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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 산에 뜬 달 Mar 20. 2023

누구나 춤을 춘다

영화 <애프터썬>, 2022, 감독 샬롯 웰스, 영국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쬐이고 나면 살갗이 검붉게 익어 하얀 허물로 떨어져 나간다. 후끈거리고 쓰라리지만 어느 순간 아프지 않다. 내 일부였던 피부는 더 이상 나에게 없고, 새 살이 돋았으며, 다만 그 흔적이 오랫동안 흐릿하게 남는다. <애프터썬>은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흐릿하게 남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소피는 생일날 애인에게 생일축하 인사를 듣고 어릴적 아빠와 같이 떠났던 여행을 떠올린다. 다정한 성격의 아빠 캘럼은 리조트 여행객들로부터 오빠로 오인될 만큼 젊다. 아빠는 이혼 후 런던으로 이주해 떨어져 살고 있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궁핍하고 불안한 기색이다. 하지만 그간 주기적으로 소피를 만나 아빠 노릇을 하려고 노력해왔고, 전처하고도 나쁘지 않게 헤어졌는지 긴 통화끝에 사랑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혼했는데도 그런 말이 이상한 소피가 묻자 헤어져도 가족이니까라고 하지만, 엄마와 자신이 있는 스코틀랜드를 떠나 왜 런던으로 갔냐는 질문엔 과거는 과거일뿐이라고 한다. 소피에게는 아무래도 이상하게 느껴질 말이다. 31살 아빠의 생일을 소피의 부탁을 받은 여행객 모두가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며 여행이 마무리되고, 부산스럽고 다정한 인사로 아빠와 딸은 헤어진다. 그 해 여름 튀르키예에서 찍은 영상을 돌려보는 소피의 눈빛은 어딘가 캘럼의 눈을 닮아 있다.


‘그래 이거군, 여기서 일이 나겠어'하는 장면이 몇번 있었지만, 번번히 영화는 불온한 나의 기대를 배신한다. 영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날 법하지 않은가. 여행지에서 만난 또래들에게 몹쓸일을 당한다거나, 부모가 여행지에서 아이를 유기한다거나, 아이를 두고 부모가 자살을 한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나는 이 일들이 전부 이 영화에서 일어날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넷플릭스를 너무 많이 봤군. 안심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런 일들로만 세계가 균열이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들로만 삶이 서글퍼지는 것이 아니다. 영화 <올드보이>이우진의 대사처럼 바위든 모래알이든 물에 가라앉는 것은 마찬가지다. 캘럼의 수경(水鏡)이 소피에게 닿지 못하고 너울너울 끝없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젊은 아빠 캘럼의 모습은 우울했다가 밝았다가 종잡을 수 없다. 식사후 계산을 하지 않고 같이 도망을 치자 하거나, 소피와 다툰 후 소피를 혼자 두고 숙소문도 잠가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어린아이처럼 팔을 다쳐 깁스를 한 상태로 여행을 왔고, 다 낫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도 깁스를 혼자 풀다 상처를 내 욕실바닥에 피를 뚝뚝 흘린다. 남의 시선은 상관없이 태극권을 시전하기도 한다. 소피는 보지 못했지만 발코니 난간에 위험하게 올라가 있거나, 술에 취해 파도가 넘실대는 검은 바다로 들어가기도 한다. 아끼는 수경(水鏡)이 바다에 빠지자 지나치게 상심해 소피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 한다며 집요하고 그악스럽게 소피의 손목을 잡고 호신술을 알려주는데, 소피는 아빠의 들뜬 열정이 부담스럽지만 거절할 수 없다. 호신술 대신 여느 아빠처럼 어린 딸 옆에 있어줄수는 없는거냐고 소피는 묻지 못한다. 30대 젊은 아빠가 불안과 슬픔, 격정을 먼저 선점해 버렸으니 어쩔수 없다.


여행 끝에 소피는 캘럼의 생일을 맞아 작은 이벤트를 준비한다. 11살 생일이 어땠느냐고 묻는 소피에게 캘럼은 자신의 생일날 가족들 아무도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해준적이 있다. 소피는 같은 관광버스에 탄 여행객들에게 숫자를 세면 다 같이 자신의 아빠에게 생일축하 노래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소피의 신호에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는데 노래를 부르는 소피와 관광객들은 언덕 아래에 있고 캘럼은 혼자 언덕위에 있다. 햇볕을 등지고 서 있어 음영이 진 캘럼의 표정은 어딘가 당혹스럽기도 하고, 곧 울음을 터트릴것 같기도 하고, 심지어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빠를 소피는 말간 눈으로 올려다본다.


캘럼이 춤추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같이 추자고 이끌어도 소피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흔들 흔들 눈을 감고 춤을 추는 캘럼이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아 이질감과 아득함을 느낀다. 소피의 시선으로 캘럼을 보자면 그 춤은 어딘가 불안하고, 춤추는 아빠를 바라보는 소피의 눈길은 서글프다. 영화가 끝난 후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텅빈 객석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캘럼의 춤이 다르게 느껴진다. 누구나 자신만의 춤을 춘다. 삐걱대고 이해받지 못하는 춤. 하지만 춤을 추고 있노라면 저마다의 몸짓으로 온전히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손을 뻗어 누군가를 초대해도 그가 움직이는 공간으로는 들어갈 수 없고 그 몸짓대로 춤을 출수도 없다. 우리는 각자 캘럼처럼 춤을 춘다.


이 영화의 포스터는 마치 소피의 책상 서랍 맨 밑바닥에서 발견된 사진으로 만들어진것 같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회상할 때 포스터처럼 접혀진 대표 이미지로 기억하거나 다른 색감으로 기억한다. 책상을 정리하다 발견된 빛바랜 사진을 손에 들고 자리에 주질러 앉아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달콤하고 씁쓸하다. 게다가 아무리 많은 조각을 떠올려도 그 때를 온전히 재현할 수도 없다. 내리쬐는 햇볕의 간섭으로 이렇게도 보였다 저렇게도 보였다 할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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