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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빛 Jan 18. 2024

당신의 오랜 팬으로부터.

카푸스틴(1937~2020)

카푸스틴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 사는 당신의 오랜 팬, 달덩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음악을 알게 된 것은 제가 대학생 때였어요. 저는 방학 때면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하루종일 듣곤 했습니다. 어느 날 오후 2시쯤 저는 당신의 한 음악을 듣게 되었습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주제를 따온 6개의 피아노 변주곡이었죠. 한국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연주(듣기 링크)였습니다. 그 후로 전 당신의 음악에 마음을 빼앗겨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재즈 음악에 눈을 뜨고 관심을 가지게 된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보다 클래식과 재즈를 완벽히 조합한 음악을 찾기는 힘들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일명 ‘덕질’을 시작했습니다.

니콜라이 카푸스틴. 파리의 눈 같은 안경과 커다란 눈, 시츄 같은 얼굴상이 인상적이다. 그의 곡은 피아노 연주자에게도 연주하기 매우 어려운 곡으로 꼽힌다.

인터넷을 뒤져 당신의 프로필은 물론 연주영상, 작곡 리스트 정리, 유튜브에서 영상을 캡처해 악보를 만들고 주위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어보라고 강력하게 권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덕질을 했습니다. 당신의 파리대왕 같은 안경을 쓴 생각보다 귀여운 모습으로 본인의 즉흥곡을 연주하는 영상(영상 링크)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답니다. 'Kapustin plays Kapustin', 카푸스틴이 카푸스틴을 연주한다니, 정말 멋지지 않나요!

마침내 저는 인터넷을 뒤져 당신의 러시아 주소까지 알아내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살아계시니 어떻게든 싸인 하나라도 받아야겠다는 다짐으로요. 제가 다니는 학교에 계신 교수님들 중 당신의 모교인 러시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분이 계셔서 통역을 부탁드릴까 생각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실천은 하지 못하고 음악을 그만둬버렸고, 당신과 당신의 음악은 제 마음속에만 머물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난 지 약 3년이 되었지요. 비록 늦었지만 이 편지에 담긴 제 마음이 당신께 닿기를 바라면서 써내려 갑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카푸스틴, 당신의 음악은 재즈가 클래식에 담겨져 있습니다. 제가 느낀 바가 당신의 의도와 일치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재즈 음악에서 주로 사용하는 화음과 리듬을 클래식의 소나타, 변주곡과 같은 틀에 정확히 넣어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그냥 들어보면 재즈음악 같지만 촘촘히 설계된 악보를 보면 영락없이 클래식 음악입니다. 아직 병아리였던 대학교 1, 2학년 시절의 저에겐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지금도 당신의 음악을 들으면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재즈 연주자 입장에서 보면 당신의 음악은 모순으로 가득차있는지도 모릅니다. 재즈의 핵심은 '즉흥연주'인데, 당신의 음악은 즉흥연주와는 거리가 머니깐요. 일반적인 클래식 음악처럼 악보에 모든 음표와 연주 지시어가 완벽히 기록이 되어있고, 단 하나의 음이라도 잘못치게 되면 완성도가 떨어집니다. 아마 '재즈'라는 음악적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겠지만, 재즈를 음악 속 재료로써의 역할로만 국한하여 클래식 작곡가를 표방하고자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의 곡은 제가 연주하기엔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뭐라도 있겠지 싶어 열심히 뒤지다가 저에게 딱 맞는 곡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작은 소나타라는 의미의 짧고 간단한 피아노곡 '소나티네'(음악 듣기) 입니다. 나같은 비전문가를 위한 곡도 만들어주셨구나 하며 매우매우 감사했습니다. 이 곡을 연주하며 행복했습니다. 비록 소나티네지만 당신의 작품을 마스터했으니 나름 성공한 덕질이었다고 자부합니다.

    언젠간 피아노 연주 기술을 연마해서 당신의 '연주용 에튀드'(음악 듣기)와 '피아노 소나타'(음악 듣기)를 연주할 수 있겠지요. 강의 상류처럼 빠르게 흐르는 음들 속에서 반짝거리며 튀어오르는 선율이 언젠가 제 손에서 흘러나오기를 기대하고 다짐해봅니다. 마지막으로, 제게 새로운 음악과 기쁨을 선사해주신 당신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한국에서. 달덩이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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