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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최 Oct 17. 2024

다르지만 괜찮습니다

대표라는 자리의 의미 : 남자

나는 대기업 재무팀에서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중공업 회사라서 그런지 남자들이 많았다. 재무팀은 더 심했다. 당시 서른 명이 넘는 공채 출신 재무팀원들 중 여자가 한 명도 없었다.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분위기는 딱딱했다. 재무팀에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사팀에서 근무하던 학교 선배가 기껏 부드럽게 표현한다는 것이 '무척 보수적인 팀'일 정도였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남자 꼰대들이 득실대는 조직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입사원 때 내 자리는 정수기 반대편이었다. 눈치를 보고 있다가 물통에 물이 떨어질 때쯤 잽싸게 물통을 교체하는 것도 내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월요일에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양재동 꽃시장에서나 볼 법한 미세입자를 뿜어낼 수 있는 '난초 전용 압축분무기'로 난 화분에 물을 주어야 했다. 당시 회사가 잘 나가던 상황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서 보낸 화분이 족히 사오십 개는 됐다. 그 덕에 나는 아직도 오른쪽 전완근이 왼쪽에 비해 무척 크다. 등산회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산행에 참여해서 허드렛일도 해야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사장님이 우리 부서 출신이고 등산회 멤버라는 거. 하루는 부서 선임들이 신입이던 나를 사장님께 소개해 주었다. 인사를 드리고 나자 사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앞으로 이런 행사 참여 잘하고."


          신기한 것은 내가 부서에 잘 적응했다는 점이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 차장님 한 분이 말씀하셨다. "얘는 회사생활 한 십 년은 하다 온 애 같아." 나는 곧 부서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회사 생활 내내 재무팀 에이스로 불렸다. 이러니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봤자 나는 꼰대인 것이다.



이런 내가 지금은 여자들 사이에서 일하고 있다. 내가 유일한 남자이다. 친구들은 부러워하지만 속사정은 그렇지만도 않다. 여자들로만 구성된 집단에서 일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특히 아내가 출산으로 자리를 비운 두 달은 어쩌면 군대 훈련소 시절 이후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아닐까 한다. 오래전 간호대학을 간 고등학교 동기가 한 말이 기억난다 - 그 친구도 과에서 유일한 남자였다 -. "남자들 사이에 여자가 한 명 있으면 꽃이지만, 여자들 사이에 남자가 한 명 있으면 바보가 돼." 그 막막함.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게다가 직원들은 모두 MZ세대이다. 나만 X세대이다. (두 해만 늦게 태어났어도 MZ세대라 우길 수 있었다) 책에서만 보던 90년생들은 정말 달랐다. 그들은 성공하고 싶지 않는 듯 보였다. 오히려 조직이 인정한다는 사실을 부담으로 받아들였다. 상사의 호의 역시 그들에게는 부담이었다. MZ에 대해 들어는 보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더욱이 그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에는 완강함이 있었다. 거침없는 성격의 나조차 주춤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더군다나 나는 고용인이고 그들은 피고용인이었다. 십 년 동안 피고용인이었던 내가 처음 고용인이 되었으니 시행착오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근원적인 거리감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이 차이를 무시하였다. 아니,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하지만 나는 곧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군대 말년 친구처럼 지내다가도 귀찮은 일을 해야 할 때는 후임이 먼저 손을 들게 되는 그런 태생적인 간극이 그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고 그런 내 모습에 매번 어색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내 화법이었다. 나는 돌려 말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한다. 게다가 날카롭다. 아내가 표현하기로, "들어보면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는" 그런 말투이다. 이미 결혼생활에서 시행착오를 한 차례 겪으며 많이 누그러졌지만 아직 어린 MZ 여자들이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다. 직원들이 나와의 대화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으니 말이다.


          이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를 억지로 맞추어가고 있을 무렵, 날카로운 말투의 꼰대 남자가 필요한 순간이 찾아왔다. 그것도 갑작스럽게. 



한의원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처음 겪는 일이라 모두가 당황했다. 뉴스에서만 보던 성추행이 우리 한의원에서 일어난 것이다. 소식을 듣자마자 아내와 나는 한의원으로 뛰어갔다 - 아내와 내가 출근하지 않는 날이었다 -. 가해를 가한 환자는 이미 자리에 없었고 피해를 당한 직원은 다른 직원들 사이에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많이 놀란 듯 보였다.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화가 났다. 당장이라도 그놈을 끌고 와 무릎이라도 꿇리고 싶었다. 같은 남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나는 대표였다. 흥분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우선 해당 직원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을까?


          대충 처리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의료 분야를 오랫동안 담당하셨던 부장판사님께 자문을 구했다. 논어를 배울 때 알게 된 분이었다. 몇 가지 질문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우선 내가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는 없었다. 피해를 입은 직원이 직접 해야 했다. 그리고 법적인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해당 환자가 한의원에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면 진료거부가 되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피해를 입은 직원의 의사를 물어보고 법적 조치를 취한다면 당연하게도 한의원이 도와주어야 했다. 그리고 가해자가 스스로 한의원에 오지 않도록 해야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피해를 입은 직원은 며칠을 갈팡질팡한 끝에 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기로 했다. 당사자가 충분히 숙고해서 결정한 일이니 내가 가타부타 말을 할 계제가 아니었다. 내가 할 일은 명백했다. 가해자가 한의원에 오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말이다. 우선 운영팀 직원들에게 가해자가 오면 진료실로 들여보내지 말고 나에게 알리라고 지시를 하였다. 일주일 정도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 이렇게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나타났다.


          직원에게 그 사실을 듣고 나는 미리 생각해 둔 대로 행동하고자 노력했다. 절대 흥분하거나 그에게 위해를 가하면 안 되었다. 다만 엄격하고도 날카로운 태도가 필요했다. 나는 봉인되었던 내 말투를 해제하였다. 그리고 그 일을 잘 해냈다. 다행히 그는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의원에 오지 않고 있다.   



그 일이 있은 후 직원들의 태도가 변했다. 이제는 나에게 원하는 점이나 불편한 것들도 곧잘 이야기한다. 또 격동의 70년대 냄새가 남아있는 내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인다. 아마 직장에 남자 꼰대도 한 명쯤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나도 꽤 변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어딘지 모르게 내가 부드러워졌다고 한다. 특히 말투가 변했단다. 어디까지나 과거의 나와 비교해서지만 말이다.     


          얼마 전 헬스장에 갔을 때였다. 어떤 여자분이 본인의 소지품을 내가 사용하려는 운동기구에 떡 하니 올려놓고 있었다. 보통은 그 기구를 사용하겠다는 신호를 보내면 물건을 치워주기 마련인데 그분은 전혀 그럴 맘이 없어 보였다. 예전 재무팀 에이스 시절이었다면 강한 눈빛과 날카로운 한 마디로 해결했겠지만,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이렇게 말했다. "가방 좀 치울까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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