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달 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바빴다고 해도 좋을만큼 하루도 제대로 쉬는 날이 없었다. 원래 나는 일을 오래도록 지속하지 못하는 편이다. 이 것은 고시 공부를 할 적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때부터 집중은 잘 하는 편이었지만, 나는 늘 장거리 보다는 단거리 선수에 가까웠다.
또한 계산을 잘하기 보다는 영감이 좋은 편이었다(계산은 지금도 대단히 못하는 편이다). 가령, 내가 '남양주'에 가기로 결정한 것은 순전히 '좋은 느낌'에 가까웠다. 이 곳이 지리적으로 어떤 이점이 있을지, 앞으로의 발전가능성이 얼마나 될지에 대해서는 사실 큰 관심이 없었다.
때때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결정하기까지 대단히 오래 걸리기도 하는데(그것이 중요한 결정이면 결정일수록), 나의 결정 시간은 대단히 짧다. 그러다 보니, '잘못 선택'한 것에 대해서도 가능하면 빠르게 손절하려고 하는 편이다. 말하자면 금사빠라고 할까,
물론 나도 가끔, 이유도 모르는 집착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도 지나다 보면, 많은 것들이 의미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살다보면, 우리가 애정을 가지고 기대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생각보다 (나의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무엇보다, 내가 애정을 가지는 것들은 계속 변한다. 우리는 상처를 받은 친구들에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꺼야. '라는 말들을 한다. 지금은 괴롭지만 점차 사그라들꺼야... 그런데, 정말 시간이 지나면 감정은 점차 작아져서 마침내 괜찮아지는 것일까?
아니다. 실제로는 그냥 사라져 버린다.
나의 사랑과 애정들, 내가 가지는 감정의 편린들, 부정적인 생각들이나 증오, 그리움과 같은 감정들은 때때로 나를 너무나도 힘들게 한다.
여행을 떠나면서, 나를 괴롭히는 감정들을 털어보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아무리 털어내려고 노력해도 떨치기가 어렵다. 내가 감정의 손을 놓는 그 순간을 내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감정과 인식이란 선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 것들은 그냥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소멸된다. 마치 때를 기다리는 과거의 잔해와 같이, 어느샌가 우리는 아무리 큰 감정의 껍데기라도 갑자기 기대했던 것보다 아무렇지 않고, 깨끗하게 사라졌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남는 것은 그냥 내가 선택한 나의 기억이다. 물론, 잊을 수 없는 기억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상처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와 결핍은 낙인처럼 새겨져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일부가 되어 있지만, 우리의 감정들은 변하기 마련이다.
상처와 감정은 전혀 다르다.
감정들은 반드시 지나간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바람처럼.
따라서 내가 지금 아무리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슬픔의 시간은 반드시 지나가게 되어 있다. 단지 그 시기를 우리가 정하지 못할 뿐인 것이다.
오늘은 간만에 한가로운 오후였다. 어느덧 봄이 온 건지 한 낮은 따뜻했고, 문득 사무실이 없던 지난 겨울, 하얀 눈밭을 가로 지르며 들어갔던 강동 테라로사 커피가게에서 열심히 서면을 쓰던 내가 떠올랐다. 그때는 나그네처럼 여기 저기 자리를 옮겨 다니며 글을 썼다. 그리고 그 전에는 나는 몇 년에 걸쳐 공부를 했었다(물론 그때도 공부를 계속 하기는 어려워서 중간 중간 잘 쉬어야 했지만).
시간의 흐름은 언제든지 그 이전의 때로, 또 어느 시절의 나로 넘실넘실 넘나들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두 다리를 뻗고 누워 잠시 눈을 감는다. 아주 잠시, 여유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어느덧 오래도록 날 괴롭게 하던 감정의 편린들은, 더 이상 나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또 내가 싫어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그 무엇도 날 거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