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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Feb 12. 2024

쇼팽 발라드1번의 다음 곡으로 프렐류드 16번,

기초가 없는 취미피아노생의 애환


나는 오래전부터 피아노를 쳐 왔는데, 사실 제대로 피아노를 배워본 적은 별로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피아노를 잘 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 빛나는 재능이 있으면 가장 좋지만 그것은 사실 피아니스트의 영역이고 우리와 같은 범인(凡人)들에게 피아노 연주는 사실상 막노동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늘 몰입을 하는 성격이라, 피아노곡을 한 곡 정하면 틈이 나는 대로 그 곡만 치다가 어떻게든 완성을 시켜야 끝이 났다. 이런 이유로 한 곡을 일, 이년 넘게 붙들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성인 피아노 학원을 전전하면서 피아노를 배우다 보니 성인 피아노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음대생들과 대학원까지 나오거나 유학을 마친 피아노 전공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피아노의 세계에서도 실력의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 고시생으로 공부의 세계에 발을 담근 적이 있는데, 공부의 세계도 그 앞으로 갈수록 실력의 차이는 어마어마할 정도이다. 어디를 가나 고수 및 전문가의 집단으로 갈수록 실력의 차이가 현격하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영역과 실력은 생각보다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피아노의 경우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어떤 곡에 대한 레슨은 사실 그 곡을 칠 수 있는 실력자의 경험에 비례한다. 피아노를 잘 치는 것은 단지 음표를 읽어내고 암보를 하여 악보에 적힌 빠르기대로 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곡은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따라 또는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소위 거장으로 갈수록 더욱 그렇다. 그들은 같은 건반을 쳐도 소리가 다르다고 한다.


지금까지 많은 선생님을 거치면서 나와 잘 맞는 선생님, 또는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알려주는 선생님을 만나기는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운이 좋게도 이번에는 상당히 괜찮은 선생님을 만났다. 사실은 집 바로 근처에 있는 수많은 피아노 학원 중 하나였는데, 어떻게 봐도 초등학생 아이들을 위한 피아노 학원처럼 생겨서 이곳이 성인도 레슨을 하는 줄은 몰랐고 심지어 주말에 레슨이 되는지도 몰랐다.


우연히 들어간 피아노 학원에서 나는 원장 선생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 현재 다니고 있는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이 학원으로 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의 화려한 경력이나 말투 때문이 아니다. 뭔가 그녀에게 배우면 나에게 빠진 부분을 채울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너무 바빠서 피아노를 거의 치지 못한다고 하면서 거의 몇 년에 걸쳐 붙들고 있는 발라드 1번을 쳤다. 날 가만 지켜보던 원장 선생님이 나보고 기초가 전혀 없다는 말을 했다. ' 다른 건 다 되는데 손가락 기초가 없네요. '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나는 이해도 빠르고 표현도 할 수 있고 악보도 잘 읽는다. 그럴듯하게 흉내(?)도 낸다. 하지만 기초가 없기 때문에 명확한 한계가 있다. 프렐류드 16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손가락 기초를 만들어야 한다. 더 이상의 흉내는 그만둬야 한다. 손가락만 잘 돌아가면 악보 읽고 치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다.


그래서 그녀가 준 것이 처음 보는 손가락 연습 곡이었다. 이 곡은 악보도 악보지만 내 손가락이 얼마나 경직되어 있는지 바로 알게 해주었다. 손가락들은 나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각자의 손가락들은 건반 위에서 열심히 떨다가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게다가 하농을 제일 싫어하는 나에게 그녀는 하농을 내어주며, 붓점, 스타카토, 레가토 연습을 매일같이 하라고 한다. 그것과 별개로 이 손가락 연습곡은 하루에 30분씩(?) 연습을 하라고 했다. 조금만 연습을 해도 금방 좋아질 것이라며.


원장님이 주신 손가락 연습곡


하지만 하루에 30분이라니.. 일을 하다가 가끔 끼니도 거르는 나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래도 집에 디지털 피아노가 있으니 밤늦게 연습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 묘한 자신감이 생긴다.


몰입을 잘하는 나의 성격답게 나는 무엇인가를 시작하면 그것만 꾸준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데, 피아노 곡은 늘 내가 투입한 대로 결과가 나온다는 점에서(다만 그 결과가 생각보다 무척 느리게 나온다), 무척 안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곡은 늘 내가 아는 만큼 표현이 된다. 내가 잘 모르기 때문에 아주 얕은 세계에 다녀오지만 같은 곡이라도 좀 더 깊이 파고들면 또 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면 그 곡은 무척 깊이가 있어진다. 대부분의 예술이 그렇듯이 아는 만큼 감동이 온다. 피아노도 물론 그렇다.


몇 주전 베네치아에서 봤던 그림들을 봤을 때도 나는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전에는 어떤 그림을 봐도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림들이 가지고 있는 그 나름의 향수와 마음의 울림을 나는 조금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딱히 어떤 그림 하나가 내 눈을 잡아끌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문득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많은 것들이 고갈되고 창조되었으며 소멸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프렐류드 16번을 제대로 치기 위해서는(물론 아무리 연습해도 피아니스트처럼 빠르게 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또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물론 알 수 없다.


하지만 뭐, 그렇더라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지금 시점에 한 번 도전해 보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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