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전조증상이라 부르지 않았던 기억
주말부부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 기억이 전조증상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당시의 나는 공부에 몰두하고 있지도 않았고, 경제적 독립이나 복수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삶은 단순했고, 하루의 중심에는 오직 아이가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선명하게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첫째를 낳고 두 달쯤 되었을 때였다. 아이는 한여름, 8월에 태어났고 그해 추석은 유난히 빠르게 찾아왔다. 백일도 채 되지 않은 아이를 차에 태워 네다섯 시간을 이동하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겁이 났다. 친정에서도 말렸다. 결국 나는 아이와 집에 남고, 남편만 시댁에 가기로 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남편에게는 원래 연락이 잘 되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그것을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아이를 안고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추석 이튿날 낮, 남편은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 몇 시간이 지나도, 밤이 깊어져도 전화는 받지 않았다. 갓난아이를 재우고, 다시 깨우고, 또 재우며 나는 그날 밤을 혼자 건넜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이었냐고 묻자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친구 만났어. 밥 먹고 이야기하고 그랬어. 진동이라 전화 온 줄 전화 온 줄 몰랐어.”
설명은 그럴듯했지만,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명절이 끝나고 남편은 집으로 돌아왔고, 그날 밤 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휴대전화가 보고 싶어졌다. 원래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이유 없이 불안했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친구를 만났다는 말은 전부가 아니었다. 그 자리는 친구의 소개팅 자리였고, 소개팅 상대는 남편의 같은 회사 영양사였다. 고향이 우연히 남편의 고향과 가까웠다는 이유로(남편의 고향은 마산, 영양사의 고향은 창원), 그 자리에 함께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소개팅을 받아야 할 친구가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남편과 그 영양사는 둘이서 꽤 비싼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와 연락이 되지 않았던 시간은, 바로 그 시간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개팅에서 주선자가 소개팅 상대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단둘이 식사를 하는 것이 상식적인 일일까. 남편은 십원 한 장 허투루 쓰지 않는다. 굴비 한 마리 밥상 위에 걸어놓고 밥 한술 먹고 굴비 한번 올려다보며 사는 자린고비. 내가 먹고 싶다던 음식은 비싸다고 나중에 먹자고 미루고, 속옷과 양말은 구멍이 나면 꿰매어서 입는 자린고비. 갓 아이를 낳은 아내가 집에 있는데, 그 시간 동안 연락 한 통 없이 자리를 비우는 것이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걸까.
남편은 말했다. 그 영양사와 친해진 건, 나중에 내 일자리를 알아봐 주기 위해서였다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영양교사가 되기 전, 영양사로 일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출산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고, 일할 마음도, 일할 몸도 아니었다. 아이를 품에 안고 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내가 너무 무심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남편의 행동을 깊이 묻지 않았고, 마음에 남은 불편함을 애써 눌러두었다. 나는 그 이후로 아이에게 집중했다. 육아서를 읽고, 아이의 성장 발달표를 외우고, 하루의 리듬을 아이에게 맞추며 살았다. 어쩌면 나는 회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의심과 불안을 직면하는 대신, 아이와 육아서라는 안전한 세계로 숨어들었다. 무언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나 자신을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다. 그 기억이 훗날 주말부부의 시간 속에서, 연락 두절과 설명되지 않는 공백 앞에서 다시 고개를 들게 될 줄은. 이 기억이 전조증상이었는지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그때부터였다는 것이다. 내가 무언가에 집중하지 않으면 이 관계 안에서 나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아주 희미한 감각이 처음 스며든 순간이. 그리고 그 감각은 오래도록 조용히 내 안에 나와 함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