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세계를 바라보는 가장 따뜻한 이론
뚜렷한 개별성과 더 뚜렷한 공통성
'체질'은 한의학이 낳은 간판 스타다. 내 주위에 한의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예를 들어 패션계의 지인들도 나를 만나면 십중팔구 '나는 무슨 체질이야?'라고 물어본다(자매품으로 '내 맥 좀 짚어줘'가 있다). 예전에는 혈액형 별 성격 유형에 연연했고 요즘에는 MBTI 없이는 자기 소개가 안된다는 한국 사회에서 아마도 비슷한 이유로 한의학의 체질 이론은 꽤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의 고유한 개별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의학의 독특한 관점이다. 다만 이 개별성은 사람을 넷 혹은 여덟로 나누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린이인지 성인인지, 나이가 충분히 많아 노인의 영역에 들어온 이는 아닌지를 섬세하게 나누어 살핀다. 나이가 충분히 어리거나 많으면 성장기 혹은 노화라는 연령의 특징이 이 사람의 성별이나 체질을 압도하게 되고, 같은 성인 여자라도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여성의 몸이 달라진 부분이 어떤 병리적인 상태의 배경이 되는지 가늠해야 한다. 성별과 연령, 거기다 체질의 변수를 곱하고 각자가 겪어온 몸의 히스토리를 더하면 경우의 수는 실제 사람 수만큼 많아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의 차이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모두에게 공평한 영향을 미치는 자연의 시공간이다. 한의학은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공통의 요소로서 거대한 자연의 존재를 끌어들여 진단과 치료에 활용한다. 모든 사람이 속한 바로 지금의 지역적인 특성과 절기는 또다른 차원에서 인체에 나타난 증상의 원인을 파악하는 중요한 관여 요인이 된다. 이를테면 자연의 여섯 가지 기운을 대변하는 '풍風, 한寒, 서暑, 습濕, 조燥, 화火'의 '육기六氣'는 한의학의 가장 중요한 병인 분류 중 하나이다. 바람, 추위와 더위, 습하고 건조한 기후와 열기는 제각각 구체적인 질병과 증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반대로 치료의 방식이 되기도 한다.
같은 감기라도 누가 걸린 감기인가 따라 진단과 치료가 달라진다. 같은 사람이 걸린 감기라도 여름에 걸렸는지 겨울에 걸렸는지, 추울 때 증상이 악화되는지 덥거나 습할 때 악화되는지에 따라 치료법은 또 달라진다. 살아있는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안팎으로 파악해 치료하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자 하는 것, 건강에 관한 한 한의학의 목표는 여기에 있다.
부정거사扶正去瀉 - 부족한 것을 채우고 넘치는 것을 덜어낸다
몸에 불편한 증상이 나타났을 때 무엇을 문제로 보고 치료할 것인가가 관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질염이나 방광염은 여자에게 감기만큼 흔한 증상이다. 실제로 진료실에서도 반복되는 질염 혹은 방광염의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를 자주 만난다. 처음 이 증상이 나타나면 빨리 병원에 가서 진단하고 필요하면 항생제를 처방받아 복용하는 것이 좋다. 초기에 적절하게 대처하면 증상은 대부분 빠르게 소실된다. 누군가는 그걸로 끝, 다시 같은 증상에 시달리게 되는 일은 없거나 있어도 한참 후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르다. 처음에는 분명 항생제를 먹자마자 증상이 사라지고 일년 쯤 무난히 지냈는데 이듬해에는 6개월 간격으로, 그 다음해에는 한달에 한번 꼴로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항생제의 효과도 점점 듣는 시간이 짧아지더니 나중에는 항생제의 종류를 바꾸어야 완전히 나아졌다. 수년 후에는 몸이 피곤할 때마다 은근히 하복부가 뻐근한 느낌이 불쾌하게 반복된다. 항생제를 먹어도 그 때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쉽게 피곤해지고 기력이 떨어지기도 한다.
후자에게는 세균을 죽이는 치료가 아니라 몸의 방어력을 다시 세우는 치료가 필요하다. 꼭 질염, 방광염이 아니라도 감기로 인한 호흡기 감염, 구내염, 장염 등에 대해 세균을 죽이느냐, 면역력을 키우느냐 하는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현대의학은 세균을 죽이는 치료에는 전력을 다하지만 면역력을 키우는 문제는 개인의 휴식이나 관리의 영역으로 넘긴다. 그러나 한의학은 후자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치료의 영역을 마련해둔다.
'부정거사扶正去瀉'는 한의학적 치료의 핵심개념이지만 역시 묘미는 '부정', 즉 정기를 끌어올리는 치료에 있다. 체온을 올려 혈관을 확장시키고 여분의 체액이나 염증 물질이 빠르게 처리될 수 있도록 하면서 꼭 필요한 에너지를 기력을 회복하고 수면의 질을 높여 회복에 필요한 여유 시간을 확보하는 치료가 환자에 따라 선택적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반복되는 염증의 빈도와 강도가 줄고 이후에 세균이 또다시 침입해도 몸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만들어 주게 된다.
몸은 스스로를 낫게 할 수 있는 아주 스마트한 자가치료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현대의학이든 한의학이든 이 힘을 믿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치료가 많다. 이 힘을 믿기 때문에 몸이 스스로 나을 수 있기를 기다리는 동안 증상을 줄이는 대증치료나 통증을 조절하는 진통제가 빛을 발할 수 있다. 다만 이 선을 넘어가서 스스로를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일 때, 몸을 믿지 않아야 할 때 현대의학의 탁월한 강점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수술이다. 스스로 회복력을 잃은 몸에 대해 수술은 가장 과감하고 강력한 치료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이토록 과감한 치료 끝에는 또다시 몸이 스스로 회복하고자 하는 힘에 기댈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체력, 누군가는 면역력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 자체 치유의 힘은 모든 질병으로부터의 회복에서 그 어떤 요소보다 중요한 전제로 평가되어야 한다. 한의학은 몸을 믿고 몸이 스스로의 힘을 더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질병 후에도 과감한 수술적 치료 후에도 한의학적 치료를 통한 조리나 재활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한의학 안에서 세계관을 갖추는 일은 내가 이 치료를 통해 누구에게 무엇을, 어디까지 낫게 해줄 수 있을까를 결정하게 해주었다. 한의사의 역할 안에서 가능한 치료와 불가능한 치료를 구분할 수 있게도 되었다. 되는 것은 된다고, 안될 것은 안된다고 말할 때, 된다면 어디까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치료의 완성도는 높아진다. 세계관이 깊고 넓고 명확할수록 더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관을 쌓으면서 나는 한의학이 만능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할 수 있는 치료의 범위 역시 훨씬 넓어지게 되었다. 이 세계관은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니며 반복된 공부와 경험을 통해 점점 날카로워져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