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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하라 Oct 15. 2020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꽃청춘

발의 평화를 찾아 몽골 - 열린의사회와 함께한 몽골 의료봉사기(6)




  별 모양이 수놓아진 범상치 않은 베레모였다. 저 모자를 어디서 봤더라. 머리에 비스듬히 얹혀 있는 품새는 마치 체 게바라가 쓰던 베레모 같기도 했다. 젊음의 이상주의와 순혈주의적 반란의 상징이었던 별 모양이 박힌 그 베레모. 짙은 주황색의 펑퍼짐한 바지에 모자를 쓴 모습은 마치 마네의 그림 <피리 부는 소년>의 모습과도 유사했다. 그는 소년처럼 어리지도 않았고 체 게바라처럼 우수에 젖은 이상주의적 젊은이도 아니었다. 중년을 넘어(국어대사전에서 중년은 청년과 노년 사이로 마흔 살 안팎의 한 창 일할 나이로 되어 있음) 이젠 노년의 기운이 들기 시작한 나이였다. 그가 쓴 베레모는 묘한 희극성이 가미되어 있었다.

 

 공항에서는 못 뵈었던 분들이셨다. 허리에 닿을 듯한 대형 케리어의 크기에 우선 놀랬고 현지인 같은 편안한 자세에 궁금증이 일었다. 두 분은 7월 26일부터 항울 지역 의료봉사팀의 일원으로 입국하신 후 러시아 바이칼 호수까지 다녀오는 볼룬투어에 참여한 후 8월 5일 헨티 지역 의료봉사에 동참하게 된 한의사님 부부셨다. 열린의사회의 몽골 의료봉사에 보름 이상을 함께 하셨다. 진료에 필요한 한의과 물품들과 오랜 여행기간으로 대형 케리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젊은 봉사자들의 발랄함과 패기, 중년 봉사자들의 피로감이나 쫓김이 없는 장년(長年)의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뒷짐 지고 헛기침만 하는 노년도 많이 봐왔던지라 범상치 않은 평범함이다.     


  “모자가 참 멋지세요. 어디서 사셨어요?”라는 질문에 어깨를 으쓱하셨다. 러시아 바이칼 호수로 가는 여행 중에 노점에서 구매하셨다며 나의 질문에 흡족해하셨다. 누군가 쓰다 팔려고 내놓은 모자.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건의 내력. 내력을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는 망설임이 없다. 삶에 대한 선택도 망설임이 없었으리라. 이리 재고 저리 재면 골방에 갇혀 쩨쩨한 사람만 된다.  


  “처음엔 남편 혼자서 많이 다녔어요. 애들도 어려서 함께 올 여건이 안됐고요. 오지로 가는 봉사활동이 힘들기도 했어요. 이젠 애들이 다 커서 남편이랑 같이 의료봉사 오는 날들이 많아졌네요.”  


 내려놓은 듯하시는 말씀 안에는 젊은 날 혼자서 봉사를 한다며 떠나는 남편에 대한 불만도 있어 보였다. 울산에서 한의원을 하시는데 이번처럼 일정이 길어지면 고용의사를 두고 오기도 하고 휴가를 붙여놓고 올 때도 있다고 하셨다. 병원도 단골 장사라 의사가 오래 자리를 비우면 환자가 떠나기도 하는 손해도 있지만 효과를 본 사람들은 다시 찾는 게 한의원이라는 말씀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열린의사회와 봉사활동을 오래 함께하셔서 그런지 당황함도 없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리드하셨다.    


 젊은 친구들의 발랄함이 있다면 나이 든 사람에게는 연륜의 깊이가 있다. 적십자 캠프에서 우리 팀과 저녁 산책을 함께 하며 두 분이 서로에게 깃든 오랜 동지적 믿음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부인은 뭘,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도 내심 남편이 하는 봉사활동과 의미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을 때도 남편분의 까다로운 주문에 응하시고는 카메라에 든 사진을 보며, ’ 까다롭긴 해도 실력은 있으시다니까.‘ 라며 만족해하셨다. 까다롭긴 해도 실력만 갖추셨겠는가? 오만함이 없는 겸손한 모습에 절로 두 손이 모아 졌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늙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오는 시간의 무게이다. 그 무게는 가벼워질 수도 있고 더 무거워질 수도 있다. 나를 비우면 그 무게는 가벼워진다. 


 모든 좋은 것은 그대의 앞날에 있으니 늙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장년(長年)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이 꽃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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