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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Jan 21. 2024

행복하기 위해 스스로 알아야할 것들.

최선을 향해 나아가는 길

깨달음이란 그때그때의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 인간적인 질서의 전체 속에서 자기가 차지하는 위치를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추측되지만 아무튼 점차 자기 인식으로 초점이 옮겨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크네히트가 깨달음의 시작에서부터 더욱더 자기의 특별하고도 유일한 위치와 사명을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중에서>



며칠 전 나는 크네히트가 유희 명인을 찾아 떠났던 것처럼 특별한 약속을 잡았는데, 이 이상하고도 특별한 약속은 우연한 계기로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다.


약속이 있었던 오늘은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나는 약속 시간 한참 전에 도착하여 바깥으로는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저녁 시간이 지나가고 있던 때라 디저트로 빵을 먹을까 했으나 예상치 못하게도 카페에 구운 주먹밥이라는 메뉴를 팔고 있어서 저녁 겸 구운 주먹밥을 시키고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그는 네이비색 자켓에 두터운 니트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그는 한눈에 나를 알아봤다. 하지만 나로서는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데다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비교하여 그의 이미지가 너무 많이 달라져서 바로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는 달라졌다. 지금은 좀 더 수척해지고 눈빛이 날카로웠으며 뭔가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반가웠다. 무척.  


" 어떻게 지내셨어요? "


반가운 마음에 나는 물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그 이후 단 한 번도 만난 적도,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지만 막상 오랜 친구를 만나자 그 세월의 간극이 남김없이 사라진 듯 느껴졌다. ' 현주씨는 그때랑 똑같네요.... '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아 말했다. ' 저는 많이 변했죠? '


나는 이미 커피를 한 잔 다 마셔서, 그는 뜨거운 커피를 시켜 가져왔다. 그리고 한동안 적당한 말을 찾는 듯 세심하게 고민을 했다. '제가 일을 하는 것을 제외하고 사적으로 사람을 만난 것은 너무... 오래간만에 일이라, 이상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좀 이해해 줘요. ' 그리고 그는 강조하듯이 덧붙였다. ' 저의 이야기가 재미없을 수도 있고 단어 표현이 이상할 수도 있어요. 또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언제든 제지해 주세요. '


하지만 나는 사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것이다. 당연히 이야기가 재미없을 리가 없다. 그리고 오래전에도 그의 이야기가 재미가 없었던 적도 없다. 나는 영감(inspiration*)을 주는 사람이지만 반대로 영감을 잘 받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몇 달간, 나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닌 나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나누어 주는 것은 좋다. 하지만 나에게도 영감이 필요했다. 서서히 침전( 沈澱) 되고 있는 바닷속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들은 흥미로웠다. 그는 완전히 혼자가 되어 몇 년을 보내면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혼자인 그에게는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았다. 현재의 그는 다음 과제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근원*을 찾는 것이다. 물론 관심의 주제는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그는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 나는 상대의 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 있지만 반대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죠. 주로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면, 상대방은 나의 말이 어렵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 나는 상대에게 맞춰주는 관계가 되고 그것은 나를 갉아먹었죠. 결국 나는 언젠가 이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만이 나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나와 마음이 통하는, 소통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고 있어요. 그것은 무척 소중한 일이죠. '


그는 마음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함께 있느니 차라리 혼자 있음을 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꽤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시간이 갈수록 그에게는 독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진짜가 아닌 관계를 혐오했다.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서로의 말을 이해하고 또 상대가 죽었을 때 진심으로 슬픈 마음이 들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희귀하고 드문 일인지 알고 있기에 그 소중함을 알고 있지만 지금 시점에서 찾아 헤매고 있지는 않다.


그가 말한 것들은 놀랍게도 내가 생각했던 것과 일치했다. 다만 나는 그처럼 완전히 혼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 방식으로는 나를 채울 수 없고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지점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최근의 생각했던 것들을 말한다.


' 제가 느낀 것도 비슷했어요. 하지만 어찌 되었든 사람은, 혼자서 채워지는 것은 한계가 있고 결국 사람으로부터 채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어쨌든 저의 경우는 그래요. 그리고 아마도... 저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럴 거예요. '


하지만 그의 경우에는 마음을 나누는 상대를 찾는 것은 중단한 것으로 보였다. 어찌 되었든 현재의 자신이 나쁘지 않기에. 그것은 오래도록 완전히 혼자 있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일 것이다. 나는 어렴풋이, 그 감각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더라도 분명히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 감각이다.


언젠가 나는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 어제와 오늘과 그다음 날이 비슷할 것이고 그것을 반복하는 것은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로 생각되었다. 나는 너무 지쳤고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때는 내가 없어진다고 했을 때 그 어떤 것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남겨야 할 것이나 그리운 것이나 책임감 등 어떤 감정에서도 나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차가운 반지하 방바닥에 누워 곧 나에게 다가올 죽음을 기다렸다. 적극적으로 죽음을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삶을 완전히 놓는다면 당연히 그다음에 일어날 일은 당연히 죽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누워 있은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분명 모든 의식을 꺼놓은 채 눈을 감고 오롯이 누워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처음으로 나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었다. 피가 순환하는 소리와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그것을 이어가기 위한 여러 가지의 과정들을 느꼈다.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척 기이한 감각이었다. 죽음이라는 소멸로 향할수록, 마치 반대 급부처럼 나의 몸은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나는 깨어났다. 고통이 지난 이후에 말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하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거나, 무척 어려워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오래전의 이 일을 거의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래전의 그 일이 생각났다.

어떤 기억들은 어쩌면 미라처럼 봉인되어, 언제든 그 순간으로 돌아가면 완전히 훼손이 되지 않은 채로 드러나는 것일까? 나와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고독한 지점에서 이해가 가능했던 것인지, 홀로 있음의 명인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특별히 예민한 사람들은 자신과 통하는 사람을 무척 원한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이미 예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에 자신과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삶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 최선(最善)을 향해 가고 내 존재는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나의 소명(召命)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나는 집착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렇다고 내가 혼자 있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나는 가능하다면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최선을 향해 계속 나아갈 거예요.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


' 현주씨는 그럼 자신의 최선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요?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


' 네, 아마도요. '


그의 질문에 나는 웃었다. 비로소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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