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몹시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내가 태어났던 곳도 그랬지만 더욱 큰 문제는 계속해서 집을 옮겨다녀야 했다는 것이다. 어릴 때에는 그 이유조차 알지 못했고, 부모님은 그 누구도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구로구 가리봉동 어딘가 한 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부모님, 나와 내 동생을 포함한 네 식구가 한 방을 쓴 적이 있었다. 여러 번 이사를 다니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그때의 기억이 가장 우울한 기억이다.
방이 너무 작은 탓에 4명이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면 나는 혼자 등교했고, 학교가 끝나면 5시쯤 혼자 집으로 왔다. 그 동네는 술 취한 아저씨들이 너무 많이 지나다녀서 나에겐 해가 지면 자동으로 '외출 금지령'이 떨어졌다. 물론 날 감시하는 사람은 없었지만(부모님은 늘 밤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부모님의 '밤이 되면 나가지 말아라.' 라는 말을 듣곤 했다.
어느 추운 겨울 날이었다. 나는 갑자기 뜨끈뜨끈한 호빵이 먹고 싶었다. 나는 원래 팥을 싫어했고 야채호빵이나 피자호빵을 좋아라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나는 느닷없이 야채호빵이 먹고 싶어졌고, 방에서 나와 대문을 가로지르면 1분 거리에 편의점이 있었다. 하교 길에 보이는 그 편의점 문 앞에는 늘 뱅글뱅글 돌아가는 호빵 기계가 있었는데 항상 탐스러운 호빵이 가득 쌓여 있었던 것이다.
어린 나는 내 마음의 소리를 조금 더 기다렸다가 용기 있게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그때도 나는 그렇게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밤에는 나가지 말아라.'라는 수 없이 들었던 말이 귓 속에 맴돌아서인지 앞만 보면서 열심히 편의점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편의점에 들어가 드디어 야채 호빵을 샀다! 그런데 북극곰같이 하얗고 통통한 호빵을 쥐어 들고 밖으로 나오니 문득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문득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우리집 근처 밤의 거리는 대체 어떻길래 어른들은 나에게 '야간 외출금지령'을 내린걸까? 그래서 이사를 간 지 몇 달 만에 나는 편의점에서 집으로 가는 1분 남짓의 밤 거리를 걸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낮과 달리 밤이 되면 그 거리에 여자들이 앉아 있는 붉은 창들이 이어지고, 술에 취한 남자들이 거리에 가득하다는 사실들을 알았다. 나는 아침 일찍 학교를 갔고 또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집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집 근처가 이토록 화려하고 술 취한 어른이 가득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호빵을 든 내가 찬찬히 길을 걸어가자, 술에 취한 몇몇 남자 어른들은 어린 나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나는 물론 주위에서 배운대로 아무에게도 대꾸하지 않았고, 빠른 걸음으로 바닥만 쳐다보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맛있는 야채호빵을 남김없이 먹었다. 그리고 야채호빵을 다 먹는 동안까지도, 부모님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이후 이사를 간 동네는 그 전의 동네보다는 훨씬 나았다. 같은 '구로구'였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처럼 구획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20년 전의 '구로4동'거리는, 골목길이란 한 번 들어가면 그 길을 알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미로같은 곳이었다. 한 마리의 바퀴벌레가 어느 집으로 숨어 들어가도, 삽시간에 다닥 다닥 같이 지어져 있던 주위의 집들에게 전부 퍼질 정도로 집들이 붙어있고, 옆 집에 누군가가 소리라도 지르면 그 소리가 아무런 여과없이 나에게 들리기도 했다.
'여기는 우리집이야.'
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그 곳이 최초의 우리 집이기도 했고 어린 시절 중에서는 상당히 오래 산 곳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사업은 늘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 때는 나도 '우리집'이란 것이 있었던 것이 마음 편했다. 아마도 당시 엄마가 '우리집'이라는 것을 무척 좋아했던 까닭도 있으리라.
아버지는 늘 가족에게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주로 바깥 사업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가족이란 자고로 '가족이기 때문에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라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그런 신조를 외치면서도 막상 스스로는 가족에게 크게 희생을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가족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받으려 했다. 엄마는 늘 힘이 없었다. 가족에게 희생했지만, 늘 불안불안했다. 결국 나와 내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부터 겉 돌기 시작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부모님을 다른 친구들처럼 좋아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 수록 거리가 쌓여갔고, 다른 곳에서 위안을 찾곤 했다.
가난은 이런식으로 사람의 여유를 앗아갔다. 뺏기거나 빼앗기는 삶, 전쟁터 같은 삶에 가까웠다.
내가 여유가 생기면, 누군가의 요청에 그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는다. 내가 잘 되고 있으면 기꺼이 '오랫만에 만난 친구의 밥 정도는 얼마든지 사줄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면에서 가난이란 '돈이 없음' 그 자체에서 오는 것들보다, 정신적으로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앗아간다. 그것은 다름아닌 조금 더 멀리 생각해 볼 수 있을 '마음의 여유'이다.
나는 가끔, '가난하지만 화목했던 집'을 그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과거,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동네의 분위기를 생각한다. 내가 기억하는 구로 4동의 기억은 거의 전쟁과도 같은 느낌에 가까웠다. 물론 화목한 집도 있었을 테지만, 태반은 다툼의 연속이었다. 가난할수록 오히려 형제들끼리의 소송이 잦았고,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도 몹시 좋지 않았다. 부모님간의 사이는 물론 좋지 않았다. 행복한 결혼 생활은 정말로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가난한 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종종 '돈'이 전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돈'을 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의 목표처럼 되어 버리는 경우도 많다.
한편, 적당히 여유가 있었던 집들은 그렇지 않았다. 부모님들이 여전히 화목한 경우도 많았으며, 가족들이 그토록 돈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단지 '한 곳'에 여유가 있을 뿐인데, 그것은 추운 겨울날의 난로처럼 다른 곳에까지 그 온기를 전파하는 것 같았다. 달리 말하면 삶 속의 단 한 부분에만 여유가 없을 뿐인데도 그 것은 인생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가난한 자들은 '결핍'의 원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다시 말하면 내가 왜 가난한지 모르기 때문에), 그 결핍의 원인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즉 변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환경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 나는 주위에서 '나도 로또 당첨이 되었으면 좋겠다.' , '나도 갑자기 상속받았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어떻게 돈을 벌어야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결국 자라오면서 아무 것도 없는 땅에 무엇인가를 개척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어쩌면 사람은 내가 사랑을 받은 만큼 그 형태만큼 자라나는 꽃과도 같은 것이다. 만약 자라오면서 사랑을 담뿍 받았다면, 그런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베풀어줄 수 있지만, 아무것도 없이 결핍으로 자랐다면, 어떻게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을 되돌려 줄 수 있을거란 말인가?