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의 평화를 찾아 몽골 - 몽골 의료봉사기
모든 길은 여행을 꿈꾼다. 공항 가는 길, 리무진 버스 차창 너머로 트럭 한 대가 숨 가쁘게 따라붙는다. 어느 계곡으로 물놀이를 가는지 트럭 짐칸에는 노란 튜브와 슬리퍼 두 켤레,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냄비 등속이 야무지게 묶여있다. 생계를 위해 잡았던 핸들을 어느 날은 여행을 위해 잡기도 한다. 간소한 짐만으로도 훌쩍 떠나는 힘은 일상의 노동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는 트럭에서 노랫가락이 나오는 듯 흥겹다. 노란 튜브도 궁둥이를 흔들흔들한다.
여행은 여행지에 도착했을 때보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이 더 설렌다. 몽골로 의료봉사를 계획하기 이전부터 나에게는 몽골에 대한 무수한 상상들이 있었다. 지평선으로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과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 산맥을 넘어온 바람이 잠시 숨을 고르는 전나무숲, 낮게 핀 야생화들.
의사도 간호사도 아닌 내가 몽골 의료봉사를 자원한 것은 몽골에 대한 로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상상 속의 몽골이 없었다면 이번 기회도 그저 지나가는 시간 속에 흘려보냈을지 모른다. 한 번도 한가하게 살아본 적 없는 내 삶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오랫동안 몽골 여행을 계획했던 서영과 나는 각자의 딸과 함께 몽골 의료봉사팀에 자원봉사자가 되어 떠나기로 했다.
신혼 시절, 여름만 되면 짐을 꾸려 떠났던 휴양지가 있었다. 장수에 있는 와룡 휴양림이다. 지금은 개발이 되어 더 넓고 안전하고 깨끗해졌지만 이십여 년 전의 그곳은 태초의
원시림 같은 곳이었다. 우리가 즐겨 찾는 곳은 좁고 얕은 계곡물이 한 곳으로 모이는 작은 소(沼)가 있었다. 아득하고 신비하여 우리는 그곳을 ‘비밀의 숲’이라 불렀다. 병풍처럼 돌려진 바위 사이로 한 줄기 계곡물이 들어왔고 그 밑으로 작은 텐트 하나 정도 치기에 좋은 크기의 평상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트럭에 냄비 등속을 싣고 와서 평상에 누워 한낮의 더위를 피했다. 한더위가 꺾인 오후가 되면 가져왔던 짐을 트럭에 싣고 삶터로 내려갔다. 그러면 저물녘부터 온전히 여행객인 우리 차지가 되었다.
평상에 텐트를 치고 물속에 발을 담그면 송사리 떼들이 발가락을 간질거리고, 밤이면 반딧불이들이 꽁무니에 불을 밝혀 날아다녔다. 빠르게 어둠이 내리는 산속엔 별들이 무리 지어 나들이를 왔고, 세상엔 물 흐르는 소리와 새소리와 만개한 꽃이 떨어지는 소리뿐이었다. 아침이면 텐트 위로 등꽃이 보랏빛 꽃그늘을 드리웠다. 그곳은 원시림이 주는 태곳적 지구의 자궁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의 잃어버린 시간이 꿈틀꿈틀 일어나 숨을 쉬었다.
한낮이면 숲 속으로 들어오는 빛을 따라가며 책을 읽었다. 내가 들고 간 책은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된 철학자 이왕주의《쾌락의 옹호》였다. 어떤 단어들은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불온하기도 하다. ‘쾌락이 유죄인가’를 묻는 이들에게 ‘가장 지혜로운 생의 목표는 진정한 쾌락주의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답한 철학자의 말은 한편, 옳다. 그가 말한 쾌락 중 ‘발의 평화’가 좋았다. ‘오직 내 발로 땅을 밟고 햇빛과 바람 속을 오래 걷는 일’. 나는 아마도 그때부터 ‘발의 평화’를 위한 쾌락주의자가 된 듯하다. 아니, 내 몸에 있는 숲과 초원과 별에 대한 태곳적 유전자가 현실과 마주하게 된 순간이었다.
나에게 장수 와룡은 태고의 원시림에 대한 상상과 맨발의 자유를 알게 했던 곳이다. 계속된 개발로 이제 그 ‘비밀의 숲’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태고의 신비, 맨발의 자유, 발의 평화. 내 안에 유영하는 상상들이 몽골을 어느 골짜기 이름처럼 가깝게 불러본다. 그곳에서 나는 어떤 발의 평화를 느끼고 오게 될까? 환영처럼 멀어지는 하얀 트럭의 꽁무니가 어느 순간 사라진다. 사라진 것들 속에서 몽골이 자리한다.
이제야 나는 어디론가 떠나는 발의 간지러움에 전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