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미최 Oct 31. 2024

나쁜 동기부여

대표와 직원, 그 관계성 : 남자

유학에 진심인 적이 있었다. 원하는 학교의 캠퍼스를 둘러보기 위해 신혼 여행지를 근처로 잡기까지 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만지면 자녀가 그 학교에 입학한다는 동상의 발을 만지며 아내 몰래 나의 입학을 빌기도 하였다. 당연하게도 유학 지원이 있는 회사에 들어갔고 사내 유학 공모는 입사 후 몇 년 동안 가장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윗사람에게 말로 어필하는 것에 서툴렀지만 회식 자리에서 기회를 틈타 담당 임원께 유학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내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상무님은 진심 반, 취기 반으로 "유학은 내가 책임지고 보내줄게"라고 말씀하시곤 하였다.


          5년 차 자격을 갖춘 그 해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다. 술자리마다 반복되는 상무님의 격려도 기대감을 한창 부풀려 놓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정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해 사내 유학생 공고는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내정되어 있다는 그 녀석이 유학길에 올랐다. 아마 나는 이때부터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던 거 같다.




한의원은 박봉이다. 직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한의사들도 투자 대비 효율만을 생각한다면 선택하기 어려운 직업이다. 모든 대표원장이 악덕 사장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업계 자체의 수익성이 떨어지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건강보험 진료비에서 한의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실손보험도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남의 돈 내고 하는 것과 내 돈 내고 하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그 차이만큼이나 한의원과 다른 의원들의 매출의 크기는 명확히 다르다.


          개원 전 같이 일 할 직원을 뽑기 위해 채용 사이트를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채용공고들의 근무 조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선 급여가 최저 시급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최소 주 5일, 심지어 6일 근무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휴가는 당연히 없었고 당연한 것들도 마치 특별히 해준다는 분위기였다. 대기업을 다녔던 나에게는 다른 세상이었다. 흑수저인 내가 순식간에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에서 '남들과 다르게'를 외칠 용기는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께름칙했다. 따지고 보면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을 볼 때면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내와 나는 적자를 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미안한 마음이 커질수록 몇 안 되는 직원을 붙잡고 우리의 비전을 이야기하는 빈도도 늘어갔다.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은 이래도 미래에는...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직원과 마주 앉아 거창한 비전을 떠들 때면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나를 부추겼던 담당임원과 내가 오버랩되었다. 부끄러웠다. 그때 그 상무님과 내가 뭐가 다른가? 그분도 나를 아꼈고 나에게 힘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국 몇 년 뒤 회사를 떠났다. 아차 싶었다.




성공한 기업가들은 직원들과 비전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하지만 요즘 나는 직원들에게 우리의 비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현재가 없는 미래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한의원 직원들은 대부분 주 4일 일한다. 심지어 주 3일도 둘이나 있다. 급여도 꽤 된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동생이 농담 반으로 한의원에서 일하고 싶다고 할 정도이다. 한의원에서는 아주 드물게 연차도 지급한다. 그래서인지 우리 한의원의 근속연수는 길다.


          그런데 신기한 사실은 우리 직원들이 비전에 한 걸음 더 다가가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입이 아프도록 말하고 다닐 때보다는 그렇다. 오래 다녀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걸까? 아니면 근무 조건이 좋아지며 한의원에 대한 애착이 생긴 걸까? 그것도 아니면 환자들을 만나며 자신의 소명이라도 찾게 된 걸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우리의 비전에 맞추어 움직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나쁜 동기부여도 있다. 본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아무리 진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위해 해주는 격려도 현실과의 괴리가 크다면 허풍에 지나지 않게 된다. 좀 과격하게 이야기하면 일종의 사기, 요샛말로 가스라이팅이 될 수도 있다.


          난 아직 현명하지는 않은가 보다. 양쪽 입장을 다 겪고서야 이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전 11화 "원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