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비는 그쳤고 깨끗한 남청색의 밤하늘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사이에 동그랗게 떠오른 달은 은은한 수은등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화이트 와인 한 잔과 문어 카르파초를, 친구는 페리에를 시켰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저녁 6시가 넘어가면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와인을 마시고 있으면 나는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한 생소한 음식을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물론 자유로운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 '
친구가 말했다. 그는 다른 것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페리에를 들이켰다.
' 세상을 이루고 있는 가치들 중에 사실 가장 오래되고 의미 있는 가치이기도 하잖아. 자유라는 것은. '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지금까지 만난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 중에는 자유를 택하지 않고 설사 불행하다고 생각할지라도 현실에서 기꺼이 벗어나지 않으며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자유로운 것을 바라지 않잖아, 그렇지? '
' 왜 그렇게 생각해...? '
친구는 의문이라는 듯이 물었다.
'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억압된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아. 어쩌면 모르는 세계로 나아가고 싶지 않은 건지도. '
그래, 우리는 왜 자유로움을 택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사람에게 있어 자유란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인 것일까? 삶에서 중요한 가치란 무엇일까? 살면서 우리는 종종 이런 의문들을 품는다. 살아가는 것은 이처럼 많은 것들에 대한 의문과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이런 의문들은 물론 반드시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만, 일단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것들이다.
' 그래, 자유에 대한 나의 경험을 이야기해 볼게. '
그리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은하수같이 섬세한 밤 하늘의 빛나는 별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자유의 의미와 그 감각을 떠올리는 것에 집중했다. 그 안에는 그 세계에서 전부 다 담을 수 없는 세세한 선들이 있었다. 어떤 것들은 극히 예민하고 어떤 것들은 자연스럽게 소멸했으며 일부는 전혀 알 수 없는 형태로 변모했다.
나는 문득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훼손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다. 살면서 만날 수 있는 어떤 아름다움은 사랑의 형태와 아주 비슷하다. 누군가에게 아름다움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순수한 형태로 마음속에 남는다. 시간이 흘러 남는 그 순수한 형태의 마음은 사랑에 가깝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감정 뒤에는 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 위한(또는 유지하기 위한) 추한 것들이 남겨 있었다. 추한 것들은 불온하거나 꺼려 하는 감정과 어두운 것들이 뒤죽박죽 제멋대로 섞여있었다. 전체적으로 그것들은 어두운 밤바다 어딘가에서나 볼 수 있는 규칙성이 없는 일렁이는 물결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빛을 앗아가는 어둠의 일종으로 보였다.
그리고 자유란, 내가 느끼기에는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
그것은 분명 절대적인 공포였다.
' 어느 날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누워 있었어. 그 당시 나는 학교를 마치면 무조건 집으로 돌아와 몇 시간씩 죽은 듯이 낮잠을 자곤 했어. 낮잠이라는 것이 한 번 잠들기 시작하면 습관처럼 매일 비슷한 시간에 잠들게 돼. 그냥 그렇게 정해져 버린 느낌이야.
어제와 비슷한 일들을 계속 겪다 보면 모든 것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져. 색깔로 치면 하루하루가 진한 회색으로 칠해지는 기분이야. 그때의 기분을 설명하자면 ㅡ 하루도 멈추지 않고 하늘에서는 늘 비가 오는 거야. 며칠 동안 어쩌면 몇 달 동안 계속 말이야. 그런 시간들이 오래 지속되면 모두들 지치게 되지. 습습하고 답답한 기분이 들어. 그때의 나는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고 지내지 못했어. 어쩌면 무척 오만한 생각이었지. 나는 어차피 내가 느끼는 이 감정들에 대해 그 누구하고도 마음 놓고 터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
때때로 어떤 친구들은 나를 궁금해하고 다가오는 경우도 있었지. 학교에서 나는 늘 누구하고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않은 채 쉬는 시간마다 책을 읽고 있었어. 그런 태도를 무척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일종의 호의 내지는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었던 거야.
그렇더라도 나는 그 누구하고도 마음을 터놓지 못했지. 나는 어쩌면 무척 예민한 아이였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인간관계에 대한 여유가 없었던 거야. 내가 모르는 사이에 외로움은 한 움큼씩 자라고 있었지. 누구나 완전히 혼자로서 살아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어찌할 바를 몰랐던 나는 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그 야트막한 산길을 따라 쉼 없이 걸었어. 그 길에는 낮은 담장과 돌덩이 사이의 이름 모를 들꽃들이 있었어. 산길 곳곳에는 여러 종류의 운동기구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낮이고 밤이고 운동을 하고 있었어. 열심히 걷다 보면 어디선가 얼굴을 쉴 새 없이 간지럽히는 바람들이 솔솔 불어왔어. 잎을 바닥까지 늘어뜨린 나이가 든 느티나무들도 있었지. 때때로 어디선가 강렬한 꽃 향이 나기도 했어. 그렇게 걷는 시간들은 나에게는 아마도 각별했을 거야.
그런 아름다운 것들을 거쳐 집으로 돌아오면 늘 그렇듯이 아무도 없었어. 나는 시원한 거실 방에 아무렇게나 등을 대고 드러누워 정신없이 잠이 들었지. 그 순간만큼은 내가 반드시 해야 할 것들에 대한 생각이 많지 않았고 그날 하루 동안 종일 겪어야 했던 생명체들의 숨소리를 단절시킬 수 있었지. 내 귓가를 윙윙거리던 사람들의 말소리, 어떤 종류의 욕망, 슬픔과 미움 그리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들과 같은 소소했던 감정들 말이야.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잠들고 있었던 나는 어느 날 이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 만약에 내가 눈을 뜨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정해진 수순이라고 생각했지. 많은 것들이 사실 정해진 숙명에 따라 결정되는 거야. 내가 객관적으로 아무리 나이가 어리더라도, 우리는 아주 잠깐 ㅡ 사이에 이 세상과 완전히 ㅡ 결별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돼. '
자유란 나를 둘러싼 안전함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도전이며 나의 한계를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진지하게 눈을 뜨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 찾아왔다. 나는 죽음 이후의 삶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환경에서 벗어난 이후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그네였으며, 그렇기에 내가 이 공간에서 완전히 사라지더라도 크게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었다. 자유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있는 세계에서 기꺼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영향력을 무(無)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얽매이더라도 사실 놓을 수 있으며, 얽매이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얽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란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으로 이어지는 광활한 대지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라는 존재는 압도적인 공간 속에서 일정 부분 일그러지고 만다.
눈을 떴다.
지금의 나는 물론 자유롭지 않다.
' 물론 자유로운 것은 중요한 일이지. 하지만 꼭 자유롭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는 늘 변하기 마련이니까 말이야. '
나의 말에 친구는 말없이 남은 페리에를 들이켰다. 나 또한 문어와 남은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비가 그친 하늘은 미세 먼지를 모두 잡아먹은 듯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