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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 산에 뜬 달 Jul 11. 2023

문경 사람 김옥분씨

나의 시어머니 - 다가오는 것들을 잘도 겪어낸 사람

내가 태어난 데? 말하면 니 아나? 문경 산양면 과곡리라고 있다. 우리 아바이는 이름이 김녕 김씨(金寧 金氏) 김형화여. 할매가 딸 다섯을 내리 낳고 겨우 얻었단다. 아바이 나이 열두살때 결혼을 시켰다드만. 열두살짜리가 뭘 알겄어. 어른들이 하라니까 한 거지. 신부는 아바이보다 몇살인가 더 많았다드라고. 그런데 아무리 봐도 신랑이 너무 어린께 힘들다 싶었는지 그 집서 신부를 도로 데려갔다대. 그러고 몇년 지나 아바이 나이 열다섯살때 한 살 어린 처녀랑 결혼을 했는데 그게 우리 어마이야. 내 어마이 이름은 모린다. 성은 황씨여. 그것만 기억이 난다. 왜 그렇게 결혼들을 일찍 했냐고? 일본놈들이 시집 안간 처녀는 다 일본으로 데리가 강제로 노역시킨다고 서둘러 혼례 올리고 그랬다고 하드만.


우리 어마이 생각하믄 서글퍼. 애만 줄줄이 낳고 농사짓고 살림하고 고생 마이 하셨지. 내가 맏딸이란 말이다. 어마이 나이 열여섯살에 나를 낳았어. 그 때가 1934년. 밤새 진통하다 아침 10시에 낳았다고 하대. 내 아래로 줄줄이 옥남이 옥순이 딸만 셋을 낳고 그 밑으로 사내애 둘을 더 낳았어. 넷째는 아가 백일이 좀 지났나 애 봐주던 사람이 귀엽다고 배를 시게 두드려서 탈이 나서 죽었댜. 그 밑으로도 또 사내애를 낳았는디 다섯살때 솥단지에 있던 술지게미를 먹고 죽었다는 거 아니냐. 술지게미가 얼매나 독한디. 농사를 지어놔도 일본놈들 강제 송출이 심해 먹을게 상시 궁했어. 그 어린것이 배가 고파 술지게미를 꾸역 꾸역 먹다 그리 됐지. 그때는 이렇게 저렇게 애들이 마이 죽었다. 참 기가 맥히지.


내 나이 열입곱일때 고종사촌 중신으로 시집을 갔어. 그때는 그 나이가 이른 축도 아니다. 전쟁이 나서 서두르긴 혔지. 장가 안 간 남자들은 죈부 군대를 가야했단 말이다. 우리쪽보담 저 짝 집에서 서둘렀지. 나랑 동갑내기 권씨 성 사내였어. 그러고 시집와서 몇 년 살고 있는데 친정 어마이가 돌아가셨다고 전보가 왔어. 애기를 낳다가 죽었다드라고. 내 그걸 들었을때는 하늘하고 땅이 딱 들러붙는거 같드라. 불쌍한 우리 어마이. 우리 어마이. 어마이 묻어주고 난 후 보니께 아부지가 추레한게 너무 보기 안 좋은 거라. 그래서 내가 우리 아바이 중신을 섰다.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보이 엄촌(嚴村)에 나보다 한살 더 많은 처녀가 있다길래 좀 말해달라고 했지. 애도 줄줄이 딸려 있는 가난한 홀아비지만서두 그 시절은 전쟁통이라 남자가 귀했다. 인연이 될라고 그러는지 시집온다대. 내가 그 순간 참으로 기뻤다.


새어마이는 영월 엄씨인데 나이는 나하고 한살 차이라도 내가 평생 어마이 어마이 했다. 그런데 성격이 별나. 그래도 우리 아바이한테 아들 많이 낳아주고 내 그건 고맙지. 새어마이는 아바이랑 4남 1녀를 낳았어. 우리 아바이가 암으로 쉰여덟에에 가셨는데 새어마이 혼자 아이들 키우고 살았다. 새어마이도 애쓰며 살았지. 얼마전까지도 시내에 장이 서서 나가면 가끔 마주치고 그랬다. 늙어서는 만나믄 친구같고 반갑대. 그러다 몇 년 전부터 안보인다 싶더니 이복 동생한테 전화가 왔어. 치매가 걸리가꼬 몇년 요양원에 들어가 있다 돌아가셨다드라고.


