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안전한 선택을 위해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도 생각하는 것은 내가 어떤 이에게 위로를 받았을 때, 과연 그에게도 내가 위로가 되는 사람이었는지를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결핍자들의 틈바구니에서 태어났다. 사실상 결핍자들의 핵심과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부모님도 결핍자였고, 나의 삼촌도 결핍자였으며 나의 동생도, 머나먼 친척들도 결핍자였다. 그리고 나는 결핍자들의 도시에서 자라나 풍요로움이나 안정감, 사랑과 같은 따뜻한 감정을 잘 믿지 못했다. 물론 내가 사랑을 받지 않고 자랐다는 것은 아니다.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지하세계에 사는 히피들과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늘 강조하듯, 사랑을 제대로 받지 않고 자란 이가 누군가에게 자연스럽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고 의식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가장 큰 문제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랑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감정들 중 하나이지만, 결핍자들은 마치 피를 구하는 흡혈귀처럼 더더욱 사랑을 갈구한다. 그래서 결핍자들의 일부는 사랑을 받기 위해 말 그대로 흡혈귀처럼 겉으로는 반듯하고 아름다운 외모에 매력적인 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사막에서 태어났다. 언제나 메마른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 메마른 마음을 스스로 충족하는 방법을 잘 알 수 없기에 반드시 자신을 사랑하는 타인을 필요로 하고 또 상대를 의지하게 된다. 마치 오아시스를 바라는 낙타처럼.
그토록 오랜 시간 사랑을 갈구하였으나 막상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대부분의 결핍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야 할지 모른다. 살아오면서 사랑을 제대로 주고받은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하여 ' 미안하다. ' , '사랑한다.'라는 말들을 자주 한다. 어떤 결핍자들은 표현 자체를 잘 하지 못한다. 하지만 결핍자들은 상대방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기 어렵고 자신의 마음도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의 표현들은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다. 결핍자들은 늘 상대가 떠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사랑하는 이가 나를 떠나고 결국은 빛을 잃은 채 완전히 혼자 남겨지는 스스로의 모습들이 남겨져 있고, 본능적으로 그런 상황을 두려워하고 불안한 마음이 든다.
자신의 마음이 안정적이지 않은 까닭에 그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 외에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불완전한 자신이 사랑을 얻어 고독하고 외로운 삶이 따뜻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들 스스로도 그 사랑이 사랑이 맞는지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하기 어렵고, 나와 같은 결핍자들은 사랑 자체를 하지 않으려 마음의 문을 닫고 견고한 성을 쌓기도 한다. 무엇이 되었든 사랑을 간절하게 바라면서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회피형 결핍자이든 집착형 결핍자이든 방향성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조금 학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루마니아에서 있었던 일을 계기로 만들어진 존 볼비의 애착 이론에 대한 이야기이다. 20년 동안 독재정치를 한 니콜라에 차우세스쿠는 집권 시절에 무조건 기혼 여자는 아이를 넷 이상 낳고 피임과 낙태를 완전히 금지시켰으며, 이를 어기면 무조건 죽이는 말 그대로 정신이 나간 정책을 펼친 적이 있었다. 이 바람에 수도 없는 아이들이 버려졌고 고아원은 마비 상태가 되었는데, 1989년 차우세스쿠가 그의 사치스러운 아내와 혁명으로 총상으로 사망하면서 그의 아이들(*차우세스쿠의 아이들)이 만천하에 공개되게 되었다.
너무 많은 아이들이 버려지다 보니, 당연히 사랑을 느끼면서 아이들이 자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몇 년을 걸쳐 자라면서 누군가의 따뜻한 포옹이나 스킨십이 전혀 없이 자라는 것이 일반적이었고(아마 많은 아이들이 기본적인 보호를 받지 못해 죽었을 것이다), 고아원의 보모들은 자신의 능력보다 너무 많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너무 힘든 나머지 만 1세 미만의 아이들에게는 직접 우유를 먹이지 못해 우유병이 기둥에 매달려 있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차우세스코의 사망 이후 이렇게 발견된 아이들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감정의 상호작용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치유가 불가능했다.
동물들은 태어난 이후 오래지 않아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많은 것들을 이미 가지고 태어난다. 그에 비해 사람은 얼마나 연약한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것들을 터득하는 시간을 동물과 비교한다면 그 기간은 지나칠 정도로 길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그런 기본적인 상황이 충족이 되더라도 그가 정서적인 면에서까지 완전히 잘 자랐는지는 조금 다른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늘 사람은 누구나 깨끗한 도화지의 상태로 태어나며 너무나도 불완전한 형태이기에 무조건적인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주 작은 식물처럼, 잘 자라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도 없이 따뜻한 햇볕과 적절한 물이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결핍자들은 자신이 결정하지 않은 삶 속에 던져진 뒤에, 그 이후까지 잘 자랄 수 있는 충분한 영양공급을 받지 못했다. 그렇게 오랜 기간을 삶의 목표, 또는 지향점을 위해 방황한다. 그들에게는 과거의 향수가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또는 이미 태어났으나 앞으로 살아나가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빛을 향해 떠난다. 막막하고 어두운 밤바다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등대와 같은 불빛은 결핍자들을 인도하고 또 안심하게 한다.
하지만 결핍자들은 그 빛을 사랑하지 못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결핍자는 빛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만큼 강하지 않고 담대하지 않으며 조금의 여유도 없다. 너무 많은 것들이 그들의 마음을 가득 채워 자기 스스로를 제외한 많은 것들을 볼 수 없도록 만든다. 나는 오랜 시간 회피를 해 왔다. 우물에 들어가 마음의 성벽을 쌓는 일만이 오로지 나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고, 안전한 선택을 위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적어도 사람과의 인연에서만큼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없었다. 많은 이들이 나를 찾아오며 또 통과해간다. 멀리서 보이는 나는 빛이 나지만 가까이에서 보는 나는 투명할 뿐이다. 그곳에 나는 없으며, 나를 잡으려 하지만 그저 통과할 뿐인 것이다.
물론 나도 한때는 꿈을 꾸었다. 내가 인연(因緣)을 소유(所有) 하는 꿈을.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고 나는 여전히 내가 투명한 것을 본다. 투명한 이는 어떤 것도 잡을 수 없다.
결핍자인 나에게는 너무 원대하고 어려운 꿈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