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형 인간의 음악 듣기
필립 들레름의 에세이집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무엇보다도 가슴 뛰는 멋진 일은 CD 한 장을 산 후에, 돌아오는 길 모퉁이에서 그걸 꺼내 들여다보는 것이다.
필립 들레름은 이 에세이집을 통해 유년 시설 아주 작은 일상의 한 장면, 한 장면을 포착하여 각각의 일상적 행위가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이야기한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실려있는 네 번째 에세이 제목만 보고 몹시 설레었던 적이 있다. 에세이의 제목은 'CD 포장 풀기'. 제목만으로도 설렐 수 있었던 이유는 음반가게에서 CD를 구입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나의 모습과 CD를 세심히 관찰하고 CD를 통해 음악을 듣던 기억과 감정이 또렷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던 오빠에게는 워크맨이 있었지만 나는 워크맨이 없었다. 나는 그 서러움을 중학교 2학년 무렵 해소했다. 엄마에게 학원을 가든 안 가든 공부는 하지 않으니 한 달치 학원비 대신 CDP(시디플레이어)를 사달라고 졸랐다. 그리하여 나는 워크맨을 건너뛰고 CDP를 쟁취했다. 그 이후 나는 학원을 영영 가지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파트 상가에 있던 작은 음반가게에서 처음으로 카세트테이프를 산 후 대학생 때까지 뻔질나게 음반가게를 드나들었다. CDP를 갖고 있었고 음반가게를 자주 방문했지만 CD는 비쌌기 때문에 구경만 하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는 음반가게 진열대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CD들을 보기만 봐도 황홀했다.
내가 CDP를 사고 난 뒤 MP3 플레이어라는 신세계가 펼쳐졌다. 친구들은 워크맨에서 MP3 플레이어로 점프를 했는데 나는 대학교를 다닐 때에도 가방에 CDP를 넣어 다니며 음악을 들었다. 집에서는 PC로 벅스뮤직이나 소리바다를 이용해 더 많은 음악을 듣긴 했지만 나는 참 고집스럽게 CD를 사서 CDP로 음악을 들었다.
나는 늘 음반 가게에서 CD를 사서 나온 후 비닐을 다급하게 뜯곤 했다. 성격 급한 나로서는 CD 케이스에 밀착된 비닐을 신속하게 뜯지 못해 답답해하곤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주 조심스럽게 북클릿을 꺼내 후루룩 넘겨본 후 집에 도착하면 북클릿을 다시 꺼내 샽샽이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곤 CDP에 CD를 넣으면 나타나던 전체 플레이 시간을 확인하곤 어떤 음악이 실려있을지 기대감은 차올랐다. 때로는 플레이 타임이 40분 미만일 경우 조금은 실망하기도 했다. 음반을 차근히 듣다 유독 마음에 드는 곡을 만나게 되면 CDP 액정을 통해 트랙 번호를 확인하고 북클릿을 다시 보고, 특정 곡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다(이런 곡들은 대부분 타이틀 곡이 아니었다).
나에게도 필립 들레름만큼이나 'CD 포장 풀기'의 추억이 있고 CD로 음악을 들었을 때의 강렬한 기억들이 남아있다. 나는 여전히 CD를 사고 있고 집과 매장에서 CD를 재생하여 음악을 듣는다. 이제는 오프라인 음반가게가 아닌 온라인으로 CD를 구입한다는 것이 이전과 다르지만 CD가 도착할 때까지 갖는 기대감과 설렘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제로 웨이스트 스토어 겸 카페를 운영하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왜 나는 여태껏 CD를 구입하여 음반을 소유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듣는 것일까?' '스트리밍 시대에 이 고집스러운 CD에 대한 소유욕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러던 와중에 머릿속에서 몇몇 장면들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하교 후 교복을 입은 상태로 오래된 나무마루 위에 대자로 누워 오래된 전축으로 음악을 들었던 기억이다. 마루의 큰 미닫이 창으로 슬며시 들어오던 바람을 느끼며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앨범을 들었다. 7번 트랙인 Veinte A ños는 반복해서 들을 정도로 좋아했다.
늦은 밤 EBS 방송으로 보게 된 <Swinging Bach>에 대한 기억도 있다. 2000년 베를린 라흐프치히 광장에서 바흐 서거 250주년 기념 공연을 했다. EBS에서는 2001년 <Swinging Bach>를 방송했는데 자려고 누운 밤 나는 정말 우연히 그 방송을 보게 되었다. 바흐나 클래식에는 관심이 없었음에도 자끄 루시에 트리오가 연주하는 'Fugue No. 5 in D major'를 듣고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며칠 뒤 나는 자끄 루시에 트리오의 [Play bach] 앨범을 구입하여 <Swinging Bach> 콘서트에서 연주하던 자끄 루시에 트리오를 상상하며 CD를 듣곤 했다.
* <Swinging Bach> 공연에는 바비 맥퍼린도 참여했는데 관객과 함께 아베 마리아를 부르는 그의 공연(영상 보러 가기 / 해당 영상의 5분 30초 지점)도 매우 인상적이다.
좋아하는 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부푼 기대감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난 후 OST를 검색했지만 국내에서는 CD를 구할 수 없었다. 앨범에 대한 소유욕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가 2016년 도쿄 핫트랙스를 방문하여 결국 CD를 샀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CD는 며칠을 참았다가 서울에 와서야 들을 수 있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좋아해 처음으로 드라마 OST를 구입했다. 드라마 속 장면과 찰떡같이 달라붙던 음악을 CD로 들으며 드라마에 대한 느낌과 기억을 더듬기도 했다.
나는 이제 CD보다 스트리밍을 통해 음악을 더 많이 듣는다. 스트리밍을 통해 몰랐던 뮤지션의 좋은 곡들을 많이 알게 되었지만 이상하게 CD만큼이나 음악을 듣던 장면과 감정이 강렬하게 남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나는 스트리밍으로 듣게 된 좋은 앨범은 CD를 검색해 구입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찾는 뮤지션의 앨범은 국내에 없거나 LP만 수입되어 내가 바라는 만큼 소유할 수 없다.
나의 CD ‘구입'과 '소유욕'에 대한 답은 어떤 물질에 대한 소유라기보다 CD를 사서 돌아오던 길 느꼈던 설렘과 CD를 재생하던 당시의 풍경과 감정에 대한 기억이고, 어떤 대상에 깊게 다다르는 과정이었다. 손에 잡히지 않고,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음악을 나는 CD라는 물질적 존재로 향유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머릿속에 각인한다.
필립 들레름의 표현처럼 '나의 그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면, 나는 여전히 쉽게 설레고 마는 조금은 아날로그적 인간임이 분명하다.
벌써 머리 속에는, 침대 위에 누워서 새 CD의 노래를 들으며 책자를 뒤적거리는 그 행복한 순간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