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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환장 콜라보의 5년(맘시생의 임용기록)

by 달빛마차

‘맘시생’이라는 말은 나중에 알게 됐다. 엄마와 공시생의 합성어. 육아와 공무원 시험 준비를 병행하는 주부를 뜻한다는 설명을 읽고 나는 혼자 웃었다. 이름을 알고 나니 그 시간들이 조금은 위안이 되는 느낌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저 하루를 버티는 사람이었다. 이름 같은 건 사치였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임용고시에 도전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은 집안일을 하지 않았다. 청소도, 빨래도 미뤘다. 인강을 틀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 시간이 하루 중 유일하게 나로 존재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하원하면 다시 엄마의 시간이었다. 집을 정리하고, 아이를 씻기고, 밥을 먹이고, 재우고 나서야 다시 책을 펼쳤다. 그날의 마무리 공부는 늘 아이가 잠든 뒤에야 시작됐다.

임용 첫해에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별 보고 출근해 달 보고 퇴근하는 직업이었다. 같이 살아도 얼굴 보기 어려웠고, 어쩌면 주말부부 이전부터 이미 주말부부처럼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임용 합격 전년도부터 우리는 실제로 주말부부가 되었다.


그 무렵, 나에겐 늘 비교 대상이 있었는데, 첫째보다 두 살 위인 조카였다. 내가 공부를 시작했을 때 첫째는 15개월, 세 살이었고, 조카는 다섯 살이었다. 언니는 일을 하고 있었고, 친정엄마는 조카를 봐주고 있었다. 친정과 우리 집은 한 블록 차이, 언니 집과 엄마 집은 같은 아파트 앞동과 뒷동. 가까운 거리만큼이나 상황은 늘 겹쳐 있었다.

엄마는 내 아이도 봐주고 싶어 했지만, 언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언니는 주말도 없이 일했고, 주말에도 엄마는 조카를 봤다. 나는 토요일엔 남편이 아이를 보고, 일요일엔 내가 아이를 보는 구조로 버텼다. 도움은 늘 계산 속에 있었다.


한 번은 몸살이 심하게 난 적이 있었다. 남편은 지방 출장 중이었고, 나는 아이를 도저히 볼 수 없는 상태였다. 조카를 보고 있는 걸 알면서도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를 잠시 맡겼다. 엄마는 다섯 살과 세 살 아이를 몇 시간 동안 혼자 돌보게 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걸려온 전화. 언니였다. 엄마가 몸살이 나서 병원에서 수액을 맞았다는 말, 내가 아이를 맡기는 바람에 애 둘을 봐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 그게 다 내 때문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 말을 듣고 전화를 끊은 뒤,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돈 버는 사람의 아이는 맡겨도 되고, 돈 안 벌고 공부하는 사람의 아이는 맡기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다. 자격지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은 이미 깊게 상해 있었다.


또 한 번은 이런 날도 있었다. 주말부부 첫해, 아이 유치원 여름 방학이었는데, 남편은 바쁘다고 내려오지 못했다. 아이는 장염으로 기력이 없어 축축 쳐지고, 계속 화장실을 들락날락. 정말 대환장 콜라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길 수는 없었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 수액을 맞히고, 집에 데려와 병간호를 하며 혼자 공부했다. 지금은 담담히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 많이 울었다. 차라리 혼자인 게 낫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한 블록 앞에 친정이 있고, 언니가 있는데도 나를 도와줄 사람 하나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서러웠다. 거리라도 멀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너무 가까워서 더 아팠다.

친정엄마가 아팠던 시기도 있었다. 내가 조카와 아이, 둘을 모두 봐야 했다. 언니는 일을 해야 한다며 자신의 카드를 주고 키즈카페에 데려가 놀리고 밥을 사 먹이고 오라고 했다. 키즈카페는 자신이 없어서 밥만 먹이고 왔다. 고맙다는 말은 형식적이었고,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 앞에서, 나는 그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다시는 애 둘을 보지 않겠다고.

이런 일들은 내가 합격하던 해까지 몇 년간 변함없이 일어났다. 그래서 나는 시댁 한 달 살이를 택했다. 그 선택이 도피였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롯이 나와 아이만 챙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돌이켜보면 결혼을 하고 나서, 미우나 고우나 가장 많이 나를 도와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함께 있지 못하는 시간이 길었음에도, 결국 내 편으로 남아준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는 맘시생으로 5년을 살았다. 대환장콜라보 같은 시간들이었지만, 그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실만은, 이제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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