내가 시집을 와보이 느이 고모가 봉당에서 기어 다녀. 애기란 말여. 시동생들이 을매나 많은지. 시아바이는 젊어서 훈장질도 하고 사람이 천상 좋아. 맏며느리라고 나를 이뻐했다. 시어마이는 나를 곱게는 안 대했어. 밭일하고 논일하고 시동생들 밥주고 일 마이 했지. 친정서도 맏이라 어릴때부터 일을 했다만, 시집오고 나니 그건 일도 아닌거라. 느그 시아바이도 맏이 아이라. 아바이도 일 마이 하고 나도 일 마이 하고 나 젊을적 기억은 일한 거 밖에 없다. 아침 먹고 치우고 밭일 하고 점심 채리고 치우고 들일 하고 해가 져서 돌아오면 시동생들이 다 나를 보고 참새마냥 입을 벌리고 앉았지. 그 시절을 어트게 건너왔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득허다. 그래도 나는 이제 아무도 원망은 안해. 시절이 그래서 그렇지 집집마다 다 그렇게 살았다. 내 살아온게 별스럽다 생각 안한다.


느 시아바이? 시집오는 날 처음 봤지. 어땠냐고? 어떻고 말고가 어딨나. 살라고 정해주니께 살았지. 그래도 영 낯이 숭악하거나 승질이 안 좋으면 그 시절이라도 평생 살았겄나. 안 그래? 사람이 그만하니까 애 낳고 살았지. 그래도 이 사람이 결혼하고 얼마 안있어서는 술먹고 나를 패고 그러대. 내가 술깨고 크게 뭐라고 한 소리를 했다. 내가 뭘 잘 못 했냐고. 살림하고 농사짓고 애 낳고 고생하는데 나를 왜 때리냐고. 뭐라 드라. 동네 남정네들이 즈들 여편네 때리고 사니까 그래도 되는 건줄 알았다드라.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든가. 하이고 콧구멍이 두개라 숨을 쉬지 참 어이가 없는 소리를 하드란 말이다. 하여간 또 이라면 가만 안 있는다고 소리 소리 했드만 그 때부터 싹 안 그러대. 그러고도 느그 시아바이가 술은 엄청 먹었지. 술때매 죽은거 아이라. 일이 고되니 술을 다덜 많이 먹긴 해도 느 시아바이는 너무 마셨어. 그래도 술 먹으면 딱 고꾸라져 자고 주사 마이 안 피고 그랬다.


느 시아바이가 환갑 조금 지나고 몸이 안좋아 병원에 가이 암이라 그러대. 하늘이 시꺼매지더라고. 절로 주질러 앉았다. 느 남편은 아직 학생이라 등록금도 보태줘야 하고 아직 안 여읜 딸도 있고 벌려놓은 농사일은 또 어쩔것이냐. 아바이는 이제 거동을 못해 죽을 날 받아 놓고 집에 들어앉아 있고, 해야 될 일들은 논밭에 산에 그득하고. 그 때는 입이 까시러와 살이 죽죽 내렸다. 어쩔것이여. 그래도 남은 것들 살자고 꾸역꾸역 몸뚱이를 일으켰지. 새벽에 일어나 밭에 일 나가기 전에 찬물 떠서 정지에도 올려놓고 장독에도 올려놓고 내내 빌었지. 니 아바이 편히 가게 해달라고. 그 양반이 복이 많아 마이 안 앓고 편하게 갔지. 날도 좋은 때.


아바이 죽고 난 후 자전거를 혼자 배웠다는 거 아녀. 지금 생각하믄 나도 대단허지. 환갑이 훌 지났는데 어트케 혼자 자전거를 타 보겠다고 그랬는가 모르겄어. 다치지 않았냐고? 몇번 넘어져가며 탔제. 그래도 뼈는 안 부러지대. 자전거를 배워노니까 좋드만. 그래봤자 고구마 싱궈놓은 밭까지 가는거래도 시원하게 바람 맞으며 달리믄 기분이 참 좋드라고. 이 동네에서 자전거 탈 수 있는 어마이가 많지가 않아. 지금이야 전동차 아니믄 마을회관까지도 못 가지마는. 그 자전거 내 안 버렸는데. 창고에 있을기다. 니 서울로 가지고 가 타믄 안되겠나.


