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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드 Sep 14. 2022

아무런 글


1.

“어머니, 아이 축구를 잘 시키려면 우리 구장을 다 덮을 수 있는 이불이 필요합니다.”

꿈속에서 나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아니, 저렇게 큰 이불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혹시 꿈인가, 하는 순간 잠에서 깼지요.

아직 어두운 새벽녘이었고,

제법 쌀쌀했습니다.

아이들이 양옆에서 각자 이불을 돌돌 말고 자고 있었고

나는 맨다리를 내놓고 웅크리고 있더군요.

아마 나는 이불이 너무 간절했나봅니다.


2.

<네 멋대로 해라>라는 드라마가 종영되고

꽤 지나서야 그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친구가 매일 한 편씩 시디에 구워서(오븐에) 건네줬습니다.

“경, 꼭 하루에 하나씩만. 아껴서 봐야 돼.”

드라마 속 주인공 이름이 하필 ‘경’이었다는 것과

매일 밤 같은 시간에 드라마를 보고 다음 날 교정에 나란히 앉아 전날 밤 본 것에 대한 감상을 나누던 그 과정이며

방 한 구석 차곡차곡 쌓여가는 시디들,

가나 초콜렛을 쪼개지 않고 입으로 베어 먹던 나를 따라하는 모습,

키가 크지 않아서 내가 무리하게 올려다보지 않고도

눈높이를 맞출 수 있었던 것,

그냥 모든 것들이 다 특별하게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그 친구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고 말았습니다.

그 새벽에, 같이 바다를 보러 가자했을 때

같이 갔더라면,

용기를 내었더라면,

알았을 테지요.

그 마음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3-1.

내가 행동하는 그대로 해석해주는 사람은 드뭅니다.

나 역시 다른 이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찌된 건지,

“아니, 정말 모르셨어요?”

라는 말을 최근 들어 몇 번 들었습니다.

나는 정말 몰랐습니다.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 말을 하지 않은 거죠?

왜 내가 다 알아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요, 나는 눈치가 빠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도 요새 알게 되었다고요.

나는 그냥 감정의 흐름만 아주 조금 느낄 줄 압니다.

뭔가 다르다, 딱 이것만.

내가 멋대로 해석하고 멋대로 내 감정을 품었던 거라면

그것으로 기분이 상했고, 그로 인해 당신도 나를 오해하게 된 거라면

정말 미안합니다. 이제라도 깨끗이 풀어버립시다.

그리고 나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려 노력해야겠어요.

내가 행동하는 그대로 해석해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3-2.

곰곰이 생각해보니,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네요.

갓 대학에 입학해서 막걸리 사발식을 하는데

처음으로 막거리를 마시고 취해버린 내가

이선희의 <J에게>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2000년대 초반이면,

와, 얼마나 많은 여성 아이돌들이 활약하던 때인데.

그날의 싸했던 분위기.

와, 차마 그 자리에 붙어있을 수 없어서

막걸리 병 챙겨나와 운동장에 앉아 혼자 병나발 불던 기억.

아주 오래 전에도 제가 조금 그랬네요.

눈치도, 센스도.

늘 그런 건 아니었길.

 

4.

압박을 해와서

아무 글이나 아무렇게나 썼는데

쓰고 나니

어느 한 지점에서

더 깊은 글을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선선했던 공기가 갑자기 텁텁해졌습니다.

벌써 오후가 되었네요.

서둘러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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