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遭遇), 그리고 산다는 것에 관하여.

어떤 종류의 일들은 경험하지 않는 편이 나아.

by 정현주 변호사


1. 피아노, 피아노


오래간만에 받은 미션곡인 '슈만 판타지(schumann fantasie in C major op. 17)'는 생각보다 무척 긴 곡이다. 나는 슈만을 잘 모르지만 그 서정적인 감정과 감수성 덕분인지 피아노를 배우면서 생각보다 많은 추천을 받았다. 하지만 십 년이 넘게(어쩌면 유일하게 질리지 않게 끊임없이 관심을 표명하면서 지내온 지금까지) 지금까지 제대로 칠 수 있는 슈만의 곡은 트로이메라이 정도라니 슬프지 않은가! 나는 그 정도로 슈만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사무실 근처에 브람스 음악 학원이 생겼다. 늘 가까운 곳에 주말에도 레슨이 가능한 피아노 학원을 찾아다니다가 또 정신없이 바빠져 최근까지 오래도록 피아노를 쉬었다. 이번에 다시 마음을 먹고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서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마다 레슨을 받고 있는데, 새로운 나의 피아노 선생님이 쇼팽 발라드 1번 다음의 곡으로 또다시 '슈만'을 추천해 주셨다. 이쯤 되니 한 곡 정도는 제대로 파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이번에는 흔쾌히 받아들이기로 했다(그런데 생각보다 무척 긴 곡이다. 왼손이 물속에서 우아하게 떠다니는 백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바쁘게 움직이는 다리처럼 무척 빠르기도 하고... ).


오래도록 피아노를 치면서 즐거움을 느껴왔는데 최근에는 피아노에 대한 열정이 많이 사라졌음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무엇인가 어려운 것을 다시 도전하여 성실하게 해나가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이 들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지금 이미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이제는 몇 개월 때로는 몇 년에 걸쳐서 한 곡만 바라본다고 생각하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스치고 그래서 옛날만큼 집중을 하기 어려워졌다.



2. 과거와의 조우(遭遇)


늘 하루하루가 바뀌는 삶을 살아서인지 누구보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종종 멍을 때리며 과거의 어느 때를 추억하곤 한다. 한정된 시간이나 때는 아니다. 오히려 지난날의 나의 과오(過誤)를 기억하는 것에 가깝다.


문제는 그런 실책들에 대한 자각이 앞으로의 삶에 언제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어떤 기억들은 오로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 그 자체로는 어떤 교훈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렇다. 어떤 종류의 일은 (가능하다면) 무조건 경험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이다.


오래전, 태국에서의 일이다.


당시 나는 떠돌이처럼 한곳에 오래도록 머물지 못하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방콕에서 치앙라이로, 또는 푸켓으로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갈아타며 떠나곤 했고 그 시간 동안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갔다(아마 내가 당시 호텔보다는 한인 민박이나 저렴한 도미토리에 머물렀던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치기에 가까웠던 그때의 시간 속에서 들었던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 속에 갑자기 그 말이 기억이 난다.


' 무엇이든 일단 경험하는 것이 좋을까요? '


그러자, 나보다는 훨씬 나이가 많은 누군가가 나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답한다.


' ... 아니, 어떤 종류의 일들은 경험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아. 어쩌면 영원히 모르는 편이 좋을지도. '


' 살면서 경험하지 않는 편이 좋은 일이 무엇인가요? '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살다 보면 내가 정말 밑바닥까지 왔구나 ㅡ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고 오해지. 내가 밑바닥이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밑바닥이라는 것이 늘 존재해. 좌절이라는 것은 한 번 시작되면 끝이 없는 미로처럼 분명히 더한 것이 존재해. 그런 것을 알아서 좋을 것이 있을까? '


아마 태국 푸켓의 한인 식당이었던 것 같다. 땀이 비 오는 듯 흘렀고 숨이 막히도록 더웠다. 아침에는 거대한 매미와 같은 산벌레가 숙소 여기저기를 기어다녔다. 언제나 객(客)으로 살아왔던 나의 입장에서는 이제는 그의 얼굴도 목소리도 다른 어떤 종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말을 할 때의 절망적인 목소리는 가끔 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는 분명 어딘가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거의 한때를 기억하려는 듯이. 나의 여행의 보따리는 그런 것들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최근의 나는 과거와 조우(遭遇) 했다. 깊어가는 가을 또는 겨울의 초입에서 아직은 따듯함을 가득 머금은 바람을 맞으면서 걷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다시금 확신했다.


모든 경험들이 삶에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물론,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무엇이 되었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지 간에.



3. 소소하고 오래된 것들, 또는 사랑.


소소하고 오래된 것들처럼 마음의 위안을 주는 것이 있을까, 커피를 마시며 내가 사랑하는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나에게 남는 사랑이 많지 않을지라도 비바람이 치던 어느 날, 나의 덧없음을 기억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기억들과 또 스쳐 지나가면서 희석될 좋지 않은 기억들과 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이렇게 삶이란 소소하고 오래된 것들로 채워지고 또 비워진다. 사랑이란 것이 그렇듯이 말이다.


어찌 되었든 삶에서 사랑을 하고 있는 그들이 무척 부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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