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될지 어떻게 알겠어.
' 난 정말이지 평범하고 흔해빠진 사람이야. '
어느 날 그녀는 말했다. 그날따라 그녀는 유독 기운이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회사에서의 어떤 일로 무척 지쳐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 왜 그렇게 생각해? '
' 진지하게 생각해 봤는데, 어디에도 나는 없어. 회사에서는 늘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매번 퇴사를 마음먹지만 같은 기수의 선배가 옆에 있어서 몇 달만 버텨보자, 이렇게 생각해. 나의 퇴사로 인해 그 사람한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나는 알고 있어. 내가 언제든 퇴사를 하더라도 내 자리는 간단하게 메꿔질 수 있다는걸. 올해도 연봉이 동결되었어. 당연한 듯이 말이야. 회사는 내가 이 정도의 연봉으로 지금처럼 열의를 다하기를 바라겠지. 내가 퇴사를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거야. 대체할 사람은 어디에든 차고 넘치니까. '
' 너는 지금 회사에서 일하는 것을 꽤 좋아하지 않았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
' 맞아. 하지만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내가 없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야. 나는 요즘 나의 실체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진짜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벌써 입사한지 10년이 지났어. 그때는 포부에 가득 찼었는데 지금은 그냥 늙어버린 내가 있을 뿐이야. 어떠한 발전도 없이 말이야. 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듯이 두 손을 뻗어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미 깊은 밤이었지만 무척 덥다는 느낌이 든다. 그녀의 말대로 실체가 없는 공간에 둘만 남겨진 기분이었다. 며칠 동안 비는 쉬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비는 어떤 종류의 가는 끈이 연결된 것처럼 멈췄다가도 잊어질만하면 다시 내렸다. 그것은 폭우처럼 쏟아지기도 했고, 봄비처럼 부슬부슬 내리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우산이 없이는 불안한 정도로 기나긴 장마였다.
나는 매실청에 절인 방울토마토와 밀카 초콜릿(유럽에서 자주 먹었던)을 가지고 왔다. 둘의 만남은 단순하지만 신비로울 정도로 어울린다. 그리고 내리는 비를 어렴풋이 바라보며 말했다.
' 그래. 하지만 너는 너야. 회사는 회사의 시스템대로 굴러가는 거고 말이야. 너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것을 누군가가 ㅡ 꼭 타인이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적어도 너의 주변인들은 이미 알고 있을 거야. 네가 잘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
'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점점 내가 없어지는 기분이 들어. 나는 꽤나 안정적으로 살아왔지. 늘 그런 선택만 해 왔어. 그리고 최선을 다해 내가 가진 테두리를 깨지 않으려고 노력해. 그런데 그런 견고한 노력으로 인해 최근에는 오히려 내가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
'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해. 대부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할 만한 계기나 시간이 없이 살아가는걸. 아마 어린아이들은 그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는 여러 겹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되는 거야.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색다른 가면들을 바꿔가면서 말이야. 그렇게 가면을 쓰면서 상황에 맞춰 살아가다 보면 스스로에게조차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선택이 제대로 된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리지. '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 배고프지 않아? '
그녀가 갑자기 망상에서 깨어난 듯 물었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 오전부터 제대로 먹지 않았다. 나는 새벽 4시경 알람이 울린 듯 잠을 깼다. 그리고 저녁 늦은 시간까지 운전을 했다. 나는 내년 초 로마에 갈 생각을 하고 항공권을 검색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내가 하고픈 여행 일정들을 꿈꾸다 보니, 나를 바라보는 꽃사슴과도 같은 딸의 예쁜 눈과 나를 애정 하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우리는 피에프 창*이란 곳에 가서 같이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메뉴가 많아서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로메인이라는 면 요리와 베트남 고추가 들어간 새우 요리를 시켰다. 다행인지 새우 요리에는 현미밥도 딸려 나왔다. 우리는 그야말로 오래간만에 열심히 진지하게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카페에 가려 했는데 마시고 가려니 시간이 마땅하지 않다. 그리고 최근 카페들은 왜 이리 산미가 있는 원두를 좋아하는 것일까?
나는 산미가 있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원두를 고르라는 말을 들으면 '산미가 없는 걸로요. '라고 말한다. 오늘도 그렇게 산미가 덜 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함께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문득 생각한다. 오래전의 일들과 또 더 오래전의 일들을 말이다.
' 우리가 앞으로 언제 어떻게 될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 누가 알겠어. '
나는 말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 나는 인생의 때가 있다고 믿어. 하지만 그보다 ㅡ 언제든 삶은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해. 그렇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행복도 또는 고통도 우리는 이내 익숙해져 버리거든. 그래서 우리는 고통스러울 때 과거의 즐거웠던 때를 추억하면서 살아가기도 해. 하지만 삶은 정말로 알 수가 없지. 어떤 이가 갑작스럽게 떠나버리듯이 나 스스로가 그래야만 하는 시기도 있는 거야. '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 생각한다.
나의 삶에서 나를 만난 사람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기를,
상처받지 않기를.
그래서 내가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사람이었기를.
그리고 또 생각했다.
' 나 정말 많이 변하고 있구나 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