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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 산에 뜬 달 Jul 20. 2023

생기와 달맞이꽃

또 하나의 언어를 선물해 준 사람


이 꽃은 달맞이꽃이다. 이 맘때 어딜가나 지천으로 피어있다. 달을 맞이하는 꽃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낮에는 꽃봉우리를 오므리고 있다가 달이 뜨는 밤이 되어서야 피기 때문이다. 달맞이꽃이라는 이름답게 노란색이 많지만 분홍색이나 하얀색, 빨간색도 눈에 띈다. 이 꽃은 강한 햇볕 아래서는 꽃이 필 수 없는 유전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해가 진 뒤나 해가 없는 날에 꽃을 피울 수 있다.

내가 그린 분홍낮달맞이꽃은 달을 굳이 기다리지 않고 낮에도 꽃을 피우는 독립적인 신세대 달맞이꽃이다. 사실 귓속말로 얘기하자면 달맞이꽃이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환한 달님이 아니라 털이 부숭부숭한 박각시나방이다.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 곤충들에 의해 수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이야 산타는 없단다 하고 얄미운 소리를 한것 같지만 생명에게 수정은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달을 닮은 노란색을 하고 달을 기다리거나 나방을 기다리거나 하여간 기다리는 것이 숙명인 꽃이니 달맞이꽃이 나오는 이야기를 찾아보면 애닳는 전설로 가득하다. 구애받지 못한 처녀가 달을 보며 굶어 죽은 자리에 피어난 꽃이라거나, 난봉꾼 제우스의 심술로 죽은 요정이 달맞이꽃으로 피어났다거나 하는 얘기말이다.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꽃에 대한 신화는 여지없이 비탄의 운명에 빠진 여성이 결국은 죽어서 생긴 것이다. 자비없고 변덕스러운 남성신들을 피해 죽음의 강에 몸을 던진 요정과 처녀들이 꽃과 나무의 원형이다. 어찌됐건 그 신은 죽었고 꽃과 나무는 남아 세상을 지탱한다.      


나는 이런 달맞이꽃같은 들꽃을 그린다. 혼자서도 그리고 떼로도 그린다. 생기는 우리의 그림 선생님이다. 대략 십여년전 그녀는 '생태드로잉' 수업을 개설했는데 그 수업은 바쁜 걸음을 불러세워 나를 둘러싼 자연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해주었고, 그림이라는 또 하나의 언어를 갖게 해주었다. 그 후 수업을 들은 사람들 일부가 동아리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모여 그림을 그리고 있다. 말이 거창해 생태드로잉이지 그저 꽃을 피운 각종 풀들을 그릴 뿐이다. 우리 대부분은 그림을 배운적도 그려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라 십년을 그렸다한들 여전히 서툴고 미숙하다. 생기는 기꺼이 모임에 참석해 핑계많고 게으른 제자들을 도닥이고 그림의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      


생기는 우리에게 대상을 찬찬히 오래 바라보고 신중하게 형태의 특징을 잡아내고 가장 어울리는 색을 찾아 입히는 것을 알려줬다. 대상의 개성을 파악하고 중간에 선을 잃지 말것. 색깔은 얇고 투명하게 한층 한층 얹을 것. 정확한 색깔을 만들어낼 것. 꾸준히 그릴 것. 잘 못 그렸다고 낙담해 말것. 그런 과정에서 배우고 얻는 것이 더 많은 법이다.

그녀가 그림을 지도할때 하는 대부분의 조언은 삶을 대하는 태도에 그대로 대입해도 성립된다. 나는 그녀가 그림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우리보다 먼저 시절과 나이를 겪었고 체득한 생기와 지혜를 나눠준다. 나의 영혼에 '예술'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고상하고 은근한 빛을 내는 부분이 한 조각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그녀에게서 온 것이다.  
    

물감과 물을 흠뻑 머금은 붓을 종이위에 가볍게 눌러주면 색이 천천히 번져나가는데 그 순간은 매번 감동과 희열을 준다. 종이의 결과 골을 따라 주저없이 번져 나가는 색의 행군. 그러다 다른 색을 만나기라도 하면 저희끼리 섞이며 내가 일부러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황홀경에 비싸고 화려한 화구는 필요하지 않다. 물을 담뿍 머금어줄 도톰한 종이, 얇은 제도펜, 수채붓 두어개, 물감을 짜놓은 팔레트만 있으면 된다.      


풀꽃을 그리면서 자연이라는 다른 세상 한벌을 얻게 되었다. 그 세상은 출근길 별 개성없어 보이는 아파트 화단에도 완벽한 생태계로 존재한다. 키크고 화려한 꽃나무들 사이에서도 꿋꿋하게 순리대로 피고 지고 돌림노래를 하는 작은 아이들이 있다. 종지나물, 비비추, 털머위, 맥문동, 달맞이꽃, 접시꽃, 봉선화, 꽃다지, 개망초... 작년에 나고 자란곳을 유심히 바라보면 어김없이 쏘옥 올라와 꽃을 피운다. 나는 나직하게 탄성을 지르며 이름을 불러주고 환대한다. 반가워 반갑구나 돌봐주는 사람도 없는데 용케도 꽃을 피웠네. 아 원래 이렇게 몇천년씩 피워왔다고. 아 오바해서 미안.


꽃을 피운 풀을 발견하면 쪼그리고 앉아 눈에 담고 사진에 담고 스케치북에 담아야 비로소 삼위일체가 된다. 그것도 모자라 디테일한 생태도 궁금해지고, 나물로 먹을수 있는지 없는지(장담하건대 거의 백프로 먹을 수 있다), 이 꽃의 신화에는 또 어떤 억울한 여성이 등장하는지 등등 자료를 뒤적이게 된다. 이렇게 다른 세상 한벌은 부피를 늘려 두툼해진다. 나의 중년이후 삶은 인간 관계쪽으로는 날로 협소해지고 자연계쪽으로는 돈독해지고 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세상 한벌을 선물해 준 생기가 고맙다. 생기처럼 담백하고 담담한 생의 태도와 멋진 은발로 꼿꼿하게 늙어가고 싶다. 생기와 같이 오래도록 그림을 그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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