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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 산에 뜬 달 May 08. 2023

아침밥이 있는 풍경

[아침] : 아침등을을 차리다라는 뜻의 동사. 명사아님.

코끼리 도시락


아침은 '아침밥을 차리다'의 줄임말이다. 나는 아이들의 아침밥상이 되어야 한다. 남편의 도시락이 되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꼽도 못떼고 식구들 입에 들어갈 것들을 준비해야 하고 점심도시락을 싸야 한다.

큰 아이는 고3이다. 공부와 게임으로 부족한 잠 때문에 복제에 성공한 공룡처럼 힘들게 깨어나는데 그 까실한 입에 뭐라도 넣어 등교시키고 싶어 냉장고 위아래를 여닫으며 아침식사를 급조한다. 어젯밤에 미리 좀 준비하면 좋았겠지만 나는 어제도 바빳다. 다음날 아침에 해도 될일을 미리 미리 하지는 말자. 어떤날은 콘프레이크, 어떤 날은 삶은 계란, 어떤 날은 고구마, 어떤 날은 전날 먹다 남긴 치킨조각을 데워주기도 한다. 사랑과 정성이 다소 모자라 보인다구요? 눈치 빠르시긴. 하지만 큰 아이는 불평하지 않는다. 주는 대로 먹는다. 더 필요한 거 있니? 없어. 괜찮아. 짧게 말한다. 저 녀석은 어릴때 부터 그랬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 뒤늦은 공부를 하느라 애쓰는 큰 놈의 등을 두덕여 엘레베이터까지 배웅을 한다. 우리는 지은지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아침 배웅을 하러 복도에 나오면 좋다. 엘레베이터에 탄 아이와 눈을 맞추고 손을 흔들어주면 자애로운 엄마, 좋은 엄마가 된 것 같다. 무엇보다 그 날 아침의 온도와 습도 공기상태를 몸으로 느낄 수 있어 좋다. 아 나는 당연한 소리를 대단한 것처럼 하는 재주가 있구나.

남편은 침대에 누운채로 스마트폰 앱이나 AI스피커한테 그 날 온도나 풍속(배드민턴을 치는 그에겐 풍속이 중요하다.)을 묻곤 하는데 나는 그게 세상 이상해 보인다. 문만 열면 밖인데 왜 온도와 바람과 공기를 직접 느끼지 않는가. 언제부터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고 쯧쯧쯧. 혀를 차보지만 뒷방 늙은이는 이런 식으로 되는구나 싶다.


아들이 내려간 엘레베이터를 타고 남편이 운동에서 돌아오기도 하는데 남편의 아침이라고 큰 아이 메뉴와 다를 리 없다. 큰 접시에 준비된 먹을 거리를 남편몫으로 배급하는 정도다. 남편도 주는 대로 먹는다. 간혹 용기를 내어 불평하기도 하는데 "그거라도 먹을래? 아니면 굶을래?"라고 하면 남편은 그거라도 먹는 선택을 한다. 남편이 현명한 순간이다.


남편은 아침을 먹다말고 아직 자고 있는 작은 녀석을 깨우러 간다. 땀에 절어 축축한 얼굴을 들이대며 까실한 수염뽀뽀를 한다. 작은 아이는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며 잠을 깬다. 하지만 나는 저 녀석이 이미 깨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침밥을 준비하는 소리, 음식 냄새, 큰아이와 내가 나누는 대화,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다정하고 높은 톤의 인사, 아빠가 깨우러 오는 발걸음...그 소리들, 냄새들, 아빠가 자신을 곧 깨우러 올것이라는 기대로 잠이 서서히 깨었을 것이다. 작은 녀석은 새처럼 먹는다. 작은 키와 작은 얼굴과 작은 위를 가지고 있으니 아침도 새모이처럼 조금만 먹는다. 올해도 키번호 1번이라는데 그나마 자기 키에 대해 속상해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는 아이에게 여러 유전형질을 물려줬는데 그 안엔 작은키에 대한 유전정보가 손실없이 가득 전해진 모양이다. 내가 노심초사 아이의 키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이유다. 미안. 넌 나처럼 작을거야. 그래도 자신의 속도로 쉼없이 자라고 있다. 옹종옹종 먹는 작은 아이의 입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본다.


