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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Feb 05. 2024

과오(過誤)와 우물의 밑바닥으로.

상실의 아픔


1. 과오(過誤) - 친구와의 대화 중에.


내가 원하는 대답이 있어. 그런데 상대방이 전혀 다른 대답을 한다고 치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내가 그 상대를 얼마나 좋아하고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만약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지 않은, 사실은 원하지 않았던 대답을 한다고 해.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하지만, 내가 상대를 좋아한다면 우선적으로는 상대의 대답에 맞춰서 생각해 볼 거야. 내가 얼마나 맞출 수 있는지를 말이야. 설령 맞추려고 노력한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말이야. 그게 첫 번째야.


두 번째는?


두 번째는 ㅡ 받아들이는 거지, 내가 상대를 아무리 좋아하더라도 상대는 나와 다르고, 늘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잖아. 그래서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야. 설령 이별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될지라도.


그게 가능해? 보통은 힘들지 않을까?


당연히 처음에는 힘들지. 대부분은 상대가 원하지 않았던 대답을 했을 때, 그 사실을 왜곡하거나 또는 회피하기도 하고 또는 받아들이지 못해 화를 내기도 해. 왜 당신은 그런 답변을 하는 거냐고 말이야. 마치 사랑을 고백했다가 거절당했을 때와 비슷한 거지. 나는 간절하게 마음을 담아 뜻을 전했는데 상대방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절을 하는 거야. 그리고 진심이었던 만큼 거절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맞아, 진심이면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무조건 힘들지.


하지만 받아들여야 해.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해서 내가 원하는 상대의 인생에도 주인공이란 법은 없거든. 내가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더라도 상대의 인생에는 나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에 불과할 수도 있는 거야. 마음의 보장이란 것은 의미가 없지. 내 마음의 크기도 내가 결정하지 못할 텐데, 어찌 상대의 삶에 내가 차지하는 만큼을 알 수 있겠어.


그걸 조금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아니, 아쉽게도 없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 이건 사실 회피가 불가능한 거야. 상대의 마음이 내 맘 같지 않고 상대의 길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저 조용히 받아들이는 거야. 때때로 마음은 일렁거리겠지. 바로 진정이 안 될 수도 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좀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거야. 실은 내가 불가능한 것에 대해 바라고 있었다는 것, 고통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그 고통의만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어떠한 감정들을 나에게 후회와 자책, 긴장감을 만들어내지만 결국 괜찮아진다는 것도 함께.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 오는 것이 아니야. 오로지 내가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온 나의 과오(過誤)인 거야. 


2. 드디어 우물로 내려가다.


십수 년 전, 나는 나의 죽음을 아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우물의 바닥으로 내려갔을 때 일어났다. 하루하루가 지치고 힘들었던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 나를 깨달았다. 하지만 굳이 침잠(沈潛)을 거부할 이유는 전혀 없었기에, 나는 그대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눈을 감고 완전히 물속에 빠져들었다. 그 안에는 그 어떤 외로움도 고독도 없었다. 마치 감정 전체를 둥실거리는 물의 흐름 속에 흩어지도록 맡긴 채 스펀지 같은 것으로 하여금 어떤 감정이든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뭍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졌고, 완전히 혼자가 되었으며 물의 색은 짙어져 이제는 피아의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컴컴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더 이상 날카로운 칼로 심장을 죄어오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심장의 소리만 크게 뛸 뿐이었다. 지난날 내가 잘못 판단했던 것들이나 헤아릴 수 없이 저지른 나의 잘못들로 인한 자책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오로지 침묵만이 존재했다.


그 고통의 시간은 하나하나 글로 남기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시간을 보내고 언젠가 다시 뭍으로 올라왔을 때 당연하지만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무엇인가 지나치게 이미지가 바뀌었던 까닭이다. 나의 정신은 파괴되었고 그 안에는 나와 비슷한 다른 영혼이 내 육체를 사로잡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기억들이 모두 생생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마치 나의 죽음을 아주 가까이에서 목도한 느낌이 들었다.


우물에서 나올 때, 나는 그 기억들을 세심하게 봉인했다. 그리고 우물에 들어가는 일 따위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대부분의 기억이 흐릿하게 남을 만큼 고독하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 내가 다시 물에 빠져 침잠((沈潛)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이런저런 과정들이 있었을 테지만 굳이 지금 이 순간에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결코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또다시 빠지고 말았고, 이 일은 내 삶에 반드시 예정되어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는 어떤 반항도 무의미하다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전과 달리 나는 이 세계에서 완전히 소멸(消滅)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나는 필요한 만큼의 겉으로의 나를 남겨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 외의 나는 하나도 남김없이 바닥으로 흘러넘쳐서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


물론 아직 바닥에 닿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아직까지의 나는 종종 소통을 원하고 있다. 하지만 침잠의 방향성은 이미 정해졌기에, 뭍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나는 점점 더 짙은 색의 농밀한 물속에 갇혀 어떤 감정도 느끼기 어려운 상태가 될 것이다. 눈이 감기고 물속에 완전히 적응해 뭍으로 올라가는 길을 잃어버릴 것이다. 나는 추위를 싫어하지만 이 강렬한 추위는 오히려 감각을 마비시켜 따뜻함을 모르는 상태로 만든다. 우물의 모든 것들은 매우 단순하고 대단히 합리적이다. 이곳에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이 완전한 세계에 침범해 온 '나'라는 존재 정도랄까,


그래서 '나'는 그 존재를 숨기고 물 속에 잠겨 함께 상실(喪失)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끈한 바다속의 해초와 같이, 태초부터 그랬던 것처럼 나는 사라지고 없다.


그야말로 바라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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