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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문 Dec 29. 2022

(스포) 페르시아어 수업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 그들을 향한 심심한 위로

독일의 지배하에 고통받았던 유대인들의 이야기는 여러 영화로 그려져 왔다. 우리나라 또한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를 겪어왔기에 그들의 아픔에 대해 그저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가진 아픔과 같은 종류의 아픔으로 인식하고 있기도 하다.

"페르시아어 수업"또한 유대인의 아픔을 그린 홀로코스트 영화이다.

이 영화는 페르시아어를 배우기 위해 페르시아인이 필요한 독일 장교 "코흐"와 유대인이지만 살기 위해 페르시아인이 되어야 했던 "질"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샌드위치와 맞바꾼 페르시아어로 된 책은 질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짓말 속으로 그를 몰아넣었다.

순간을 모면하고자 했던 페르시아인이라는 거짓말 때문에 페르시아어를 배우고자 하는 독일 장교를 가르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상황은 그가 가짜 페르시아어 단어를 만들게끔 흘러갔고 불어나는 거짓말을 동시에 암기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언제 이 거짓말이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영화에 긴장감을 주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질과 코흐의 모습은 어떤 점에서는 닮아있기도 했다.

살아남겠다는 질의 열망과 당원 이전으로 돌아가 동생과 함께하고 싶다는 코흐의 욕망이 그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의 길의 끝에는 다른 결과가 자리하고 있었고 이는 독일군으로 활동했던 코흐의 죄가 결코 씻길 수 없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나치시대에 수용소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또 어떤 사람들이 죽었는지 기록조차 남지 않은 이름들이 많을 것이다.

이 영화는 수용소 안에서 생활하며 사람들의 이름으로 엉터리 페르시아어를 만들어내던 질의 입을 통해 그분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그리고 그 장면은 나치 시대에 너무나 쉽게 희생당하며 지나간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살아 있었음을 기억해 달라는 장면으로 느껴져 더 뭉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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