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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최 Oct 27. 2017

환경의 습격을 막아라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나를 공격하는 시대

온갖난관시리즈의 끝판왕을 아십니까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는 숱한 고난과 역경의 장면들이 나옵니다. 갇힌 방에서 탈출하려면 벌레들이 득시글거리는 구덩이 속에 파묻힌 버튼을 눌러야 하고, 선로가 떨어져 나간 철길을 부서져가는 수레 타고 달려야 하며, 늦가을 감나무마냥 사람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악어떼를 발아래 두고 위태로운 줄다리를 건너야 하죠. 악당들은 도처에서 출몰하고 함정은 수천 년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입을 벌립니다. 그야말로 '온갖난관시리즈'가 따로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저의 모골을 송연하게 했던 장면은 이겁니다. 숨겨진쓸데없는 비밀을 찾아 나선 일행은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동굴에 제발 그런 데 들어가지 좀 마 들어갑니다. 꼭 한 명은 아무 생각 없이 발을 디디다가 줄에 걸려 넘어지고 그 순간 천장과 벽에서 뾰족한 송곳이 튀어나오면서 사방의 벽이 점점 무리를 향해 좁아져옵니다. 일촉즉발! 피할 곳도 없이 긴 송곳에 꼬치가 될 형편에 처한 일행을 구하라! 물론 우리의 존스 박사는 한 몸 던져 벽을 멈출 비밀 장치를 찾아냅니다. 어릴 때 그 장면을 본 저는 몇 번이고 내 방이 나를 덮치는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꿈에선 아무리 외쳐도 인디아나 존스가 나타나 저를 구해주는 일은 없었습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


    아마도 제 공포의 근원은 안전하다고 믿었거나 심지어 안전한지 불안한지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벽이나 천장 따위가 나를 습격했다는 데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숨 쉬듯 당연하게 주위에 있는 것에 대해 대체로 무감동합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에 의식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들이 나를 공격해왔을 때 공포는 극대화되는 법이지요. 늘 습관적으로 쓰는 것, 우리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었던 것, 안 쓰고는 아예 살 수가 없거나 매우, 몹시, 정말로 불편해지는 것들 말입니다. 



'~free' 제품 전성시대, 환경호르몬은 줄고 있는가


    처음으로 환경호르몬에 대한 이슈를 '내 이야기'로 여기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초경 이후 몇 년은 생리주기가 불규칙했고 20대를 넘어 생리주기가 일정해진 이후에는 노상 생리통에 시달렸던 저의 가장 심한 증상은 생리가 시작되기 하루 이틀 전날 밤에 찾아왔습니다. 꼭 한 번은 배가 찢어지듯이 아파와 잠에서 깨는 걸로 시작해 땀을 뻘뻘 흘리도록 3, 40분 끙끙 앓다가 다시 잠들곤 했지요. 그러고 하루 이틀쯤 지나면 어김없이 생리가 시작됩니다. 생리가 시작될 거라는 신호를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캐치했던 거죠. 


    결혼하기 전 여자에게 산부인과는 왠지 서먹한 존재여서 선뜻 발을 들여놓기 쉽지 않습니다이 인식은 바뀌어야 하고,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그 시절의 저도 그랬습니다. 한의학을 공부했던 때도 아니라 속수무책으로 진통제만 퍼먹었습니다. 약으로도 가라앉지 않는 통증 때문에 자다 말고 화장실에 들어가 엉엉 운 적도 많았지요. 그 시절 한 친구가 TV에서 봤다며 저에게 해 준 얘기가 '집에 있는 플라스틱 용기를 다 버리라'는 거였어요. 친구가 본 프로그램은 2006년 SBS 스페셜이 방영한 <환경 호르몬의 습격> 편이었습니다. 


    방송을 본 바, 여고생들이 극심한 생리통에 시달린 이유가 환경호르몬에 노출되어 생긴 자궁내막증이더라는 것이 친구가 전해준 이야기였습니다. "플라스틱이랑 비닐용기 끊었더니 생리통이 다들 줄었대." 그 얘기는 분명 매력적이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제가 자취생이었다는 겁니다. 자취해본 이들은 다 알 겁니다. 편의점 도시락이 집밥이고 인스턴트식품이 소울푸드이며 배달 음식은 생명줄이라는 것을요저만 쓰레기는 아니겠죠. 먹거리 포장에서 플라스틱이 빠지면 답이 없는 구조로 살아온 지 몇 년째에 접어들고 보니 플라스틱도 무서웠지만 '플라스틱을 끊으라'는 말이 더 무서웠습니다.

