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낙원

by 주드

딸에게 주제를 골라 글을 써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늘 책을 가까이했는데
글쓰기는 어려워했습니다.
학교에서 내주는 일기 숙제도 미루다가 간신히 써가곤 했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전부터 글쓰기에 재미를 붙인 듯 보입니다. 엄마가 내주는 글쓰기 외에도 혼자서 뭔가를 쓰고 있습니다. 제법 길고 내용이 촘촘합니다.

문득 아이가 한글을 익혔던 과정이 떠오릅니다.
아기 때부터 아이에게 정말 많은 책을 읽어주었고
엄마가 제 오빠 챙기는 동안 저 혼자서도 이 책 저 책 넘겨보는 시간이 길었는데
내내 아이는 단 한 번도 모르는 글자를 들고 와서 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림책 한 권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오도카니 앉아
오래오래 꼼짝 않는 작은 등을 보며 저는 늘 궁금했습니다.
저 아이는 책 속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한글을 7세가 되도록 읽고 쓸 줄 몰랐는데
정말 어느 날 갑자기 문장을 읽었습니다.
하운아, 너 한글 아는구나!
아무도 모르게 자기 속에다 차곡차곡 쌓고 다지고 닦고
그렇게 오랜 시간 공을 들이다가
마침내 때가 되어 햇빛 아래 내놓은 것만 같았습니다.

아이에게 글쓰기도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아이의 글이 달라졌습니다.
학교에 내는 일기장 말고,
자기 머릿속에 또 다른 노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노트에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고 했나봅니다.

어제의 글쓰기 주제는 <낙원>이었습니다.
아이가 잠든 후 아이가 쓴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낙원은 바라는 것이 모두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마음껏 할 수 있다. 누구의 바람도 받지 않아도 된다."

두 번째 문장까지 읽고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아직도 틈만 나면 품에 파고들어
엄마 가슴 만지느라 여념이 없는 아이인데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자기 안에 이미 작은 세계를 가지고 있는 아이라고,
진즉 짐작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생각해서 쏟아부었던 것이
아이의 세계를 범람시킬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은 벽돌 하나, 이름 없는 풀꽃 하나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 없는 세계인데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들을 망가뜨려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세계에서 나의 사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아니, 그 작은 세계에 들어가려면
‘허락’부터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할 날이 아주 많이 남지 않은 듯해
조금 쓸쓸해지려 합니다.

그럼에도
아이에게 꽃씨를 건네고
온화한 햇빛을 쬐어주는 것 같은,
아이의 세계를 위해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보려 합니다.

그렇게 나의 사랑을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겠습니다.
얼마나 마음 아플지
감도 오지 않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