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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하라 Oct 14. 2020

스물아홉 청춘들의 의료봉사

발의 평화를 찾아 몽골 - 열린의사회와 함께한 몽골 의료봉사기(5)



주나 씨는 스물아홉이라고 했다. 작고 동그란 얼굴에 눈이 크고 반듯한 입술을 가진 아름다운 청춘이었다. 누가 들어도 알만한 국립병원의 간호사였다. 지금은 아니다. 사표를 썼다고 했다. 내가 그 나이에 꼭 써보고 싶었던 것이 사표였다. 그런데 지금도 못 쓰고 있는 게 사표다. 이제는 그 문제를 두고 방황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안주라기보다는 방법을 달리하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느리지만 꾸준히 실천하기로 타협한 후 사표를 품고 다니는 마음을 거두었다. (사실 2년간 휴직을 하고 집에서 살림만 해보니 살림이 더 어려웠다.)  


  그녀는 지금이 가장 빛나는 청춘임을 알고 있었다. 동료도 친구도 없이 혼자서 의료봉사에 참여했다. 간호사가 되었을 때부터 열린 의사회의 후원자가 되었고, 언젠가는 해외 의료봉사를 함께 하겠다는 것이 버킷리스트 중의 한 가지였다고 했다. 소망을 품으면 혼자여도 결정은 가능하다. 그녀의 내면은 아주 힘이 세다. 겨우(?) 몽골 여행이나 생각했던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 여기 오기 전에 세부에서 스킨스쿠버 자격증을 땄다고 했다. 프로필 사진 속에 그녀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버킷리스트는 늙어서 이루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이루는 것이 버킷리스트였다.    


 일반외과 의사였던 중혁(가명) 씨의 젊음을 빼놓을 수가 없다. 중혁 씨도 의료봉사는 처음이었고 혼자 왔다. 주나 씨가 부드럽고 말랑한 강함이 있다면 중혁 씨는 외면적 강함에 내면의 부드러움이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간 의료팀에는 이비인후과가 없었고 현지의 환자 중에는 이비인후과와 소화기내과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정의학과 의사 혼자 내과를 보기엔 환자가 너무 많았다. 중혁 씨는 첫날의 실정을 보고 손을 들었으라.    


“제가 하겠습니다!”    


  5~600명의 환자가 많게는 2개 과목을 볼 수 있는 시스템 속에서 충분히 힘든 과정이었다. 그런 와중에 중혁 씨는 이비인후과도 소화기내과도 자신에게 보내라고 했다. 일반외과 밑에 두 개의 몽골어 안내 문자가 더 붙었다. '이비인후과'와 '소화기내과(?)'였다. 자연스럽게 일반외과 앞은 영화 알라딘 속 아그라바 왕국의 시장통처럼 북적였다. 지붕을 넘나들며 날아다니는 환상적인 것들은 없었다. 사람들은 행여 자신의 차례가 뒤바뀌거나 자신의 진료차트가 제대로 들어갔는지에 대한 의구심으로 몽골어를 할 줄 모르는 나만 바라봤다. 나는 그럴 때마다 "후세게레. 저~ 흥 후세게레 (기다리세요. 많이 기다리세요)를 반복해야만 했다. 가정의학과 줄이 짧아지면 눈치를 봐서 그쪽으로 내과 환자를 안내하기도 하고 접수처에 지금 외과가 밀리니 다른 곳으로 배정해 달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환자를 대하는 것이 진중한 중혁 씨의 진료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주나 씨는 차분하지만 빠르게 협진이 필요한 환자를 위해 다른 분야에 협조를 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른 과도 바빴고 한 사람당 2개 과까지 볼 수 있다는 원칙에 따라 협진도 쉽진 않았다. 운영진 쪽에서도 환자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한정된 시간 안에 진료를 끝내야 한다는 판단으로 소화기내과와 이비인후과 환자를 마취통증과나 가정의학과 쪽으로 돌리라는 처방(?)을 내렸다.


  일반외과 환자의 진료차트가 줄어들자 중혁 씨가 진료실 밖으로 나와서 “내 환자가 다 어디로 갔느냐?”라고 말했다. 상황을 설명하니 다시 환자들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했다. 조금은 화가 난 표정이었다. 이런……. '내 환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마감 시간은 다가오는데 일반외과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운영진 쪽에서 다시 나섰다. 6시까지 진료를 마치게 해주라는 주문이었다. 치과 같은 경우는 진료시간을 고려해 4시경부터 마감을 한 상태였다. 중혁 씨는 가능하다고 했다. 지금까지 속도로 봤을 때 불가능해 보였으나, 해냈다.


  모든 진료 일정이 끝나고 중혁 씨는 나를 찾았다. 화를 낸 게(벌컥 내지 않은 화도 화라고 해야 하나?) 미안했던 모양이다. 이유에 관해 설명했다. 요지는 '초음파를 꼭 봐주고 싶은 환자가 있었는데 여기 장비로는 좀 힘든 환경이라 시간이 지체되었고 다른 의사들에게 자신이 이비인후과와 소화기내과를 봐주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지켜주고 싶었다'였다. ‘초음파 진료를 꼭 해주고 싶었다’에서는 짠 내 나는 연민이 엿보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책임감이었다. 흔쾌히 나는 '노~ 프라브럼'으로 화답했다. 그도 밀려드는 환자들에게 물리적으로 힘든 시간이었을 텐데 말이다. 마음과 다르게 저녁 5시쯤이 되면 다리도 아프고 피곤도 밀려들어 시계를 자꾸 보게 됐다. 한 명의 환자라도 더 봐주고 싶어 했던 중혁 씨의 마음이 느껴졌다. 환자를 대할 때의 진지하고 약간 신경질적인 표정은 또래들과 있을 때 천진함으로 바뀌었다. 모여서 사진을 찍을 때면, “저도요”를 외치며 어느새 프레임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 갓 서른이 넘었을 그 나이도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치위생사인 미호 씨도 스물아홉이었다. 통통 튀는 밝음이 주변까지 환하게 만드는 청춘이었다. 그녀 또한 다니던 치과를 그만두고 잠시 쉬는 틈에 의료봉사에 참여했다고 했다. 주말도 없이 일만 시키는 병원장은 매력이 없다가 사표를 던진 이유였다. 언제든 재취업이 가능한 업종의 자유로움도 있겠으나 그녀가 그만둔 이유가 맘에 들었다. 주말도 없이 번 돈으로 의료봉사를 오는 그런 청춘이라 더 아름답다.


  누구나 힘들면 초심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게 가장 단순해서 최선이다. 그게 싫으면 ‘아님. 말고’의 정신으로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도 괜찮다. 살다 보니 다 괜찮더라. 그 사람은 그 사람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괜히 성격에 맞지 않으면서 따라가려 하면 부작용만 커진다. 그녀의 선택이 단순하고 명징해서 좋다.    


오규원 시인의 <버스 정거장에서>라는 시가 있다.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    


<그 뒤에 이렇게 붙여 본다>    


밀려드는 환자들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저 젊은 의사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저들의 사명감, 웃음, 청춘이 골방에 갇히지 않고 맑아서 좋다. 더욱 넓은 세계로 계속해서 나아가길, 그래서 자기만의 방에 갇히지 않고 살기를, 시(詩) 같은 존재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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