. 멸칭이 아니고서야 불리길 바라는대로 불리면 될 일이야.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 부르든, '흑인'이라 부르든, 실제로 그 지칭하는 대상이 겪는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PC함은 수사적인 태도에만 그칠 수 있어. 대상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냥 은폐시킬 우려가 있는 거지.
형식은 중요하지만 형식을 지키고도 <다름을 배제>할 방법은 아주 아주 많아. 때문에 의도와 맥락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일제 시대 조선인을 부르는 일본어 '조센징'은 형식상 가치중립적이야.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의 의도를 두고 광범위하게 오랫동안 사용했기 때문에, 당시 사회에서는 멸칭처럼 굳어졌어. 옛 속담처럼 강남에 심으면 귤이고, 강북에 심으면 탱자야. 정말 중요한 것은 말하는 이의 의도와 대화가 이루어지는 맥락이야.
앞서 다름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존중>은 <실존의 존중>과 <생존의 존중>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했잖아?
호칭만 바뀐다고 실제로 존중 받는다고 보기에는 어려워.
극단적으로 어떤 사람이 실제로는 다른 존재에 대해 관심도 없고 공감도 안하면서 기계적으로 PC한척 할 수도 있다는 거지.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들을 딱히 해결할 생각은 없어. 오히려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 물론 멸칭을 쓰는 차별주의자들보다는 나은 존재들이야.
확실히 말이 길어지는 주제구나. 결론은 형식은 중요하지만, 다름을 대하는 태도가 본질이라는 말이야.
(질문하는 목소리야 고생이 많다.)
주요 미디어가 '다른 존재'를 부정적이지 않게 묘사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해. 우리에게 다른 대상이 두려운 이유는 그들을 '잘모르기' 때문이니까. 지금까지 미디어에서는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존재가 지워진 집단>들이 아주 많았어. 그들의 존재를 대중에게 '인지'시키는 것과 '부정적으로 인식'시키지 않은 것은 사회 통합에도 긍정적인 일이야.
나는 기본적으로는 제작사들이 '상업적'인 선택을 했다고 생각해. 쉽게 말하면 창작물이 PC한 가치를 보이면 상업적으로 더 +가 되는 거지. 파레토 법칙이라는 게 있어. 위키 백과에서 찾아보면 고상하게 '전체 결과의 80%가 전체 원인의 20%에서 일어나는 현상'라고 써있어. 옷장에는 옷이 많은데 자주 입는 옷은 사실 정해져있지. 경제적으로 보면, 매출 80%는 20% 핵심 상품에서 나온다는 거야.
정보와 유통 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소비의 80%가 핵심 제품 20%에서 팔리는 현상이 상식이었고, 마케팅의 상식은 파레토 법칙을 따르는 거였어. 상업 영화같은 창작물도 대체로 (상대적) 주류와 그 문화에 우호적인 사람들이 주로 본다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지. 1970년대 할리우드에서 한국, 중국, 인도 시장을 타겟으로 따로 뭐를 잘 만들지는 않았다는 거야. 또 실제로 주류가 아닌 시장 소비자에 도달 가능한 기술이나 맞춰야할 이유도 없었어.
그런데 이제는 세계가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지리적 범위가 콘텐츠 시장에서는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어. 또 구글, 유튜브나 넷플릭스가 개개인의 '취향'이나 '선호'를 트랙킹(추적)할 수 있게 됐고, 그에 맞는 맞춤형 대응도 가능해졌어.
위 그림은 <파레토 법칙>과 <롱테일 법칙>을 각각 설명해. 잘 보면 앞 부분 20% 외 나머지 부분도 면적이 상당해. 길면 길어질 수록 '나머지 부분의 넓이가 상당함'을 설명하는 법칙이 롱테일 법칙이야.
세계 시장 전체로 보면 비백인이 더 많고, 남성만큼 여성도 많아. 또 숨은 '수요'인 성 소수자들도 숫자가 절대 적지 않아. 파레토 법칙으로 보면 '주류'의 소비력이 여전히 높기는 한데, 이제는 이전에는 잡지 못했던 나머지 긴 꼬리를 잡을 수 있게 되면서 상업적으로 이 사람들을 공략해보고 싶은 유인이 생긴거야. 데이터를 까보니 놓쳤던 다른 기회가 많았던 거지. 기업입장에서는 PC해져도 기존 시장은 거의 잃지 않고 시장 크기는 오히려 확장되니까, 상업적으로 아주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해. 결과적으로는 좋은 현상이지.
다만 PC함을 보여주기위해 보여주는 것보다 맥락상 어색하지 않게 투영했으면 좋겠어.
건전가요나 국뽕이 어색한 이유는 그 가치를 창작의 맥락과 안맞게 강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창작자가 PC함을 담고 싶다면 그것을 창작물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명시할 것인지, 암시할 것인지, 보여줄 것인지, 말할 것인지 적절히 선택해야 할 거야.
PC함이 틀렸다 맞다 이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닌 거지.
