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여가, 여가와 일 : 여자
제가 어렸을 때 우리는 토요일까지 주 6일을 학교에 갔습니다. 주말이 시작되는 토요일 저녁, 해질 때까지 뛰어놀다 들어와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를 보면서 밥을 먹고 늦게까지 '토요명화'를 사수했던 날들. 물론 늘 중간에 졸다가 잠들곤 해 결말까지 본 영화는 손에 꼽지만 '바바바밤 바바바밤' 하는 토요명화 시그널이 울리는 순간을 사랑했지요. 유일하게 늦잠을 자도 좋은 단 하룻밤이 지나가는 게 아까워 부모님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눈을 비비며 뭉갰던 우리는 '토요일은 밤이 좋아!' 정서를 공유했던 세대입니다.
.... 토요명화 시그널과 '토요일은 밤이 좋아'에 멜로디를 붙여서 읽은 분들은 조용히 손을 들어주세요(내적하이파이브를 날립니다).
토요일은 밤이 좋아(1988) - 김종찬 을 아시나요.
국내에 주 5일 근무가 정식으로 도입되었던 때는 이미 제가 성인이 된 후였습니다. 그 뉴스를 들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라니. '오 맙소사 주말이 이틀이나 되다니 그곳은 천국이 아닐까!!' 그러나 당시 반대하는 논조의 의견들도 기억합니다. 주 5일만 일하면 회사가 돌아가겠나, 일할 의욕이 떨어진다, 경기가 침체된다, 과소비를 조장하는 길이다 등의 반론이 많았지요.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습니다. 흥, 고작 주말 이틀 가지고 과소비는 무슨 과소비. 그 정도론 돈 쓸 시간도 없다고. 5일이나 일하고 고작 이틀 쉬는데 일의 연속성이 끊어지긴 왜 끊어져?! 쉬어야 의욕이 더 올라가지 왜 떨어진담. 그런데 얼마 전 코로나 시대 이후 요즘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주 4일, 심지어 주 3일 근무를 선호한다는 것이 이슈가 되었을 때 제 마음속에 비슷한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흠, 주 3일이면 일하는 날보다 안 하는 날이 더 많네. 일 뭐 하고 있었는지 쉬고 오면 까먹겠다.'
한의원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저도, 저희 직원들도 모두 주 6일 근무였습니다. 그러다 인원이 한두 명 늘면서 주 5일이 가능해진 이후 이대로 가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오산이었습니다. 생각을 다시 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채용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뽑고 싶은 좋은 이력서가 너무 없었거든요. 이래저래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야 깨닫게 된 심플한 진실은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아래 둘 중 하나는 필요하다는 거였습니다.
1. 압도적으로 많은 월급을 주거나
2. 근무일을 줄이고 그에 비해 모자라지 않은 월급을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가난한 초창기의 우리는 압도적인 월급을 줄 돈이 없었기에 후자를 택했고 그렇게 주 4일 근무가 정착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시간이 흘러 현재 달과궁에는 주 2일부터 주 5일까지 다양한 근무형태가 공존합니다. 경력이나 연차와 무관하게 주 5일 일하고 조금 더 받고 싶은 사람은 주 5일, 적게 일하고 적게 받더라도 나머지 시간을 더 소중하게 사용하는 이들은 주 2일과 주 3일을 택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지난 해 주 3일 진료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진료를 줄여서 번 시간에는 처방을 공부하거나 환자의 치료 계획을 세우고 브런치에 올릴 글을 정리했지요. 더 어릴 때 함께 있어주지 못했던 아이와 시간을 보내려고도 노력했습니다. 주 3일을 결정할 수 있었던 근거가 이 같은 나머지 시간의 효용에 있었기 때문에 무계획으로 시간을 보내거나 멍 때리는 날은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또 시체놀이에 소질이 없는 것은 아닌데, 진료가 없을 뿐 해야 할 일은 너무 많더라고요. 주 5일도 황홀했던 제게 주 3일이라면 놀랄 만큼 여유로울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 역시 세상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겁니다.
코로나 이후 많은 사람들이 주 5일 나인투파이브로 일하는 스케줄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대로 출근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재택근무가 활발해지고 '어 그래도 꽤 잘 굴러가잖아'를 경험하게 되면서 근무시간과 장소의 절대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2020년 뉴질랜드 총리가 '코로나 시대의 유연한 근무가 이끌어낸 놀라운 생산성에 대한 경험'을 근거로 주 4일제 도입을 강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말한 이후로 구글에서 주 3일 근무제를 도입했다더라 하는 소식까지 들려왔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지켜본 모두는 주 5일 근무제의 도입 소식을 들었던 시절의 저처럼 살짝 설레었을까요?
주 4일, 주 3일 근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것을 지켜보며 남편과 저는 '우리는 어쩌다 보니 시대를 앞서갔다'며 농담을 나누곤 합니다. 저도 마음이 조금 더 편해졌습니다. 사실 처음 주 4일 근무를 제안한 이후로 남편은 때로 '적게 일하고 싶은 이들의 게으름'에 대해 조금은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도 같았거든요. 상대적으로 주 5일 근무를 원하는 직원의 존재감과 충성도가 압도적으로 더 크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고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주 4일 근무로 바꾸고 근속연수가 길어졌고 그렇게 오래 함께 일한 직원들과 충분히 면담을 나누어 보니 결국 각자의 리듬에 맞추어 각자 지속가능한 스케줄을 짜는 것뿐이더라는 거지요. 최근에 그는 건강이 좋지 않거나 가정이 있는 직원들과의 면담에서 먼저 주 3일이나 주 4일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더 나은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는 데 주저함이 없는 것이 제 동업자의 가장 큰 미덕이거든요.
1990년대 중반, 제러미 러프킨은 저 유명한 저서 <노동의 종말>을 통해 '지치지 않고 일하는 기계가 모든 노동을 대체한 이후의 인간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통찰하였습니다. 일주일에 5일에서 6일을 일해야만 했던 시대가 저물고 노동 시간의 뉴노멀이 요구되는 세태를 라이브로 지켜보면서 '인간은 일주일에 며칠 일하는 것이 적당한가'에 대해 저도 고찰을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 평일 저녁에 이런 생각을 여유롭게 하고 앉았는 것도 다 제가 진료를 일주일에 사흘만 하기 때문이긴 하네요. 역시 아직은 조금만 일하는 게 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