남편과 작은 녀석이 아침을 먹는 동안 남편의 도시락을 준비한다. 나도 같이 출근하는 날이면 도시락 준비가 좀 더 길어진다. 남편은 최근 체중감량을 하라는 의사의 명이 떨어졌고, 고혈압과 고지혈증으로 약을 복용하고 있어서 다이어트 식단이 필요하다. 야채와 닭가슴살 구운계란이나 과일등으로 싸주고 있는데, 준비하다 보면 동물원 사육사가 된 기분이다. 나는 이것을 코끼리 도시락이라고 부른다. 비쥬얼이 딱 그렇다. 반찬을 네댓가지 이상 조리해서 싸주던것보다 코끼리 도시락이 수월하긴 하다. 남편도 쉰이 넘어 생명연장의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시락 내용에 이의가 없다. 색색깔 고운 도시락을 싸주셔서 감사합니다 점심 인증샷을 가족 단톡방에 올린 후 코끼리처럼 우적우적 먹는다.

내가 고3이었을 때가 떠오른다. 엄마는 전날 끓인 국에 전날 밥상에 오른 반찬 몇가지를 아침으로 내어주었다. 내가 늦은밤까지 이어진 공부로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며 국과 반찬은 손에도 안대고 밥에다 물을 말아 억지로 삼키는 동안, 엄마는 그 국과 반찬을 도시락에 담아 싸주었다. 그 때는 급식도 없을때라 도시락 두개를 챙겨서 학교에 가야했다. 점심도시락 저녁도시락. 저녁도시락을 열면 국이나 반찬이 쉬어있을때도 있었다. 그럴때면 푹푹 눌러 가득 담겨 쉰냄새를 풍기는 도시락이 서럽기도 했고 뜬금없이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엄마는 남편과 자식들의 밥과 도시락을 쉬지도 못하고 만들어냈지만, 우리는 아무도 엄마의 노동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쉬어버린 도시락처럼 각자 핑계를 만들어 엄마를 원망했다.

엄마에게 그 시절의 그 원망과 죄책감에 대해 말하는 날이 있을까. 그 많던 도시락들이 고마웠어. 내가 막상 음식을 해보니 엄마가 얼마나 좋은 손맛을 가졌는지 알게 됐어. 내가 가진  좋은것들은 다 엄마한테 온 걸 텐데 나는 모자라고 못생긴 것들만 눈에 담아왔어. 나는 그녀에게 이런 말들을 할 수 있을까. 아마 끝내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세 사람의 먹을것을 준비하면서도 뭘 제대로 먹은 기억이 없다. 아 작은 아이가 남긴것을 치우며 먹은것도 같다. 시어머니나 어머니는 "예전엔 밥 때 돌아오는게 제일 무서웠다"고 했다. 많은 식구의 밥을 준비하는데 들어가는 품이 얼마나 고된지 진저리를 치며 이야기하신다. 시어머니는 새벽과 함께 아침을 차리고 치우고 나면 벌써 점심이고 점심을 치우고 나면 저녁이고 그 저녁상까지 치우고 나면 총총히 별이 뜬 밤이 되어 온몸이 아프고 서러웠다는 얘기를 하신다. 지금 나의 아침은 어떠한가. 그 시절과 어머니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현대식 주방으로 로케이션과 스케일이 바뀌고 등장인물이 새로 섭외된 연속극일 뿐이다.

출근후 책상에 앉아서야 나는 비로소 여유가 생긴다. 믹스 커피에 물을 적게 부어 진하게 탄다. 숭늉같이 구수하고 좋다. 이것이 나의 아침밥이다. <광고없음 - 미술관에 온듯한 여유롭고 클래식한 피아노 연주곡 3시간 54분>을 유튜브에서 골라 틀어놓고 메일함을 딸각하고 연다.

상념은 그만.

어쨋든지 굿모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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