어떤 창작물이든 메시지만큼 완성도도 높았으면 하는 바람.
'정치적 올바름'의 메시지도 마찬가지.
단지 그 뿐이야.
'다름'은 그 자체로 어떤 속성은 아니고 '비교하는 어떤 대상과 같지 않다'는 의미일 따름이다. 그래서 다르기 때문에 '선하다' 또는 '악하다'는 판단은 섣불리 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이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악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기 때문에 악한 것이 아니다. 약자라고 선한 것이 아니고, 강자라고 악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은 동원 가능한 실질적인 '힘'의 차이를 가지고 있고, 스파이더맨의 삼촌 말처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필요"하다.
어떠한 가치나 선이 옳고 그른지는 상대적이고, 그 의미에 대한 판단은 신중해야한다. 다른 생각과 가치, 존재는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대상의 존재 그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다. 실체와 존재 자체는 인정해야한다.
인종차별적인 생각을 하는 차별주의자를 인위적으로 <제거>할 수는 없다. 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는 처벌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공개적으로 그러한 생각을 발언하고, 그 생각에 기반한 구체적인 행동을 하려한다면 사회는 그를 저지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역사 속에는 KKK단이 있었다. 아마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이 공개적으로 활개치고 다닐 수 있느냐 여부다. KKK단은 흰 고깔 모양 복면을 쓴 백인 우월주의자들이며, 대체로 기독교원리주의자들이고 반유대주의자들이다. 과거 KKK단은 백인이 아닌 인종을 살해하고, 테러하고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가치를 공공연하게 과시하는 가두행진을 벌였다. 미 연방 정부의 법보다 KKK단이 활개치는 지역에서는 그들에 대한 지지와 타인종 혐오가 강했다. 때문에 범죄를 저질러도 잘 처벌되지 않았다.
이들의 행동은 사회 통합을 저해했고, 공동체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상당한 위협을 지속적으로 가했다. 당연하게도 국가는 KKK단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벌였다. 그래도 KKK단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고, 제거할 수 없었다. 그 '망상'을 누군가는 여전히 추종하기 때문이며, 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는 처벌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하며 인간은 모두 존중 받아야 한다.
위 문장을 다시 한번 불러왔다. 원론적으로 대다수가 이 문장에 동의할 것이다. 존중이 무엇이냐를 떠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말자'는 존중의 최소 중에 최소 중에 최소에 해당하는 조건일 것이다. 어떤 개인이 다른 개인을 죽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이는 증명될 수 없는, 그저 그렇게 믿는 선언이다. 다름의 상대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인 우리가 인간인 서로에게 지켜야하는 최소 규칙이다. 상대를 절멸 시키지 않겠다는 당연한 약속.
생각이 달라서 갈등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죽이거나 핍박하거나 존재를 부정할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그러한 사상이 있다면 공론의 장에서 제약해야한다. 그리고 그 '제약의 기준'을 각 사회의 구성원들이 민주적으로 합의해서 약속으로 만들어야한다. 그리고 그 약속은 당연히 변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민주적 질서를 해칠 것이라 판단된다' 고 합의된 사상의 구체적 행동은 공식적이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제약해야할 것이다. (이를 방어적 민주주의라고 한다.) 이 모든 과정들은 지난하고 퍽 귀찮고 때로는 괴로울 것이다.
한편 <제약의 기준에 대한 약속>은 사회마다 저마다의 특수성을 가진다. 어떤 국가에서는 시위에서 복면을 금지한다. 앞선 미국 KKK단의 사례처럼 익명성 뒤에 숨어 다른 시민들을 테러하고 자유를 억압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를 방어적 민주주의라고 한다.)
약속의 핵심은 민주적 '합의'다. 누군가는 KKK를 공개적으로 옹호할 자유를, 공개적으로 인종차별할 자유를, 심하게는 사상이 다른 사람을 죽일 자유를 달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다수결로도 이러한 생각은 관철될 수 없다. 인간은 존엄하다는 선언과 그것을 저해할 수 없다는 최소 규칙을 저해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사회 속 개인인 우리가 해야할 일은 구체적인 악을 수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최소 기준>을 준수하고, 합의된 <제약의 기준>이 정하는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이다. 다름의 상대성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목적이 얼마나 수단을 합리화 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열린 사회를 파괴할 자유를 인정하지 않을 따름이다.
오늘도
광장과 거리에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다름'들이
저마다의 가치를 외치며 시민의 관심과 존중을 요구하고 있다.
아직 목소리를 내지 않는 다름들도 세상과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 자신들도 모르는 채 언제든 목소리를 낼 준비를 하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개인들은 알기 어렵다.
우리는 저마다 살기 어렵고, 다름과의 함께 살아감, 그러니까 공존을 할 여력이 없는 것은 아닌지
사회 속 개인인 나는 감히 염려하기도 한다.
쉽지 않을 것이다.
나와 다름과 공존한다는 것.
아
다름과 공존하기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