플라스틱을 끊을 수 있는 자가 저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퍽)


    몸속에 들어와 에스트로겐인 양 행동하는 노닐페놀, 프탈레이트, 비스페놀 A와 B 등의 물질은 생리통뿐 아니라 여자아이의 성조숙증, 남자아이의 여성화를 유발하는 물질로도 규명이 되었죠. 문제제기가 된 이래로 위 물질들은 '~ free' 마크를 뒤에 달고 무해함을 어필하는 마케팅 포인트로 소비되고 있고, 사람들은 안심하며 그 제품을 구매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SBS 스페셜은 그로부터 10년 이상 지난 올해 2월 조금 더 발전된 이슈인 '바디 버든(body burden)'을 주제로 다시 한번 환경호르몬 관련 내용을 다뤘지요. 문제는 가벼워지지 않았고, 유해물질이 몸속에 누적되어 대를 거듭해간다는 무서운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생리대 유해물질 논란:  가까운 물건이 주는 공포


    올해 여자들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이슈 중 하나는 '생리대 유해물질 검출 사태'일 겁니다. 다른 증상으로 치료를 받던 제 환자 중에서도 어느 시점 이후 월경불순에 시달린 분이 계셨습니다. 오래 보아온 환자였고 아직 폐경이 올 나이는 아니었던 분이라 치료 중에도 함께 원인을 찾고자 두문불출했었습니다. 월경은 두세 달 괜찮았다 한 주기쯤 건너뛰기를 2년 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그분께 연락이 왔습니다. "선생님, 답을 알았어요. 저 릴리안 생리대를 쓰고부터 그랬던 거였어요." 생리대의 위해성에 대한 식약처의 잇따른 발표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지금 이들이 보고 있는 건 공포영화가 아닙니다.


    지난 9월 28일 시중에 유통 중인 모든 생리대를 대상으로 한 생리대 휘발성 유기화합물(VOCs) 1차 전수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지요. 결론은 '그 위해도가 모두 인체에 유해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낮은 수준'이라는 것이었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에 조사한 물질은 에틸벤젠, 스타이렌, 클로로포름, 트리클로로에틸렌, 메틸렌클로라이드(디클로로메탄), 벤젠, 톨루엔, 자일렌, 헥산, 테트라클로로에틸렌 등 10종인데, 그 외 다른 물질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기 때문이지요. 식약처에서는 이번에 조사하지 못한 VOCs 76종과 잔류농약 등에 대해서도 위해성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환경호르몬 때문에 면 생리대와 유기농 생리대를 거쳐 생리컵에 대한 관심도 급증하고 있지요. 유통 허가가 나지 않은 관계로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되는 생리컵은 아직아직도! 없습니다. 다만 휘발성유기화합물(VOCs) 전수조사에 수입 예정인 생리컵 제품도 포함된다는 소식으로 미루어볼 때 임박했다는 생각은 듭니다. 이미 생리컵 사용자의 후기간증은 구글과 유튜브에 넘쳐나지요. 제품의 위해성에 대한 검증은 똑같이 필요하겠지만 여성들 스스로가 대안을 찾고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궁근종 등으로 생리 양이 많아 면 생리대 사용은 꿈도 못 꿔본 소비자에게 구원 같은 제품이라고들 하더군요. 



우유와 달걀과 고기로 빚어낸 도시괴담


    올해 환경 이슈 중 빼놓을 수 없는 것 또 하나는 '살충제 달걀'일 겁니다. 이전의 광우병, 구제역 문제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었던 공장식 축산의 문제점이 달걀에까지 미친 것이지요. 유기농 인증을 받은 제품까지도 이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식재료의 '인증' 시스템이 가지는 허점을 잘 보여줍니다. 공장식 축산은 살충제뿐 아니라 전염병, 항생제 내성균, 유전적 다양성의 저하, 환경오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지요. 봉준호 감독은 이 문제를 전면에서 다룬 영화 <옥자>를 통해 공장식 축산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습니다.

봉준호 감독 “동물의 공장식 생산을 생각해보자는 영화죠” ... 경향신문, 2017.06.14

영화 <옥자>의 공장식 도살장 장면.


