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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 산에 뜬 달 Jun 20. 2023

고유명사: 이순자

이순자 작가, <실버 취준생 분투기>를 읽고

커버이미지 : 이순자 작가의 유품인 노트북과 안경, 두권의 저서 ⓒ시사IN 신선영


이순자 작가의 <실버 취준생 분투기>는 아래 링크에서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news.imaeil.com/page/view/2021062614521106205


1.

이 작품을 작년 이맘때쯤 친구가 보내준 링크로 읽었다. 좋은 글이었다. 후르륵 읽었다. 긴 세월을 노동으로 단련된 사람들이 쓰는 글은 역시 힘이 있다. 글이 시작되는 부분에 실린 이순자 작가의 모습은 세상없이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모진 경험속에서도 몸을 일으켜 데뷔한 이 신인 작가가 앞으로 어떤 글을 쓸까 기대 됐다. 그러다 나는 댓글들을 통해 작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흔을 이른으로 생각하며, 기초수급자라 기초생활이 해결되었으니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매진하겠는 씩씩한 의지로 글을 맺었는데, 하...나는 마른 세수를 하며 허망해했다. 이보세요 작가님 글쓰기 수업받을 때 아이러니가 어렵다고 고백한 적이 있으시다면서요. 이렇게 본인의 삶으로 아이러니를 완성하시나요?라고 따지고 싶었다.     


2.

이순자씨는 종갓집 맏며느리로 결혼 생활을 했으며,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이십 년 이상 하기도 했다. 황혼 이혼 후 평생 하고 싶던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문예창작과에 진학했다. 《솟대문학》에 시를 발표하고, 〈순분할매 바람났네〉로 제16회 전국 장애인문학제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환갑을 넘은 나이에 취업을 하기 위해 겪은 경험을 담은 〈실버 취준생 분투기〉로 2021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에 당선되었지만 얼마 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가 사후에 가족들이 그가 남긴 글들을 모아 산문집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와 시집 《꿈이 다시 나를 찾아와 불러줄 때까지》를 출간했다.      


3.

이순자 작가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생계를 위한 취업전선에 뛰어든다. '나를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자격증이 책장 한 면을 도배할 만큼 준비'했지만 취업창구의 직원은 그의 넘치는 이력서가 부담스럽다. 눈치껏 얼른 이력서를 구겨버리고 채용된 수건 공장을 시작으로 그의 험난한 취준생 이력이 시작된다. 공장 노동, 청소일, 어린이집 주방 조리일, 입주 아기 돌보미, 요양보호사 실습, 장애인 활동 보조인.. 고되기로는 똑같지만 각각의 결로 다르게 힘들다. 요령이 없다는 타박을 듣고, CCTV에 찍힐까 노심초사하고, 언어 폭력과 성추행을 당하기도 한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는' 폭언을 들은 어느날 충격을 받아 '먼지로도 남고 싶지 않다'는 글을 남기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주변의 좋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애써 일어나 보았지만, 혹독한 노동과 위선적인 이용자들에 지쳐 서럽고 분노가 치미는 날들은 계속된다.   
   

4.

하지만 그는 공장일로 본인이 몸이 아픈 와중에도 타국에서 고생하는 어린 외국인 노동자들을 생각하며 잠을 설치는 사람이고, 자비 없는 노동에 지쳐 밥해 먹을 힘도 없는데 노점상 할머니의 호박잎을 사는 사람이다. 어린이집 주방일을 할 때는 새벽 네시에 일어나 초밥을 일일이 하트모양으로 싸는 사람이고, 우울증과 치매로 말을 잃은 노인의 입을 열어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내추럴 본 오지라퍼다. 얼핏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삶의 방식이 참고 견디기만 한것도 아니다.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항의와 저항을 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방책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세 사람이 해도 못 할 일을 어떻게 한 사람에게 시킬수 있느냐'고 소리도 질러 보고, 오래된 쌀로 밥을 해 먹이려는 어린이집 원장에게 대항하기도 한다. 입주 아이 돌보미를 할때는 아이에게만 집중하기 위해 자신의 월급으로 청소 도우미를 쓰자는 제안을 하기도 하고, 출퇴근 시간을 가짜로 체크해 시간을 채우는 요령도 부리지 않는다. 그러하니 작가의 취준생 생활이 평탄할 리가 없지만 그는 몇 번이고 몸을 일으킨다.     
 

5.
이 수필에는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만난 환자들을 솔직하고 정감있게 그린 이순자 작가의 시가 두 편 소개 되어 있다. 첫 번째 시 <내해여, 내해여>는 노인보호센터에서 기억을 잃고 시들어가는 노인을 공감하며 돌보아 드렸더니 마음을 열고 인생을 들려주는 순간을 그렸다.

     

일주일 만에 처음 입 여셨다 / 샥시도 묵으야지 수저를 내민다 / 눈물 한 방울 얹어 밀어 넣자 / 내해여, 내해여 / 한껏 신명 나셨다 / 무엇이 내해일까? / 아무것도 내해인 것이 없었던 서울 살이 <내해여, 내해여>  
   

사람사는 곳은 풍경은 어디나 비슷한 법인가 보다. 자신이 있는 공간을 온기로 데우며 생기를 나누어 주는 존재들이 있다. <지루박 할머니>는 그런 인물을 포착했다.      


아~싸 머리 위 열손가락 / 엇박자로 어깨 추임새 넣으며 / 인생 뭐 별거 있냐며 / 뒤로 갔다, 앞으로 왔다 / 제대로 즐기는 살아있는 시간 <지루박 할머니>     


6.

이순자 작가는 투명인간으로서의 삶을 강요받으며 살아왔다. 고유명사로서의 '이순자'가 아니라 벅찬 노동과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종갓집 '맏며느리'로, '어머니'로 보통명사의 삶을 살아내야 했다. 이혼 후 사회에서 경험한 노동에서도 결혼생활중에 받았던 대우가 반복된다. 그럼에도 작가는 먹고사니즘의 무게와 잔인함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먹이는 거 주는 거 좋아하고 얘기하기 좋아하는' 본인의 성격을 간직한 채, 고단한 노동 속에서도 담담하게 주위를 관찰하고 불의가 있을 때는 최선의 형태로 저항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따뜻하게 곁을 내어주며 그 경험들을 위트 있게 글로 썼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크고 깊어서다. 문학공부를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는 이처럼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색깔과 양감을 가진 본래의 자기 자신을 되찾았다. 보통명사에서 거의 동사에 가까운 고유명사를 획득했다.      


7.
작가가 사방 네벽의 길이가 다른 원룸에서 다리미 판 위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연신 흘러내리는 안경을 고쳐 쓰며 타이핑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 장면은 롱 숏으로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었어야 할 장면인데 너무 일찍 검은 화면으로 전환되어 버렸다. 두고 두고 안타깝다. 작가의 산문집과 시집을 읽어야 되겠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생활인으로, "완성하는 기쁨은 나를 설레게"했던 작품들의 작가로 이순자씨를 만나고 싶다. 이른 나의 분투기가 일흔 후 삶의 초석이 되길 기원하며 죽는날까지 정진하리라 결심했던 이순자 작가. 그는 없지만 그의 이른 결심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다.




<꿈이 다시 나를 찾아와 불러줄 때까지> 이순자 유고 시집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이순자 유고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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