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밤토끼 May 06. 2022

김 굽는 계절

적당히 포근하고 살랑거리는 바람 덕에 언제든지 환기하기 좋은 계절이 지나고 있다. 열을 잔뜩 받은 무쇠 팬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어도 덥지 않고, 고요하게 잔잔히 퍼진 연기는 창만 열면 금방 사라지는 좋은 날씨. 여름이 오고 있다는 기운이 느껴지니 지나가는 봄이 아쉽기만 하다. 


지금은 김 굽기 좋은 계절이다.  


어느 날 갑자기 도시락 김의 작고 얇은 플라스틱 받침이 몹시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마땅한 반찬이 없을 때는 도시락 김만으로 밥을 먹기도 했고, 회사 생활을 하며 도시락을 싸다닐 때도 도시락 김은 기본 옵션 같은 반찬이었다. 아주 가끔은 손에 들기름과 김가루를 묻혀가며 도시락 김을 간식과 술안주로 즐기기도 했다. 나에게 도시락 김은 최애는 아니지만 반찬 고민이 생겼을 때 '그래도 김이 있어!'라고 빈곤한 내 도시락 가방을 채워주는 든든한 존재였다. 그래서 도시락 김이 떨어지지 않도록 찬장을 미리 채워놓는 습관 아닌 습관이 있었다.


제로 웨이스트 스토어 겸 카페를 준비하고 있어 그랬던 것인지 어느 날 재활용 분류함에 겹겹이 쌓인 도시락 김의 플라스틱 통 받침을 보며 문득 '김을 구워야겠다' 고 생각했다. 다행히 엄마 덕에 들기름 발라 소금을 솔솔 뿌린 구운 김의 맛을 알고 있어 대단한 결심은 필요하지 않았다.  


엄마 꾸러미에는 가끔 들기름병이 들어있었지만 참기름만큼 빠르게 소진되지 않았다. 아주 가끔은 나물을 묻힐 때 넣기도 하고 찬물에 헹군 소면에 들기름과 쯔유를 넣고 비벼먹기도 했지만 참기름을 3, 4병 먹어치우는 동안 들기름은 한 병을 먹지 못했다. 그랬던 들기름은 내가 김을 굽기 시작하면서 속절없이 사라져 갔다.    


아주 가끔은 들기름을 바르지 않은 김을 구워 먹으며 나도 어른 입맛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들기름 바른 김을 굽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고작 김, 들기름, 맛소금이 전부다. 김을 구워 먹기 시작한 후 엄마가 보내주는 들기름은 금새 사라져갔다.

들기름 바른 김은 내가 만들어 본 반찬 중 가장 적은 재료로 가장 쉬운 과정을 통해 실패 없는 맛을 만들어낸다. 나의 김 굽는 방법은 별 것이 없다. 그저 취향에 맞는 김을 구입하여 적당량의 간을 하여 굽는 것이 전부다. 시중에 판매하는 도시락 김보다 조금 더 두꺼운 돌김이나 곱창 돌김을 선택하여 고소함과 씹는 맛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들기름을 솔로 고루 펴 발라준 뒤 예열된 프라이팬에 김을 앞뒤로 뒤집어가며 마음에 드는 초록빛이 나올 때까지 구워준다. 마지막으로 적당량의 맛소금으로 입에 착 달라붙는 간을 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조금은 수고스러울 수 있지만 김을 굽고 맛을 보고 나면 누군가에게 선물해도 좋은 소소하지만 성의 있는 선물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번에 10장~15장을 굽기 때문에 집안에 연기가 차고 여름이 되면 프라이팬 열기 때문에 땀이 맺힌다. 이런 이유에서 나에게 봄과 가을은 김 굽기 좋은 계절이다.  

초록빛의 바삭한 김을 가지런히 쌓아 가위로 잘라준다. 손으로 전달되는 바삭하고 톡톡한 질감 때문에 가끔은 밥솥에서 밥 한 숟갈을 떠 김에 싸서 바로 맛을 본다.


제로 웨이스트로 인해 시작된 나의 김 굽기는 다행히 사계절을 넘겼고,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봄이 되면 창문을 열어놓고 신나게 김을 굽는다. 부지런히 김을 구워 헤프게 먹어버리지만 비닐포장과 플라스틱 통을 줄일 수 있으니 위안이 된다. 


1+1으로 나를 유혹하는 구운 도시락 김. 땀을 흘리며 김을 구워야 하는 여름이 되면 나는 도시락 김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톡톡한 김에 들기름을 발라 바삭하게 구운 고소한 김 맛을 위해 여름에는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김을 굽겠지만 김 맛은 계절을 타지 않는다. 덕분에 비닐도 플라스틱 통도 덜 버리게 되니 쓰레기에 대한 걱정은 아주 조금 덜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음악을 소유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