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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 산에 뜬 달 Mar 27. 2023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지난밤 꿈에 아버지가 나와서 쓰는 이야기

동래정 씨 문익공파 30세손 '모'자를 돌림자로 쓰는 나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무슨 일이 이러저러해서 내 입장이 이러저러한데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라는 자초지종 명확한 이야기가 아니다. 술에 못 이겨 고개를 푹 숙이고 조는 듯, 생각하는 듯, 흐느끼는 듯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벽력같이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그때는 그 말이 궁금하지 않았고, 뒤늦게 궁금해졌지만 아버지가 안 계시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은 대체로 일 같은 것으로 시작된다. 내 고향은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한 섬인데, 그 시절엔 뭍으로 이사를 와서 보니 그 섬에 대해 들어본 사람 하나 없는 가난하고 그저 그런 섬이었다. 어릴 적 우리 동네에선 김양식장을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었고, 수확철이 되면 집집마다 미끈한 김이 둘둘 감긴 길고 커다란 나무들이 분배되었다. 경운기 가득 윤기 나는 검은 김이 두툼하게 감긴 대나무 지주를 실어오는 아버지의 얼굴은 의기양양했다. 지주에 말린 김을 뜯어내어 물과 함께 큰 다라이에 넣어두고, 김발이라고 불리는 대나무발에 사각틀을 이용해 한 장 한 장 얇게 김을 떠내어 말려야 한다. 사람손이 많이 필요한 노동집약적 가내수공업이다. 고양이 손까지 빌리고 싶은 고되고 또 고된 노동이었다.


나는 그때 몇 살쯤이었을까. 세 살, 네 살? 그 대나무 김발들을 정리하는 일을 했던 게 기억난다. 햇볕에 말린 김을 떼어내고 난 후 한쪽에 집어 던져져 수북이 쌓인 김발. 그 김발을 네 귀를 맞춰 정리해야 했는데 조막만 한 손으로 꽤 집중해서 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명절에 이 이야기를 했더니 언니들이 난리가 났다. 야 네가 무슨 일을 했다고 그러니. 내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면서 큰 줄 아니 서로 목청을 높였다. 언니들 말이 맞을 것이다. 내가 했던 일은 일은 놀이에 가까웠을 것이다. 언니들은 밭에서도 일하고 갯벌에서도 일하며 컸다. 동래정씨 문익공파 30세손 아버지가 가난하면 31세손으로 돌림자 "경"자를 쓰는 딸들도 가난한 법이고 어려서부터 일에 내몰렸다. 그래도 그 김과 관련된 일들은, 그 일의 순간들은 고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잔치 있는 집 마냥 분주하고 좀 신났던 거 같다. 하지만 기억들은 왜곡돼서 저장되기 일쑤라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에 난 내 추억에 대해 좀 자신이 없다.


아버지가 어린 나를 목말 태워 아랫집에 내려놓고 김양식장으로 향하면,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산 두 개를 넘어 도착한 학교 앞에는 염전이 있었고, 누군가 우리를 알아보고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멀리 염전의 물레방아를 돌리던 아버지였다. 밭에 나간 부모님과 언니들을 기다리며 네 살 터울 동생을 업고 삽작문에서 하염없이 동생이 잠들기를 기다리던 일은 자주 있었다. 동생이 드디어 잠들어 축 늘어질 때의 무게를 기억한다. 동생한테 이 이야기를 하며 지난 세월 참 많이도 유세를 떨었다.


그 시절 아버지는 젊고 몸이 재고 다정했지만, 우리 집이 받아온 김에는 파래가 많이 섞여 수입이 초라했고 아버지는 참새처럼 줄지어 벌린 아이들 입이 무서웠다. 어부이기도 농부이기도 했던 아버지는 도시로 올라와 결국 막노동과 경비일을 거치며 가난한 도시노동자로 늙어갔다. 중학교 2학년 때 집 근처 공사장을 지나다 등에 가득 빨간 벽돌을 지고 조악한 널빤지 경사로를 천천히 올라가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가 한걸음 걸을 때마다 널빤지는 휘청 휘청 크게 호를 만들며 휘어졌고 나는 그게 조마조마하고 서러워서 조금 울었던 것 같다. 그 섬에 있었을 때 아버지의 일은 서럽지 않았는데, 도시에선 그 등에 우리가 다 올라타 그렇게 휘청댈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은 아버지가 자신의 몸을 노동과 알코올로 조금씩 망쳐가며 번 돈으로 그럭저럭 컸다.


아버지는 술을 취하면 경기도인가 경상도인가 어딘가에 있어 문중 사람들하고 버스를 대절해 가봤다는 동래정 씨 시조묘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묘가 얼마나 의리의리한 지 이야기하셨다. 무덤을 자랑하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몇백 년 전 죽은 조상의 무덤 이야기를, 매번 마치 처음 알려주는 것처럼 붉은 눈으로 이야기하셨다. 풍수지리 좋다는 그 무덤이 그 시절 비틀대던 아버지의 위안이었을 걸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우리가 다 커서 이제 더 이상 크지 않고, 키워야 할 손주들이 이 집 저 집 쏟아진 이후로 아버지는 술을 끊으셨다. 그리고 점점 말을 잃어갔다. 술에 취할 때만 말을 하던 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3년 전 12월 폐암 진단을 받고 이듬해 2월 호스피스 병동에서 돌아가셨다. 전 세계에 번진 역병으로 임종을 지키는 인원도 엄격하게 제한을 해 우리는 슬픔의 무게를 재어 더 슬픈 사람에게 양보해야 했다.


아버지는 평생 나에게 막막한 존재였다. 이해하기 힘든 존재, 그래서 이해받지 못했던 존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던 사람이었다. 자주 술에 취해 모진 말과 행패로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 살아계실 때는 원망이 앞섰고, 돌아가셨을 때는 죄책감이 들었다. 장례 내내 나는 섧게 우는 언니들 옆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생전 자식들이 어디 좋은데 모셔다 드리냐 물으면 항상 바다에 가자 하셨다. 하지만 그 바다는 이미 그 옛날 아버지가 물질을 하고 김을 키우던 바다가 아니다. 모시고 가면 먼 초점으로 바다인지 하늘인지를 오랜 시간 바라보셨다. 그런 그를 그가 난 곳으로 돌려드리지 못하고 층층이 좁은 납골당에 모신게 후회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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