    지난해 경향신문이 보도한 '유전자 변형 성장호르몬 투여 소에서 생산된 우유의 발암 위험 논란'은 현대적 축산업이 빚어낸 또 하나의 단면입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찬반의 여론이 갈리지만, 유전자 변형과 성장호르몬 투여는 이미 농축산업 전반에서 활용되고 있지요. 당시 농림축산식품부는 이 기사에 대해 '해당 물질은 우유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소 성장호르몬과 차이가 없고 인체에 어떠한 위해도 없다'는 요지의 해명자료를 내놓았습니다만 결국 올해 초 LG화학 측은 해당 성분의 국내 유통 및 판매를 중단했습니다. 

[밥상 위의 GMO, 거부권이 없다] 오늘 아침 마신 우유…‘발암 위험’? ... 경향신문, 2016.09.20 

오늘 아침 마신 우유 ‘발암 위험’(GM 호르몬이 투여된 소에서 생산) 경향신문(2016. 9. 20) 보도 관련 설명 ... 농림축산식품부 홈페이지, 2016.09.20 
유전자 조작 소 성장호르몬, 국내서 사라진다 ... 한국농정, 2017.03.04


    공장형 축산과 유전자 변형, 성장호르몬의 투여는 애초에 '먹거리'로서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시도된 방식이었을 겁니다. 최초의 의도는 인류를 위한 것이었을 이 방식이 어느 순간 인류를 위협하게 되었다는 현실은 아이러니하지요. 옹호론자들은 여전히 이 방식이 기아에 시달리는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똑같이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생각을 조금 달리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분명 어려운 문제지만 각성과 반성이 선행되고 있다면 돌파구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환경의 습격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환경호르몬에 대처하는 방법에 관한 글은 무수히 많습니다. 식품 포장에 쓰이는 플라스틱 용기를 스테인레스 스틸이나 유리, 세라믹으로 대체할 것, 비닐봉지 사용을 자제할 것, 화학성분이 포함된 세제 대신 베이킹소다나 식초 등 천연세제를 사용할 것, 표백된 종이타월 대신 손수건을 사용할 것. 그대로 환경보호 캠페인에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은 지침들이지요. 인류가 환경을 공격한 대가를 환경이 그대로 우리에게 돌려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너희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다면 우리를 먼저 보호하라, 는 경고겠지요.


    생리대와 젖병, 달걀과 우유, 쇠고기와 소시지. 특히 경계해본 적도 없고 경계해봤자 영영 손에서 놓아버릴 수도 없는 친숙한 생활용품과 먹거리가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디아나 존스의 '온갖난관시리즈'를 떠올리게 합니다. 언제 벽이 무너지고 친구가 내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르는 곳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면 우리는 버틸 수 있을까요. 거기서 비롯된 스트레스가 먼저 우리를 병들게 할지도 모릅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켜내야 하는 전쟁, 환경이 나를 공격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건강을 위해 내 몸 안팎을 끝없이 사수해야 하지요. 


    글을 쓰면서 다시금 환경호르몬 문제를 복습한 후로는 무심코 플라스틱 물병에 든 물을 그대로 마시던 습관이 다시 꺼림칙해졌습니다. 제주산 미네랄워터에 화학성분 에스트로겐을 천천히 우려서 마시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플라스틱을 줄이려고 노력했던 것도 어느새 잊고 또다시 플라스틱이라고 쓰고 편리함이라고 읽는다에 길들여져 버린 거겠지요. 환경의 역습에 대처하는 자세의 기본은 역시 '기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뭐가 문제인지, 어떤 것을 우려해야 하는지 조금은 귀찮더라도 잊지 않는 것. 귀찮음을 조금만 더 감수할 수 있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 보다 거시적인 환경 문제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겠지요. 




    한의사가 되고 나서 지인들로부터 들었던 두 가지 충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겁니다. "의사들은 똑같은 말만 할 거면 뭐하러 의사 해? 잘 먹고, 운동하고, 푹 자면 누구나 건강하겠지. 그렇게 못하는 삶이니까 의료의 도움을 받으려는 거잖아." 또 하나의 충고는 이렇습니다. "약만 팔려고 하지 말고 생활에서 치료법을 찾을 수 있는 의사가 되어줘." 얼핏 상반되는 이야기지만 둘 다 공감했고, 어떻게 두 요구를 다 충족시킬 수 있을지 해답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환경의 문제 같은 큰 그림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다시금 이런 시대에 의료인의 역할이 무엇일까 저도 고민해보게 됩니다. 아마도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요. 





미미최(최혜미)

전직 패션 에디터, 현직 마르지엘라를 입은 한의사입니다.

요즘 여자를 위한 한의원, '달과궁한의원'에서 진료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진료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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