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어느 날 그 아이는

by 주드

학교가 끝남을 알리는 종소리가 소란하다. 학교 건물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홀가분해 보인다. 물론 모든 아이들의 표정이 완전히 같다는 것은 아니다. 보름달처럼 환한 얼굴도 있는가 하면 그 보름달의 뒷면처럼 어두컴컴한 얼굴도 있다. 어쨌든 오늘은 시험이 끝난 날, 아이들은 신이 나서 요란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운동장을 빠져나간다.


모래먼지가 사르르 가라앉자, 운동장 귀퉁이에 있는 늑목 주위로 여자아이들 너덧 명이 둥그렇게 모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대략 열 살 가량 되어 보이는 아이들은 늑목에 팔 하나 또는 다리 하나를 걸친 채 심각한 표정들을 짓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가장 몸집이 작은 여자아이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면, 여자아이가 쪼그리고 앉은 다리 사이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이 보인다. 자기 등짝보다 커다란 책가방을 옆에 내려놓을 생각도 못한 채 아이는 몸을 떨고 있다.


-야아, 이제 그만 가자.

-티비에서 곧 재밌는 거 한단 말이야.

-엄마한테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해 봐.

‘용서’라는 말에 작은 여자아이는 아주 잠시 눈물을 거둔다. 아이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곧 아이는 고개를 젓는다. 두 눈에 새로운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아이의 친구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뜬다.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살짝 짜증도 섞였지만 그보다는 더 진한 연민이 담긴 눈길을 던지면서. 고개를 숙이고 쭈그리고 앉은 자세 그대로 꼼짝도 않은 채, 아이는 친구들의 운동화가 멀어져 가는 것을 본다. ‘가지 마!’ ‘제발 내 곁에 있어 줘.’ ‘나 어떡해.’


어느덧 운동장에는 어둠이 내려앉는다. 늦가을, 가슴 서늘해지는 한줄기 바람이 운동장을 휘몰고 지나간다. 아이는 모래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여전히 고개를 무릎에 묻은 채 꼼짝 않는다. 아이는 속으로 외치고 또 외친다. ‘바보! 바보! 대체 어쩌자고 아홉 개나 틀린 거야. 이 바보! 멍청이!’


어둠의 농도가 한층 더 짙어진다. 그때 경비 아저씨가 호루라기를 부르며 달려온다. 아이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아이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반대편 교문으로 향한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집으로 갈 수 없다.


아이는 간절하게 수많은 생각을 떠올린다. 밤마다 학교에 나온다는 동상 귀신한테 잡혀갔으면. 골목길 담벼락에 기댄 못된 불량배들에게 붙들려 흠씬 얻어맞았으면. 갑자기 번개에 맞아 기억상실증에 걸려버렸으면. 건널목을 건너는 순간 오토바이에 치었으면. 그렇다면 엄마는 귀신을 찾아 헤매느라, 불량배들에게서 나를 구해내느라, 내가 엄마 얼굴을 알아보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느라, 차가운 길바닥에 쓰러진 나를 부둥켜안고 통곡하느라, ‘어째서 시험에서 아홉 개나 틀린 거지?’라고 묻지 않을 텐데.


여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이미 다 퍼올려서 바짝 말라붙은 줄 알았던 아이의 눈물샘이 순식간에 다시 차오른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턱 끝에 방울방울 매달렸다가 속절없이 아래로 툭툭 떨어진다.


이미 시커멓게 변한 하늘이 갑자기 번쩍 하더니 비가 요란하게 쏟아진다. 아이는 정말 번개에 맞을까 봐 두려워져서 집으로 쉬지 않고 달린다.


-아니, 이 시간까지 어디 있었니?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친구랑 놀다가.

-얼른 손 씻고 와, 밥 먹게.


아이의 엄마는 다 식은 밥과 국을 데우기 시작한다. 아이의 엄마는 까맣게 모른다. 아이가 귀신에게 간을 빼어 먹혀서, 불량배들에게 얻어맞고 강물에 던져져서, 번개에 맞아 기억을 잃어 집을 못 찾아와서, 오토바이에 치어 죽어버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자신이 해준 밥을 두 번 다시 먹지 못할 뻔했던 사실을.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