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친한 남자의 아내
그는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재수 시절에 만나 서른이 넘도록 함께 시간을 쌓아온 사람. 내가 남편을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내 삶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기도 했다. 연인이었을 때부터 첫째를 임신하고 나서도 우리는 정말 자주 만났다. 그에게는 여자친구가 없었고, 그래서 크리스마스나 연휴 같은 날이면 늘 우리 곁에 있었다. 또 다른 친구 한 명까지, 넷이서 술을 마시고 보드게임을 하고, 별것 아닌 이야기로 밤을 보내곤 했다. 그 시절의 나는 그 관계가 이렇게까지 복잡해질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었고, 키도 크고 인상도 호감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이성으로 느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남편의 친구였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노량진에서 잠깐 공부하던 시절에도 그는 가끔 놀러 와 밥을 사주고 커피를 사주었다. 첫째를 임신했을 때는 내가 먹고 싶다고 한 음식을 사 들고 우리 집에 와서 함께 먹고 배가 나온 나를 보고 웃기도 하였다. 그 모든 행동이 경계 없이 자연스러웠다. ‘가족 같은 친구’라는 말이 그때의 그에게 딱 맞는 표현이었다.
주말부부가 된 뒤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가 출장을 오면 나를 잠깐 만나고 가기도 했고, 가끔은 전화로 고민을 나누기도 했다. 남편 친구였지만, 동시에 내 친구처럼 편한 사람이었다. 물론 나는 그럴 때마다 남편에게 나의 약속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남편도 상황을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그에게서 어떤 호감의 신호도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변화는 내가 남편과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잦은 다툼, 반복되는 실망. 그런 상황을 그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의 말투가 달라졌다. 이혼 이야기를 꺼냈고, 남편이 처한 상황을 유독 부정적으로 해석했다. 무엇보다 늘 내 편에 서서 남편 흉을 함께 봐주었다. 처음에는 위로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감정을 이해해 주는 것 같아서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 이미 경계는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둘째를 낳고 휴직 중이던 어느 날, 결국 일이 터졌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통화를 했다. 사실 그전부터도 어딘가 미묘하게 이상하다는 느낌은 있었다. 말의 온도가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나는 애써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내가 예민한 거라고, 괜한 오해일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런데 그날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자기 있는 지역으로 올 수 있냐고. 하루 자고 가도 되냐고. 단둘이 만나고 싶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나는 농담처럼 웃어넘기며 대화의 화제를 전환했다. 당황하면 늘 그렇게 되는 버릇이 있었다. 문제를 바로 직면하기보다, 웃음으로 덮어두는 방식.
그날 저녁, 나는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이해해 주길 바랐고, 적어도 내 불편함만큼은 공감해 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말. 내가 오해한 거라는 말. 내가 그 친구에게 직접 전화해 따져보라고 했지만, 남편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의심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나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화가 나기보다, 서늘해졌다. 내가 더 이상 불안의 대상이 아닌 건지, 매력이 없어진 건지, 아니면 그만큼 신뢰받는 존재가 된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더 기분이 나빴다.
결국 나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했다. 그를 피하기로 했다. 전화를 받지 않고, 메시지에 답하지 않는 방식으로 관계를 정리했다. 말로 따지지도, 설명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덜 상처받는 선택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가끔 생각한다. ‘가장 친한 남자의 아내’라는 자리는 얼마나 불안정한 자리인가. 보호받는 위치 같지만, 동시에 언제든 의심받을 수 있는 위치. 아무 일도 없었어야 할 관계에서, 설명해야 할 사람이 되는 순간. 그 복잡한 감정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다시 한번 배웠다. 경계는 넘지 않았다고 해서 자동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어떤 믿음은, 한 번쯤은 의심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