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과 양약은 서로 다른 별에서 왔다
* 여기에 쓰는 글은 한의계를 대표하는 입장이 전혀 아니며 저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다만 검증된 내용,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쓰려고 노력합니다.
나에게도 친숙한 약들이 있다. 십 대 때부터 생리통이 있을 때마다 콩 주워 먹듯 먹었던 진통제, 아이가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면 먹이는 해열제, 어머니가 봄에 콧물이 줄줄 흐르면 없이는 못 사신다 했던 알레르기약, 속 쓰림이 심할 때 먹는 제산제, 할머니가 매일 아침밥보다 더 배부르게 드시는 혈압약, 당뇨약, 고지혈증 약... 양약은 필수재이고 우리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양약은 하나의 약에 한 가지 성분이 들어있어 정확히 한 가지 일을 한다. 간혹 종합감기약처럼 여러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하는 약도 있지만 두세 가지 성분 정도라 두세 개의 약을 동시에 먹는 느낌일 뿐이다. 구조의 특성상 단일 성분을 정확한 용량으로 추출해서 몸에 투입한 다음 반응을 관찰하기 때문에 기전도 뚜렷하고 반감기 같은 개념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한약은 다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공부하면 할수록, 처방하면 할수록, 먹어보면 볼수록 달라서 양약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한약을 바라보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보면 뭔가 부족하거나 미심쩍게 보일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실제로 양약의 세계관으로 판단해 한약을 비판하거나 불신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러나 한약은 양약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별개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전혀 별개의 치료 방식이다. 한약의 세계에서 약의 구조와 효능을 평가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한약은 근본적으로 복합제제다. 기본적으로 여러 개의 약재들이 하나의 처방을 구성하는데, 하나의 약재 안에도 유효성분이 무척 다양하게 존재한다. 한약도 개별 약제의 유효성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이러한 연구도 무척 중요하지만 여전히 한약재 하나에서 뽑아낸 유효성분들의 총합으로는 약재의 실제 효능을 재현하기 어렵다. 미량으로 포함된 전체 성분의 역할을 다 규명하기도 곤란하지만 함께 사용하는 약재의 종류가 늘어날수록 이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진다.
양약의 세계관에서는 한약도 유효성분의 총합으로 판단하려 하기 때문에 개별 약재와 그 약재의 검증된 성분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한약에도 '단방(單方)'이라 해서 약재 한 가지를 복용하는 방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처방의 단위로 진행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한약의 효과는 처방의 단위로 접근하여 파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여기에서 양약과 한약은 접근 방식이 크게 달라진다.
하나의 처방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약재는 서로 제어하고 조절하는 관계를 정교하게 구축하고 있다.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메인 약재가 있으면 이 작용을 보조하고 때로 제어하는 서브 약재도 있다. 약재 구성이 똑같아도 용량에 따라 전혀 다른 처방이 되기도 한다. 각각의 역할에 적합한 전처리가 달라지고, 때로는 탕전에 소요되는 시간도 약재별로 상이하다. 이 모든 요소들이 만나 하나의 처방을 이룬다.
한약 처방을 구성하는 학문을 '방제학'이라고 하는데 이 방제학의 기본 이론 중에 '군신좌사' 라는 독특한 개념이 있다. 하나의 처방을 하나의 국가에 빗대어 구성 약재를 각각의 역할에 따라 주도적인 왕(군), 중요한 직책을 맡은 신하(신), 임금과 신하를 보조하는 기타 공무원들(좌, 사)에 배치해서 한약의 효능과 구조를 설명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각의 약재가 아니라 처방을 하나의 완결된 우주로 보는 관점이다.
군(君, 임금) - 병을 주로 치료하는 가장 핵심적인 약물
신(臣, 신하) - 군약의 효과를 증강시키거나 도움
좌(佐, 보좌) - 군약과 신약을 도와 같이 나타나는 겸증을 치료하거나 독성을 제어, 조절
사(使, 사신) - 각 약물을 병이 있는 부위에 전달시켜 주거나 각 약물의 작용을 조화시키는 작용
이 개념을 카이스트 KAIST 에서 연구한 적이 있다. 이상엽 KAIST 특훈교수팀이 전통 한의학 약효 원리가 명확히 밝혀진 화합물 조합들을 분석하였고, 그 결과 상승효과를 갖는 화합물 조합들이 대부분 주요 약효를 전달하는 화합물과 이를 보조하는 화합물로 구성되어 있음을 규명했다.* 그 결과가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Nature Biotechnology)에 'Kun-Shin-Choa-Sa'로 게재되기도 했다.**
현재 중국에서는 군, 신, 좌, 사를 각각 주약(主藥), 보약(輔藥), 좌약(佐藥), 인약(引藥)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은유적인 표현을 조금 더 직접적인 기능의 의미로 단순화 한 느낌이다.
* 카이스트뉴스, ** Nature Biotechnology
방제학의 구성 원리가 군신좌사뿐만은 아니지만 대체로 비슷하게 주약과 보조약, 독성을 제어하고 약을 조화시키는 약재들이 저마다의 크고 작은 역할을 가지고 처방을 구성한다는 점은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한약은 한약재 개별의 유효성분 총합으로 설명되지 않는 창발적인 효과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이 맥락을 이해한다면 한약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위의 연구뿐 아니라 한약의 구조를 밝혀내고 효능을 계량화하기 위한 과학화의 노력은 지금도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어려운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니까. 현재를 살며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과학적인 원리를 규명하는 것은 모든 전문적인 분야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한약을 처방받고 심한 냉증과 손 저림이 개선된 한 환자분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원장님, 이 한약에 뭐가 들었어요?"
"아, 한약재 구성이 궁금하세요? 아니면 한약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가 궁금하신 걸까요?"
"아니 내가 그거 먹고 참 좋아져서 약재 중에 몇 개라도 시장에서 사다 놓고 달여먹으려구."
그 순간에 어딘가에 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 같다. 그때 그분께 아마 이렇게 설명을 드렸다면 좋았을 것이다. 현시점에서의 모범 답안을 여기에 적어 둔다.
1) 한약은 처방 자체로 하나의 단위입니다. 한약이 효과적이었다고 해서 그중 한약재 몇 가지를 먹는다고 해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답니다. 어떤 요리가 맛있다고 레시피를 보고 그중에 몇 개 식재료만 먹는다고 해서 그 맛이 나지 않는 것과 같아요. 요리는 심지어 양념 비율만 조금 달라져도 맛이 완전히 달라지잖아요. 전체 처방에서 약재 한 가지만 빠지거나 바뀌어도 전혀 다른 처방이 되는 일이 허다하답니다. 몇 개 약재만 골라서 드시면 안 돼요.
2) 그리고 시장에서 사신 한약재는 저희가 처방으로 드린 한약재와 완전히 같지 않답니다. 한의원에서 드린 한약에 쓰이는 한약재는 식약처에서 엄격하게 검증한 경로로만 유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의원의 한약은 전문한의약품이 돼요. 그런데 시장에 파는 한약재는 이름이 같아도 어떻게 길러지고 재배된 건지 알 수가 없답니다. 위품도 있을 수 있고 기원도 모호해서, 유효성분이며 효과가 같다고 말하기 어려워요.
3) 한약은 당시의 상태와 증상에 꼭 맞추어 처방을 드린 것입니다. 모든 약은 증상과 용량에 맞지 않으면 독이 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