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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하라 Oct 14. 2020

의료봉사에서 너는 뭐 했어?

발의 평화를 찾아 몽골 - 열린의사회와 함께한 몽골 의료봉사기(4)




“의료봉사에서 너는 뭐 했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다. 의사도 간호사도 아닌 사람이 의료봉사를 다녀왔다는데 무슨 일을 했을까?라는 단순한 의문에서부터 외국에서 의료봉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열린 의사회가 하는 해외 의료봉사 지역은 몽골을 비롯해 네팔, 인도, 남아프리카 공화국, 베트남, 라오스, 필리핀, 캄보디아, 카자흐스탄 등이 있는데 우리 회사의 경우는 주로 여름에 봉사자를 모집했다. 올여름은 마치 나를 위한 준비인 듯 몽골이었다.    


  우리가 진료를 한 곳은 헨티 아이막의 은드르항 지역에 있는 주립병원이었다. 국가가 운영하는 의료시설에서 의료봉사를 한다는 게 좀 의아하기도 했다. 도착 당일 오후부터 진료가 시작되었는데 운영팀의 빠른 판단으로 순식간에 진료 동선이 결정되고 진료과목에 따른 방 배치가 이루어졌다. 1층에서 진료를 받기 위한 대기 번호표가 부여되고 가슴에 번호표를 붙인 사람들이 10명씩 2층 로비로 들어온다. 2층 출입문에서 현지 경찰의 도움을 받았다. 하루에 5~6백 명이 오다 보니 통제에 한계가 있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어디에서 이렇게 몰려왔는지 신기했다. 혹시 말을 타고 왔나? 말은 없었고 오토바이는 즐비했다. 봉사 마지막 날에는 밀치고 밀리는 사람들 통에 병원 문고리가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의료봉사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절반은 의료진이고 절반은 자원봉사자들인데 자원봉사자 중에도 의예과 학생이 1/3 정도였다. 의예과 학생들은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된다. 순서가 된 사람들은 진료과목을 정하기 위해 초진 상담을 받게 되는데 이때 의예과 학생들이 어디가 아픈지를 묻고 진료과목을 결정한다. 초진 차트가 작성된 환자들은 기본적으로 혈압과 혈당 체크를 한다.


  내가 하는 일은 그들의 접수를 돕고 배정받은 치료과로 안내하는 일이었다. 진료과목은 1개 과를 원칙으로 하고 상황에 따라 2개 과까지 가능했다. 2개 과 진료는 치과나 한의과가 많았다. 한의과는 넓은 공간 확보를 위해 4층에 있어 간혹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때는 4층까지 직접 안내하기도 했다. 환자 대기가 한쪽으로 몰리면 증상에 따라 진료 가능한 다른 과로 적절히 배치하기도 하고 밀리는 과는 초진 차트 작성 시 분배를 조정하도록 요청했다. 진료를 마친 사람들은 복도 끝에 있는 약국으로 안내한다. 약을 받은 사람들이 반대편 출구로 나가면 진료가 끝난다.      


 사람들은 여기서 다시 한번 묻는다. 


  "몽골어도 할 줄 알아?" 

  "그럼. 기본은 해야지."     


  의심 반 호기심 반이 섞여 있는 질문에 나의 당연한 듯한 대답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 키운다. 낯선 나라가 두려운 이유는 소통의 문제라는 걸 안다. 몽골로 출발하기 전에 우리는 A4 반쪽의 '몽골어를 배워봅시다!'라는 간단한 현지 회화를 받았다. 물론, 외워지지도 않고 외우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거지? 밀려드는 사람들에게 꼭 해야 할 말들은 자연스럽게 외워졌다. 


  '이레레(오세요), 야와레(가세요), 어러레(들어오세요), 후세게레(기다리세요)' 였다.  

  '예민상 야와레(약국으로 가세요)와 저흥 후세게레(많이 기다리세요)' 이 말을 가장 많이 했다. 사람들은 그게 다냐는 표정을 짓는다. 그거면 된다는 나의 답에 사람들은 안심한다. 안도의 표정에는 2가지 내심이 그려진다. ‘네가 그럼 그렇지. 몽골어를 언제 배웠겠어?’ 또는 ‘아 저 정도만 해도 현지인과 소통을 할 수 있구나’ 


  나에게 가장 헷갈리는 표현은 '버서레(일어나세요)와 소가래(앉으세요)' 였다. 이리 오라 할 때도 가라 할 때도 '버서레'라고 했다. 그러면 나서는 것과 적극적인 엄마를 싫어하는 열세 살 나의 따님은 내 옆구리를 찌르면서 귀엣말로 신경질을 가득 담아 말한다. 


  “엄마, 소가래야 소가래.”소극적인 딸이 맘에 안 드는 엄마는 크게 말한다. 

  "그럼, 네가 하든지." 우리는 잠시도 쉴 틈 없이 밀려오는 사람들을 안내했다.

  “소가래. 소가래”    


  우리를 가장 많이 도와준 사람은 14살 떼띠그르와 16살 잉징이었다. 떼띠그르는 한국말은 할 줄 몰랐지만, 우리가 현지인과 소통이 안 돼 곤경에 처해있으면 어느새 우리 곁으로 다가와 한동안 두 사람의 대화를 빤히 쳐다보다가(듣다가가 아니다)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였다. 떼띠그르는 적십자사 총괄 책임자인 엄마를 따라서 참여하게 되었고, 잉징은 떼띠그르 엄마의 친구 딸이라고 했다.(쉽게 말하면 ‘언니’다.)  잉징은 한국어와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은 아이다. 한국에서 의료봉사를 온다고 하니 멀리 울란바토르에서 여기까지 따라왔단다. 총명하고 예쁜 두 아이 덕분에 우리는 몽골어를 모르고도 무사히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난, 아이들을 보면 좋다. 꿈을 갖고 자라는 아이들은 더 좋다. 세상을 향해 무한 호기심을 가지고 서슴없이 이방인을 대하는 이 아이들이 어떻게 클까를 생각하면 가슴에 몽골몽골 구름 꽃이 피어난다. 떼띠그르와 잉징이 그랬다. 예쁘게 크라고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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