느그 큰 형님이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보낼라니까 동네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기집애를 뭐할라꼬 고등학교를 보내냐는 거여. 입 가진 사람들은 다 한마디씩 했지. 그래도 나는 여자도 배우면 더 낫게 살겄지 생각혔다. 안 그러냐. 일제때 잠깐 소학교 들어갔더니 히라가나 가타가나 배워주드라고. 그게 일본놈 말인거 알믄서도 소리높여 노래하며 쓰고 그랬는데 배운다는게 그렇게 즐겁고 좋드만. 여자들도 배우면 왜 안돼냐. 즈그들이 월사금 주는것도 아니믄서 말여. 그래서 느그 형님들 싹수 보이고 지가 배우고 싶다하면 내 할수 있는 데까지는 핵교 보내고 그랬다. 한 번은 문중 제사에 조카 며느리가 색안경을 쓰고 왔단 말이다. 썬구라스처럼 시꺼먼거는 아니고 연허게 색이 들어간 안경을 쓰고 왔는데 어마이들이 며느리 없는데서 숭을 보는겨. 내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는거 아녀. 젊은 사람이 제사라고 바쁜 일 제치고 멀리서 와서 도와주는데 시골 깡촌 무지랭이 할마이들이 안경가지고 지랄들을 한다고. 테레비 보니까 젊은애들이 다덜 옷도 찢어입고 색 들어간 안경도 쓰고 그러드라고. 테레비도 안 봤냐고 한 마디 했지. 야 야 그런데 너는 왜 바지를 안 입고 있나. 뭐라꼬? 입었다고? 뭐? 카멜 색? 서울에서 유행하는 색깔이여 그게? 그럼 입어야제.


요새는 밑의 동생 옥남이 생각을 가끔 혀. 우리 어마이 피붙이가 갸 하나 살아있어. 옥남이 밑에 옥순이라고 있는데 갸는 몇년전에 대구에 있는 요양병원서 죽었다고 조카헌티 연락이 왔어. 내가 올해 아흔잉께 옥남이는 나랑 두살 터울지거든. 여든 여덟일거여. 예천에서 살고 있다든가. 몇년전에 조카헌티 연락이 왔는디 즈 어마이가 치매라고 하드라고. 한번 보고 싶지 않냐고? 하이고. 이제 와서 보면 뭐할끼가. 즈나 나나 좋은 시절도 안 보고 살았는디. 저거는 이제 나를 알아보도 못할틴디. 그리 정신 놓기 전에 얼굴 함 봤으믄 좋았겄다 하는기지.


잘 먹고 있냐고? 아이고 내 걱정은 말아라. 마당에 나가면 먹을게 천지다. 냉장고엔 느들이 채워놓고 간 게 그득 그득하자너. 아침먹고 회관에 가서 하루종일 화투치고 놀고 지끼다가 저녁도 같이 해먹고 들어오는 날이 많어. 내 걱정은 말어라. 테레비 봉께 날로 물가도 오른다 세금도 오른다 전기값도 오른다 젊은 사람들이 힘들지. 노인네들은 힘든게 하나도 없다.


오늘은 마당에 싱궈놓은 나물에 물을 좀 줬지. 날이 가물어 요새. 구십평생 농사짓고 살았어도 푸릇푸릇한 것들이 올라오면 그렇게 이뻐보일수가 없어. 작년에 큰 애가 모 싱굴때 내가 내년에는 쟈가 모 싱구는걸 볼 수 있을까 싶드만 하매 모 싱굴때 안됐냐. 하이고 오래도 살았다. 그래도 내가 내 손 발 움직거려 먹을 것도 찾아먹고 느그 이름도 다 알고 느그들 사는것도 참견하고 사니 느그나 나나 서로 복이다.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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