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을 본 후 영화와 헤어질 결심을 못하고 한동안 서래의 마침내체를 시도때도 없이 구사해 가족들을 괴롭혔다. "먹는구나, 마침내", "니가 시험을 망쳤구나, 마침내". 영화를 안 본 가족들은 나의 이상한 말투에 어리둥절해하다 내가 흥분해서 설명하려는 기색에 곧 관심을 끊었다.
이 영화의 대표 커플은 명실상부 해준과 서래지만 해준(박해일)과 후배 형사 수완(고경표) 커플을 보는 재미가 있다. 해준 & 서래는 멜로와 서스펜스를 담당하고, 해준 & 수완은 개그를 담당하고 있다. 영화 도입부분 등강기 장면부터 둘의 티키타카가 재밌다. 우스꽝스럽게 등강기에 2인 1조로 매달려 구도산 비금봉을 올라가는 장면말이다. 해준은 '죽은 사람이 간 길이니 우리 경찰들도 가야한다'며 멋지게 들리지만 사실상 헛소리를 하는데, 해준이 이 말을 할수 있는 이유는 그나마 폼을 유지한 채 산 정상을 올려다보며 들어올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완은 꼴사납게 해준과 등을 맞대고 대롱대롱 매달려 땅을 향한채 추락의 공포를 직면하고 있다.
아이 재밌는 비금봉 등산~
미혹되는 자 해준(박해일) - 부산서부경찰서 강력2팀 팀장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
형사라는 직업으로 볼때 해준은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스타일이다. 험한 현장과 잠복근무가 일상이지만, 항상 넥타이까지 맨 단정한 정장차림이다. 사건에 대한 집중력도 대단하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오래된 살인사건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칼을 가지고 덤비는 용의자를 금속재질 장갑낀 손으로 제압하고, 취조할 때 욕설로 압박하는 부하에게는 나랑 일하고 싶으면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도 한다. 실력과 품위를 다 가진 형사, 그는 스스로에게 자부심이 있다.
그런 그가 서래의 남편 기도수가 죽은 사건에서는 그야말로 여자에 미쳐버린다. 영화에서 그가 서래에 미쳐버리는, 첫눈에 반하는(상투적이라 쓰고 싶지 않지만 이 말이 가장 정확하다.)장면이 재미있다. 서래가 처음 등장하는데 서래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등을 걸고 계속 해준의 얼굴을 보여준다. 첫눈에 반해서 소년처럼 삐걱 삐걱 행동한다.
그렇게 서래에 미쳐버린 해준은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근거를 찾아대고 그녀가 범인이 아니게 만든다. 범죄의 진상을 밝히고 범인을 가려내는 게 본질인 자신의 직업을 먼저 적극적으로 배신한 것은 그였다. 그를 따르고 존경하는 후배 형사 수완(고경표)이 그녀를 의심하고 경계하라고 알람을 하는데도 그는 모른척 알람을 끈다. 그랬으면서 뒤늦게 진실을 직면한 그가 서래에게 하는 저 말, 나는 자부심을 가진 경찰이었는데 너 때문에 나를 망쳤다는 말은 어딘가 많이 뻔뻔하다.
이거 다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
의심하는 자 수완(고경표) - 부산서부경찰서 강력2팀 형사
"한 가지 확실한 건, 절대! 자살은 아니다....힘들게 여기까지 올라와서 그럴 사람이 있겠어요?"
"그 정도면 절벽에서 확 밀어 버리고 싶지 않을까요?"
"용의자 말을 '너무' 들어주시는 거 아니예요?"
"자살, 확신하세요?... 물론 엄마를 죽인 게 남편 죽인 증거는 아니죠. 근데 형 이런 말 한 적 있잖아요. 살인은 흡연과 같아서.....처음만 어렵다."
수완은 해준의 무리한 수사기법(?)에 자주 동원되는 모습이다. 열혈 팀장 해준덕에 거꾸려 매달려 비금봉 정상까지 올라가야 하고, 관심에서 밀려난 미결 살인사건 용의자의 잠복근무를 수완에게 떠밀려 맡기도 한다. 항상 툴툴대는 모습이지만 해준을 존경하고 좋아한다. 해준이 서래를 취조한 후(그게 무슨 취조인가. 연애지. 취조실에서 살림차린줄 알았다.)서래에게 비싼 모듬 초밥을 시켜 준 걸 알고 배신감과 질투를 느낀다. 도주를 하는 용의자에게 칼로 찔려 바닥에 뒹글면서도 장전된 총을 해준에게 던져주어 검거를 돕는 민첩함도 있다.
해준이 서래에게 미쳐버린것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지 못할때 수완은 알아차린다. 사실 그건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다. 사랑에 빠진 바보들만 모를 뿐이다. 오랫동안 아내를 학대하던 남편이 죽으면 그 아내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올려놓는것이 당연하다. 남편이 죽었는데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어눌한 척하는 서래가 수완은 영 수상하다. 수완은 해준이 수집된 증거를 서래가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 같아 염려스럽다.
수완은 직관과 이성으로 메뉴얼에 입각한 일처리를 하는, 현실적인 형사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난 내가 용의자가 될 일이 있으면 수완이 나를 담당해 줬으면 좋겠다. 형사를 매혹시킬 자신이 없어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형..저한테 왜 그랬어요?
해준과 수완의 비금봉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해준이 죽은 사람이 올라 간길 운운할때 수완은 그럼 내려갈 땐 피해자가 죽은 것처럼 세번 부딪히면서 떨어지냐고 항변한다. 해준은 그렇게 요란하게 비금봉 정상에 올라가 놓고도 진실을 보지 못했다. 오랫동안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는 무모한 눈은 잔상이 남아 시야를 방해한다. 해준이 보려고 하는 진실은 서래의 원피스 색깔처럼 녹색인지 파랑색인지 혼란스럽다. 그래서 해준이 탁하고 건조해진 시야에 자주 인공눈물을 들이붓는지 모르겠다. 진실은 수완처럼 햇빛을 등지고 눈을 가늘고 뜨고 참혹한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때에야 윤곽이 떠오르는 건 아닐까.
그래서 이 커플이 합이 좋은 것이다. 미혹되도 괜찮은 무모함과 게으름을 가장한 이성으로 뭉친 환상의 커플이다. 박찬욱 감독이 이 두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쭈니와 와니 - 서래와 헤어지고 십년 후> 형사버디물을 꼭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p.s.
<헤어질 결심 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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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각본
<헤어질 결심 스토리보드북> 오리지널 콘티 전체가 수록된 스토리보드북입니다. 최종편집에서 삭제된 장면도 볼수 있고, 중간중간 영화 스틸 사진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