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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빛 Jan 02. 2024

세상이 음악이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오랜만에 모차르트 교향곡을 들으니 10여 년 전 생각이 난다. 모차르트 음악을 내 음악 인생의 첫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방에 있는 중간 사이즈의 오디오에 모차르트 교향곡 CD를 넣으면 마음이 따뜻해졌고, 외울 때까지 무한 반복해서 들었다. 지금도 당시에 내 최애 교향곡이었던 <교향곡 25번>과 <교향곡 40번>,  <교향곡 41번>을 들으면 당시 스펀지처럼 음악을 빨아들였던 그때의 느낌이 되살아난다. 그 시간들이 없었으면 나는 지금 음악과는 무관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모차르트 하면 떠오르는 건 '무결한 음악'이라는 것이다. 언젠가 클래식 FM 라디오 중 '장일범의 가정음악'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연주회 표 추첨에 당첨되어 서울의 세종문화회관에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연주회>에 간 적이 있다. 내 생에 가장 실망한 공연 중 하나였는데, 실망한 이유는 첫째로 연주자가 실수를 너무 많이 했던 것인데,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상상을 여러 번 했던 기억이 날 정도로 심각했다. 둘째로는 내가 음감이 좋고, 그 곡을 다 외웠기 때문에 실수를 알아챈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음악이 바로 '모차르트의 음악'이어서 실수가 더 티가 났는지도 모른다. 모차르트는 단 하나의 필요 없는 음도 사용하지 않았다. 악보의 모든 음표가 각자의 가치를 지니고 있고, 지시된 건반 외의 다른 건반을 누르면 유리잔에 금이 가듯 음악이 깨져버리게 된다. 마치 동요 나비야를 부르는데 '솔미미 파레레 도레파솔 솔솔솔'로 부르면 누구나 잘못된 것을 알아채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모차르트와 비견되는 베토벤은 그의 음악 인생이 끝날 시기에 당시에 가장 중요시되었던 음악 형식적인 법칙을 와해시킨다. 예를 들면 피아노 소나타는 대부분 3, 4악장인데, 베토벤은 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를 2악장으로 작곡하고 첫 악장은 이 세상 지옥을, 마지막 악장은 죽음 뒤의 천국으로 묘사했다. 서양음악사에서 베토벤만큼 초기 작품과 말기 작품의 변화가 극명한 작곡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반면에 모차르트의 음악은 글쎄. 젊은 나이에 요절해서 그런지 음악이 절정에 다다를 법한 시점에서 변화가 보이지 않고 더 이상 작품이 없다.

    내가 생각한 모차르트 음악 중 절정에 이른 음악은 바로 <레퀴엠>이다. 세상에 수많은 작곡가의 레퀴엠이 있지만,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레퀴엠 장르의 꽃이자 빛이다. 마치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뛰어넘는 작곡가가 없다는 말처럼, 레퀴엠은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가장 아름답고 어두우며 가장 빛나고 절망적이다. 삶이 무너지는 듯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절망조차 아름다운 음악. 어쩌면 모차르트는 비참하지만 음악으로 인해 빛나는 자신의 인생을 표현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관람한 수많은 클래식 공연 중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완전하고 광활한 음향의 공연으로 손에 꼽는다. 그날의 일을 분명히 기억한다. 매번 마음에 드는 공연이 있으면 가서 부담 없이 경치도 보고 음악도 즐기는 편이라 그날도 기분은 좋으나 한편 죽음을 표현한 레퀴엠을 들을 것이니 약간의 꿉꿉함을 가지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내 눈앞이 하얗게 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내가 없어지는 경험을 했다. 이 세상에 음악만 남은 느낌. 나의 몸과 정신이 느껴지지 않고 음악으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그 음 하나하나가 살아있어서 나를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세상이 음악이었다.


스탕달 신드롬: 뛰어난 예술작품(미술작품이나 문학작품 등)을 보고 순간적으로 흥분 상태에 빠지거나 호흡곤란, 현기증, 위경련, 전신마비 등의 이상 증세를 보이는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공연장에서 혼자 울었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다. 내가 내 몸에 갇혀있는 것을 인식하자 못 견딜 정도로 벅찼던 모양이다.      .         이런 황홀한 경험이 쌓여 나를 살아가게 한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니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감정이 생생히 느껴진다.

    음악은 나에게 이런 것이다. 음악은 나 자신이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음악은 좋은 친구’가 아니다. 음악은 내 기쁨이자 절망이고 내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나무처럼 곧고 넓게 뻗어가는 가지이기도 하다. 음악을 듣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기며 음악으로 다른 사람에게 세상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하고, 나아가 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서 기쁘다.

    음악은 나에게 목적이다. 나에게 음악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소리 그 자체이며 어느 것의 수단도 아니다. 음악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나에게 ‘추함’은 음악이 아름답다는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추함 자체가 또 다른 아름다움이 되기는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모차르트의 음악은 음악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담는 음악으로서 아주 완벽하다. 단순하고 가벼우면서도 아름다움이 가득 차있지만 내면의 어두움과 절망이 깔려있어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색으로 표현하자면 '광택이 있는 노랑과 주황빛'의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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